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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산청년유니온은 '고객님 10분만 쉬어도 될까요?'라는 주제로 9월부터 매주 콜센터 노동자의 근무환경을 개선과 감정노동에 대한 인식전환을 위한 한 캠페인을 펼치고 있다. 콜센터 노동 사례를 모아서 사례집을 발간할 예정이다. 릴레이 인터뷰는 콜센터 노동자의 사례집 발간을 위해 시작됐다. 콜센터 노동자 릴레이 인터뷰 연재를 통해 많은 이들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기를 바란다. - 기자 주

캠페인 사진
▲ 콜센터 감정 노동자 처우개선 캠페인 캠페인 사진
ⓒ 부산청년유니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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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억지 이야기 같아 평소 드라마를 잘 보지 않는다. 그런데 그녀의 이야기는 한 편의 드라마 같았다. 지난 14일 20대의 대부분을 콜센터에서 보낸 강아무개씨(29)를 만났다. 이런 이야기를 글로 써도 되나하고 고민됐다. 조심스러웠다. 질문에 차분하게, 말 못할 이야기까지 해준 그녀가 고마웠다. 이야기를 마무리 할 때쯤 "이런 이야기 참 오랜만이네요" 하는 그녀의 여유도 보았다.

부산에 온 20살 제주도 소녀

그녀는 제주도 사람이다. 넓은 초원과 시원한 바다. 시골에서의 수수한 어린 시절을 기대하며 고향 이야기를 물어봤다. 하지만 그녀의 기억엔 제주도의 풍경은 없었다. 정확하게는 그녀의 어린 시절이 없었다. 부모님의 이혼과 재혼. 복잡한 가족 관계 속에서 그녀는 빨리 나이가 들었다.

중학교 시절부터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용돈을 벌어 썼다. 학업에 열중하던 고등학교 시절에도 그녀의 아르바이트는 계속되었다. 그런 상황에서도 공부도 그럭저럭해서 주변의 기대와 칭찬이 대단했다고 한다. 공부를 꽤 하던 그녀는 정작 대입 수능시험은 망쳤다. 부모님의 재혼과 아르바이트로 생계를 잇던 청소년 시절. 여기까지도 충분히 드라마 같지만, 진짜 드라마 같은 이야기는 지금부터 시작된다. 

주변의 기대에 미치지 못한 것 같은 죄스러움을 안고 그녀는 부산의 한 전문대학에 진학했다. 부산으로 내던져진 스무살 청춘. 고등학교 때 부터 용돈을 한 번도 집에서 받아 본 적 없었던 그녀에겐 대학 등록금과 생활비도 모두 자신의 책임이었다.

"30만 원의 돈을 들고 하나 밖에 없던 부산의 친구 집에 며칠 머무르기로 하고 부산으로 왔어요. 그런데 그때 들고 온 돈도 부산 온 첫날 잃어 버렸지 뭐예요. 파란만장했어요. 며칠 만에 아르바이트를 겨우 구했어요.

그 때부터 호프집, 편의점, 커피숍 안 해본 아르바이트가 없어요. 자취방에 들어가는 돈을 아끼기 위해 수업이 끝나면 호프집으로 출근하고 호프집 소파에서 잠을 자며 학교를 다닌 적도 있어요. 하루에 두세 시간 잠을 자면서 수업 듣고 알바 하고 했죠. 그래도 등록금 맞추기도, 생활비 마련하기도 힘들었어요."

자취방의 월세를 내지 못해 쫓겨난 이야기, 계란 한 판으로 한 달을 보내던 이야기. 지금은 웃으며 이야기하지만 참 힘든 대학 시절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대학에 다닌다는 건 사치였다. 아니 아무런 의미가 없었다. 미련 없이 학교를 그만뒀다. 이 학교를 다니면서 재수를 해서 더 좋은 학교로 가보겠다던 꿈도, 꼭 성공해야 한다는 주변의 바람도 다 사치가 되었다.

"지금 생각해 보면 삐뚤어지지 않고 20대를 보낸 자신이 스스로 너무 대견해요. 힘이 들 때면 제주도에 있는 엄마에게 전화를 해서 마구 쏟아내기도 했어요. '엄마, 나한테 왜 이래?' 마치 세상에 대고 이야기하듯 엄마에게 하소연했어요. 엄마하고 같이 울었어요." 

학교를 그만두고 본격적으로 직장을 구하기 위해 나섰다. 그녀의 나이 스물 둘이었다. 제주도에서 온 고졸 출신의 여성. 직장을 구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생활 정보지, 인터넷 구직 사이트 여기저기를 뒤지던 중 한 보일러 회사에서 여성 상담사원을 모집한다는 걸 보게 됐다.

전화 상담사... 직장을 구하다

"무슨 일을 하는지 상담 업무가 뭔지, 계약직이 뭔지도 몰랐어요. 그냥 이 회사에 관심이 간 건 회사의 이름이에요. 제주도에서는 A 보일러 회사 하면 알아주니까. 엄마, 아빠한테 이야기하기도 좋았어요."

처음으로 정장을 샀다. 돈이 없으니 좋은 옷을 사 입는 건 꿈도 못 꿀 시기였다. 큰맘 먹고 있는 돈을 탈탈 털어 정장을 샀다. 

간략한 자기소개서를 적었다. 딱히 이력서를 채울 경력도, 이력도 없었다. 유일하게 내세운 건 어린 나이지만 이런저런 일을 하면서 사람을 많이 상대해 왔다는 것, 사람을 상대하는 일은 자신 있다, 이런 것을 강조했다. 물론 실제로도 그랬다. 아르바이트로 단련된 '멘탈'이었으니까.

"A 보일러회사 콜센터에서 일하는 사람은 전국적으로 200명 정도예요. 그때 부산 사업소에서 2명을 뽑는데 20~30명 정도가 지원한 거 같아요. 관할 지역 소장이 면접을 보는데 별건 없었어요.

'왜 이런 일을 하고 싶냐? 주량이 얼마냐?' 하는 걸 물어보는 식이죠. 면접을 보던 소장은 저를 보자마자 인상 좋다는 이야기를 했어요. 제가 인상이 좀 좋긴 좋잖아요?(웃음) 아마 그것때문에 뽑힌 것 같아요. 그리곤 다음날 연락이 왔죠. 출근하라고..."

매일 술, 술, 술... 견디기 힘들었다

전국적으로 콜센터에서 근무하는 사람이 200명이지만 부산에는 4명이 일했다. 서비스 등의 업무를 담당하는 남자 직원들까지 포함하면 30명 정도가 부산 사업소에서 일했다. 전국에서 걸려오는 상담 전화를 지역에 상관없이 무작위로 받았다.

콜센터 직원들은 중앙 콜센터 관리 책임자의 지휘도 받지만, 현장 소장의 지휘도 받는다. 그래서 일이 복잡하다. 아니 이중으로 일한다. 하루에 평균 300통의 전화를 받아야 하지만, 사무실에서는 별개로 고객이 오면 인사도 하고 안내도 하고 상담도 한다. 심지어 점심시간엔 소장님 밥까지 해야 했다. 

반복되던 술자리... 어른이라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반복되던 술자리... 어른이라면 다 그렇게 사는 줄 알았다.
ⓒ fl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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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 생각하면 정말 나쁜 소장이에요. 그때는 몰랐어요. 그저 일자리를 줘서 감사한 분이었죠. 저는 일을 하면서 스스로 아직 어른이 아니라고 생각했어요. 소장님을 비롯해서 함께 일하는 회사 사람들, 거래처 직원들 모두가 너무 다른 세상의 사람들 같았거든요.

술자리에서 보이는 모습들, 나누는 이야기들 모두 다 어린 제가 받아들이기 힘들었어요. 그때가 22살 쯤이었으니까... 그냥 어른이 되면 다들 저러고 사나 보다, 난 아직 어리니까 잘 모르는 거야, 하고 생각했어요. 그렇게 하지 생각하지 않으면 견딜 수가 없었어요." 

술을 좋아하는 소장은 늘 젊은 여성 상담사들을 데리고 술을 마시길 즐겼다. 20대 부하 직원과 소장과의 술자리, 술 따르며 시중드는 건 고스란히 여성들의 몫이었다. 한두 번이면 직장 일이니까, 하겠지만 거의 매일 새벽까지 술자리였다.

그녀는 '아니요'라고 이야기하면 안 되는 줄 알았다. 소장은 점심시간에도 여성들에게 술을 권하기도 했다. 소장이야 술 한 잔하고 쉴 수 있지만, 그녀의 콜 수는 줄어드는 게 아니었다. 이런 생활을 몇 달간 하고 그녀에게 찾아온 건 급성 간염. 참 미련하게 살았다.

"술도 술이지만, 못 볼 걸 많이 봐야 했어요. 지금 생각하면 정말 어마어마한 성추행 사건인데... 회사 내에서는 그런 일이 다반사예요. 그때가 지금부터 한 7년 전이니까 2007년? 사실 그리 오래된 이야기도 아니죠.

서울에서 본사 간부들이 내려오는 주말이면 전화가 와요. 예쁘게 차려입고 나오라고... 본사 간부들과 함께 술 마시고 접대하는 것도 여성 상담사들 몫이죠. 차마 말로 하기도 불편한 여러 일이 있었어요. 술자리에서 이뤄지는 상사들의 여자 직원들에 대한 성추행과 뭐 이런 것들..."

그래도 그녀는 안정적으로 일 할 수 있는 곳이 생겨서 좋았다. 직장생활, 어른이 된다는 건 원래 이런 거라고 생각했다. 그만둔다는 건 꿈에도 생각할 수 없었다. 

감정노동의 끝판, 콜센터 직원 

선배 옆에서 전화받는 걸 보면서 이것저것 물어보기를 3일째 되는 날 처음으로 전화를 받았다.

"전화 내용은 기억이 나지 않지만, 그때 그 느낌은 지금도 잊히지 않아요. 첫 전화가 끝나자마자 헤드셋을 던지듯이 벗었어요. '감사합니다. A 보일러 입니다~' 그 영혼 없는 멘트가 너무 닭살 돋는 거예요. 지금도 그 느낌이 기억나요."

끊임없이 울리는 전화벨 소리. 며칠이 지나면 그런 어색함과 떨림도 사치가 된다. 별의별 고객을 다 만난다. A회사의 주요 품목은 보일러였지만, 생산하는 제품은 그 외에도 많았다. 고객들의 다양한 질문과 요구 사항에 응답하기 위해 제품을 익히고, 고객들이 찾는 부품을 파악해야 했다.

하루에 받는 전화만 300여 통. 서비스 센터를 찾는 고객들을 응대하는 일 등의 잡일들을 하다 보면 지정된 300통의 전화를 채우기는 정말 힘들었다고 한다. 화장실에 갈 시간도 없었다. 한 달 평균 화장실에 다녀온 시간을 포함해 휴식 시간이 어느 정도인지, 받은 전화 통수가 얼마인지 회사에서는 전국 콜센터 직원들의 통계를 냈다.

전화가 걸려오는 것을 다 보고 나면 고객들이 요구한 것들을 모아 두었다가 점심 시간이나 퇴근 시간 이후에 처리해야 한다. 보통 8시에서 10시 사이에 퇴근할 수 있다. 물론 추가 근무 수당이 주어지는 일은 아니다. 여기에 콜 상담원을 향한 반말이나 욕설, 성추행, 억지 부리기, 말꼬리 잡기는 덤이다.

일이 힘들었던 만큼 직장을 그만두고 싶은 마음이 매일 들었다. 하지만 그만둘 수 없었다. 2007년 그녀가 처음 받은 월급은 170만 원. 생활이 안정되기 시작했다. 집에 있는 엄마에게 용돈도 부쳐줄 수도 있었다. '고졸 출신의 여성 노동자에게 초봉 170만 원 정도의 급여를 주는 회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하고 생각했다. 그녀가 콜센터 일을 하는 유일한 이유였다.

마음에도 없는 "죄송합니다"라는 이야기를 하루에 몇 번이나 하는지 모른다. 죄송하지 않은 일에도 죄송하다고 이야기해야 할 땐 정말 억울하다. 아직도 생생한 기억들이 많다.

"고객님이라는 호칭을 써야 하는데 얼떨결에 아주머니라고 했지 뭐예요. 그랬더니 그 따님 분이 전화를 받더니 우리 엄마 무시 하냐면서 막말을 하는 거예요. 죄송하다고 연신 사과를 했는데 말로 안 된다며 당장 찾아와서 무릎 꿇고 사과하라고 하는 거예요. 진짜 어떻게 해야 할지 모르겠더라고요. 반말은 기본이고, 이유 없이 전화해서 욕설을 하는 사람까지... 말도 마세요."

구조조정... 어디로 가야 하나

콜 센터 업무는 전화 받는 일만 하는 게 아니었다.
 콜 센터 업무는 전화 받는 일만 하는 게 아니었다.
ⓒ sxc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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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2년, 회사가 점점 힘들어지면서 회사 내 구조조정이 시작됐다. 이미 그 전 부터 몇몇 팀장과 직원들이 희망 퇴직이라는 이름으로 회사를 그만두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정직원들도 회사에서 대리점 직원으로 옮길 것을 강요받기도 했다. 그녀도 구조조정을 피할 수 없었다. 지역의 상담 센터를 서울 한 곳으로 통폐합한다는 것이다. 서울로 옮기면 집을 구할 수 있게 3000만 원의 대출을 해주겠다고 했다. 

"20살 때 부산에 와서 이제 겨우 자리를 잡고 친구도 생겼는데 서울로 가라니, 말이 되나요? 3000만 원을 가지고 서울에서 어떻게 집을 구해요? 도저히 엄두가 나지 않아서 못 가겠다고 했죠."

그랬더니 구조조정을 담당하던 소장은 서울로 직장을 옮기면 승진을 시켜주겠다고 했다. 그것도 안 하겠다고 하니 그럼 부산에서 여성 최초로 A/S 기사를 해보라고 했다. 말도 안 되는 이야기였다. 갖은 감언이설에도 그녀는 꿋꿋하게 그렇게 할 수 없다고 버텼다.

다음은 소장의 압박이 시작되었다. 소장은 그럼 내가 "회사를 그만두어야 한다"고 이야기를 꺼내기 시작했다. 그래도 자르진 않겠단다. 스스로 사표를 쓰고 나가라고 했다. 아무것도 모르는 그녀도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그럼 실업 급여도 못 받게 되는데... 그때부터 그녀와 회사의 싸움이 시작됐다. 인터넷도 뒤지고, 지인에게 물어보면서 그녀는 그때 처음으로 노동법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됐다. 

회사에 따지기 시작했다. 근로 계약서를 보여달라고 했다. 취직할 때부터 한 번도 근로 계약서를 쓴 적이 없는데 근로 계약서에는 선명하게 그녀의 도장이 찍혀 있었다. 노동법을 대며 따졌더니 그렇게 친절하게 술자리에 끌고 다니던 소장이 돌변하기 시작했다.

"니가 이렇게 해봐야 회사는 벌금 조금 내면 끝이다"라는 협박을 시작으로 소장의 왕따가 시작됐다. 그녀만 빼고 회식하고 회의를 진행했다. 친절했던 주변의 동료와 선배들도 소장의 눈치만 보며 그녀에게 서울로 갈 것을 권하기 시작했다. 믿었던 사람들까지 그렇게 나오니 그녀는 그녀가 지키고자 하는 것이 무엇인지 회의가 들었다.

몇 달간의 외로운 싸움. 마음이 힘들었다. 가만히 생각하니 그만둔다고 뭔 일인들 못할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녀의 외로운 싸움은 그렇게 소리 없이 마무리됐다. 그만둔다고 생각하니 더 당당하게 소장에게 할 말, 못할 말 다 할 수 있었다. 그녀의 첫 직장 생활은 그렇게 5년 만에 정리됐다. 

그 후

그녀는 그 뒤에도 두어 곳의 콜센터에서 일하다 최근 일을 모두 그만뒀다. 첫 직장에서 버림 받은 경험은 회사라는 곳에 자신의 삶을 온전히 의탁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닫게 했다. 아니 노동자의 권리를 알아버린 '탓'일 수도 있다. 

그녀에게 세상을 가르쳐준 첫 직장. 첫 직장이 좀 더 그녀를 존엄 있는 사람으로 대해 줬다면, 그녀를 좀 더 존엄 있는 노동자로 대우해 줬다면, 첫 직장의 어른들이 좀 더 어른다운 모습을 보여줬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태그:#부산청년유니온, #콜센터, #감정노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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