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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년 어버이날이 돌아오면 새삼 어머니에 대한 그림움과 죄송한 마음에 나를 돌아보고 마음 안에 저장해 놓은 참회록을 쓴다.
 
 하늘에 계시는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하늘에 계시는 어머니를 그리워 하며
ⓒ 이숙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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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의 어머니는 진안에서 부농인 부잣집 맏딸로 태어나셨다. 그 시절 서당의 독 선생님을 집으로 모셔 글을 배울 정도로 조부모님의 관심과 애정을 받고 자랐다 한다. 그런 연유에서 인지 한글을 물론 한문도 잘 알고 계셨다. 어머니 또래 나이에 그만큼 글을 아는 분도 많지 않았다 한다.

결혼할 때가 되어 어쩌다 중매로 우리 아버지와 결혼을 하셨지만 아버지와 어머니는 성향이 달라도 너무 다른 사람들이었다. 어머니는 부유한 집에서 곱게 자란 덕분에 힘든 일도 못하고 더욱이 부엌 일도, 음식도 잘하지 않고 못 하셨다. 늘 대접만 받고 자란 어머니는 억세고 강한 사람은 더욱 아니었다.

아버지는 시골 농부의 아들로 그다지 부유한 집이 아니었다 한다. 젊어서 만주로 가서 직장생활을 했고 술 좋아하고 사람 좋아하고 노래도 좋아하는 낭만이 가득한 분이셨다. 그런 두 분이 결혼을 하고 가정을 꾸렸으니 힘든 일이 많았었다. 그래도 한 동안은 내가 초등학교와 중학교 다닐 때까지는 아버지가 공무원 생활은 하셔 잠시 안정된 생활을 한 적 빼고는 늘 직업이 없으셨던 아버지다.

지금 돌아보니 아버지의 인내력은 직장생활을 잘 견뎌내지 못하고 자주 옮겨 다니면서 사회에 적응을 못하셨던 성향을 가진 분이셨다. 가정생활은 자연히 힘들었고 그렇다고 사업을 할 줄 아는 능력도 없었다. 어머니 역시 생활력이 강한 사람이 아니었다. 그런 연유에서 가정은 평화롭지 못하고 아버지와 어머니는 자주 다투셨다.

맏이인 나는 늘 아버지와 어머니에게 불만을 쏟아내고 일찍 부모 곁을 떠나 독립을 했다. 독립해서 홀로 지내는 나는 늘 외롭고 쓸쓸했다. 혼자서 삶을 꾸려야 하는 힘든 날이 나를 더 외롭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때 나는 시집을 읽고 책을 읽으며 위로를 받았다. 소녀 시절 나는 꿈도 많고 하고 싶은 일도 많았다. 그러나 내 의지대로 살 수 있는 현실이 아니었다. 그런 연유에서 나는 마음 안에 품고 있는 불평불만을 있는 대로 어머니에게 쏟아내며 싫은 소리를 했다. 

"자식에게 부모 노릇도 못하려면 왜 자식을 낳았어? "

지금에야 생각이 난다. 그 말이 얼마나 아픈 상처였을까, 그 말은 듣고 어머니는 얼마나 고통스러웠을까, 어느 부모가 자식들에게 힘들게 하고 싶었을까, 결혼하고 나이 들어가면서 그때 일이 늘 마음 안에 가시처럼 걸려 어머니에게 죄송했다. 그러나 죄송하다는 표현을 한 번도 하지 못하고 어머니를 떠나보냈다. 생각하면 할수록 내가 어머니에게 상처를 준 것은 철이 없는 행동이었다.  

나는 결혼해서도 다정하게 어머니를 대하지 않았었다. 어머니는 다른 자식들에게도 화를 한 번도 내시는 걸 본 적이 없는 마음이 고우신 분이었다. 일곱이나 되는 자식을 어떻게 굶기지 않으려 온 힘을 기울였던 어머니. 우리가 자랄 때는 시대적으로도 어려운 때였고 모두가 힘든 시기였다. 부모님 입장을 이해하기보다는 내 맘대로 살지 못하는 생각만 했던 것이다.

나는 나이 드신 어머니에게 언제나 옷매무새가 마음에 안 든다고 타박만 하고 지적질을 했던 일, 어머니도 어머니이기전 한 사람의 인격체였는데 딸과 엄마라는 관계라서 당연하게 여기고 마음대로 못 되게 굴었던 잘못을 이제야 후회하게 된다. 사람은 누구나 좋고 나쁜 점이 있을진대 어머니의 좋은 점을 칭찬하지 않고 어머니를 이승으로 보낸 나는 죄인이다. 

세상에 낳아주고 길러 주어 고맙다고 사랑한다고 말 한마디 건네지 못한 걸 후회한다. 결혼하고 자식들 낳을 때마다 찾아와 미역국 끓여 주고 딸 회복 될 때까지 돌봐 주시고 집으로 돌아가신 어머니, 막내딸 낳을 때 제왕절개를 해서 내가 위험했던 순간 병원에 누워 있을 때, 삼일 만에 온 시어머니는 젖 떼고 다시 아들을 낳으라고 종용했던 때, 친정어머니는 "아들이면 뭐 하고 딸이면 뭐 하냐, 너 죽을 뻔 했는데" 하면서 끝내 내편이 되어 주셨다.

내가 나이 들어 이제 어머니를 만나러 가는 날이 가까워 오고서야 가슴 절절히 어머니를 그리며 참회를 한다. 내가 세상과 이별하고 하늘에서 만날 때 다정하게 "엄마, 사랑하고 고마웠어, 나를 세상에 태어나게 해 주시고 아름다운 세상을 살다가 갈 수 있게 해 주어서" 해야지. 

어렵고 힘들었던 삶의 고난을 거쳐, 나는 세상에서 원 없이 살다가 어머니를 만나로 갈 거다. 오월 팔일 어버이날, 어머니를 그리며 참회의 사모곡을 불러 본다. 하늘나라가 너무 멀어 들리지 않을지 모르지만 "엄마 사랑해요." 마음 상한 일이 있어도 나한테 싫은 소리 한번 하지 않고 하늘나라로 가신 어머니, 어머니는 진정 세상에 하나뿐인 내편, 나의 어머니셨습니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기자의 브런치에도 실립니다.


태그:#어버이날, #어머니, #참회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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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쓰는 설원 이숙자 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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