JTBC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JTBC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 JTBC

 
"너, 내가 어떤 사람인지 알면 깜짝 놀랄걸. 응. 나 진짜 무서운 놈이거든. 옆구리에 칼이 들어와도 꿈쩍 안 해. 근데, 넌 날 쫄게 해. 니가 눈앞에 보이면 긴장해. 그래서 병신 같아서 짜증 나. 짜증 나는데, 자꾸 기다려. 응! 알아라 좀, 염미정! 너 자신을 알라고." - <나의 해방일지> 7회 구씨의 대사

드디어 구씨의 대사가 길어졌다. 미소도 깊어졌다. 그 사람이 어떤 사람인지 전혀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조건 응원할 수 있는 관계라는 것이 가능할까, 싶을 때쯤, 이 가상의 세계에선 '한번 해보지 그래' 하며 유혹을 건넨다. JTBC 드라마 <나의 해방일지> 이야기다. 해방. 참으로 생소한 단어 아닌가? 8.15 민족 해방의 그날 이후로, 어떤 공식 석상에서도 논의된 적 없던 의제가, 떠억 하니 주말 드라마의 제목으로 등장했다. 그리고, 이 서울 주변의 어떤 세계를 그린 드라마에는 '추앙'이라는 또 다른 생소한 단어가 등장한다.

추앙 높이 받들어 우러러봄 - 네이버 국어사전

"할 일 줘요? 날 추앙해요. 난 한 번도 채워진 적이 없어. 그러니 날 추앙해요. 가득 채워지게. 난 한 번은 채워지고 싶어. 사랑으론 안돼. 추앙해요." - <나의 해방일지> 3회 염미정의 대사

얼마 전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를 현실에서는 존재할 수 없는 판타지로 즐겼다. 서로가 서로에게 응원을 주는 '사랑'이 그렸던 섬세한 떨림은, 그들이 현실로 내려오는 순간 모든 것이 망가져버렸다. 응원은 욕망에 먹혔고, 사랑은 더 이상 서로를 좋은 곳으로 이끌지 않았다. 사랑이란 것이 그저 상대에 대한 로맨틱한 기대에만 머무는 것이 아니라, 서로를 더 강하게 하여 더 좋은 사람으로 이끌 것이라는 기대는, <나의 해방일지>에선 '추앙'이라는 언어계의 강력한 빌런을 등장시켰다. 사랑을 넘어서는 무조건적인 '추앙'은 드라마에 대한 기대를 한껏 끌어올린다. 

<나의 해방일지>가 그리는 세상
 
 JTBC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JTBC <나의 해방일지>의 한 장면. ⓒ JTBC

 
<나의 해방일지>가 그리는 세계는 또 다른 형태의 판타지이다. 서울 밖의 경기도 어딘가엔 아직 시야에 아파트가 눈에 걸리지 않는 초록의 평원이 펼쳐져 있고, 카메라가 비추는 모두는 어느 하나 빠짐없이 소중하고 따뜻하다. 2022년을 배경으로 하는 한국의 드라마에서는 상상할 수 없는 '판타지'의 대상이다. 모두가 단단하게 자신 몫의 이야기를 하는 세상에서, 자신의 삶을 당당하게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라는 것만으로도 희망이 된다.

박해영 작가의 전작 <나의 아저씨>는 우리에게 '후계동 사람들'이라는 완벽한 상상을 통해, 제대로 어른이 되어 살아간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를 보여주었던 바 있다. 그의 시선은 이제 서울 변두리의 산포라는 도시로 옮겨졌고, 산포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묵묵하나' 끈질긴 서로에 대한 시선은 사랑을 넘어선 추앙이 되어 돌아왔다. 게다가, 추앙의 상대가 이들에겐 완벽한 이방인이었던 구씨라는 것도, 의미심장하다.

손석구 배우가 연기하는 구씨는 의외의 인물이다. 어느 날 갑자기 공동체에 들어온 완전한 이방인이었고, 마을에 들어온 첫 겨우내 술만 마셔서 집주인이 시체 치우는 것이 아닌지 걱정하게 했던 사람이다. 이름도 모르고 하루에 한 마디도 제대로 안 하는데, 하루 종일 멀리로 보이는 산을 바라보며 70억 개의 일 원짜리를 생각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우리는 이런 사람에게 쉽사리 자리를 내어주지 않는다. 그들은 두려움의 대상일 뿐이며 가능하면 멀리하고 싶어 하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데, 염미정은 용감하게도 구씨를 선택했다.

여기서 또 의외의 인물은 천호진 배우가 연기한 삼 남매의 아버지인 염제호다. 산포싱크의 사장이자 뜨거운 여름에도 밭의 작물을 기어코 보살피는 농부인 그는, 낯선 구씨에게 일을 맡겼고 묵묵하게 일을 해내는 그에게 믿음과 보살핌을 주었다. 산포의 낯선 이방인이었던 구씨는, 두 번의 계절을 지내는 동안 염씨의 가족들과 식탁을 함께 나누는 '식구'가 되었고 막내인 미정에겐 추앙의 상대가 되었다.

상대에 대해 아무것도 알지 못하면서도 '생각만으로도 좋은' 사람이 된다는 것이 가능한지, 여전히 불안한 것은 내 편견 때문이겠지만, 진신으로 그런 관계가 가능할 수 있기를 기대한다. 사람을 있는 그대로 사랑할 수 있겠다는 염미정을 응원하고, 그런 동생을 부러운 듯 바라보는 염기정을 응원한다. 
'(사랑은) 자신이나 상대의 영적인 고취와 성장을 목적으로 스스로를 좀 더 나은 상태로 나아가게 하는 의지이다. (the will to extend one's self for the purpose of nurturing one's own or another's spiritual growth.)' - p.4 <사랑에 대한 모든 것, all about love> 중

'당신은 나를 더 나은 사람이 되고 싶게 하오. (You make me wanna be a better man.)' -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1997) 중 잭 니콜슨이 헬렌 헌트에게

요즘 동네 책방의 영어책 읽기 모임에서, 벨 훅스의 <사랑에 대한 모든 것, all about love>를 읽는 중에도 비슷한 이야기가 등장한다. 서로에게 응원이 되어 서로를 더 좋은 사람으로 만들어 나가는 사랑에 대한 이야기는 1997년의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다>에서도 인상적으로 등장한 바 있다. 나는 사랑의 힘을 믿고, 염미정이 갈구하는 사랑의 채워짐을 믿는다.

자, 이제 그들의 추앙은 이렇게 깊어지고 있다. 현실의 어떤 고난이 이들의 단단한 세계를 망가뜨릴 것인지 두렵기는 하지만, 진지하게 그들을 응원하고 싶다. 염미정은 구씨에게 자신을 추앙하라 했지만, 작가의 그 대사는 주문이 되어, 나에게 그들의 세상을 추앙하도록 만들어 버린 모양이다. 그들의 세계가 기대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따스한 시선이, 지금의 나에게도 그대로 이어지길 기대하면서 말이다.

다시 처음의 대사로 돌아가자. 2500년 전 소크라테스의 '너 자신을 알라'는 구씨의 입을 빌려 추앙의 주문으로 등장했지만, 내게도 분명한 응원을 전했다. 팍팍한 현실에서도, 우리 모두가 얼마나 소중한 사람인지 제대로 알아채는 매일이, 우리를 더 강하게 만들어 줄 것을 믿고 싶으니까.  
덧붙이는 글 기자의 개인 블로그에도 실릴 예정입니다.
나의 해방일지 사랑의 힘 추앙 너 자신을 알라 박해영의 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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