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윤석열 대통령은 군사동맹의 전 단계인 한일군사협력을 진행하고 있다. 하필이면 독도 인근에서 한미일 연합군사훈련까지 벌였다. 대통령실은 "한미일 3자 안보협력으로 국민을 지키겠다"는 입장을 내놓았다.

한일동맹을 지지한 1971년 당시의 박정희 정부만큼은 아닐지라도, 윤석열 정부 역시 한일 군사협력에 애착을 보이고 있다. 박정희는 한일동맹을 공개적으로 언급했을 뿐 현실화시키지는 못한 데 반해, 윤석열은 군사동맹보다 낮은 단계이기는 하지만 한일 군사협력을 구체화시키고 있다.

군사협력 힘 실으며 야당과 마찰 빚는 윤 정부

그런데 윤석열 정부가 그보다 더 시급히 실현시켜야 할 것은 더불어민주당과의 협력 체제다. 여소야대 국면이 정권과 대통령의 행동반경을 축소시킨다는 점은 굳이 언급할 필요도 없다. 노태우 정권이나 김대중 정권처럼 여소야대를 인위적으로 재편하지는 않더라도, 야당과의 협력체제를 구축해 여소야대로 인한 불리함을 최소화시킬 필요성이 있는 것은 자명하다. 그런데도 윤석열 정부는 민주당과의 협력보다 일본과의 협력체제에 공을 들이는 모양새다. 그것도, 경제적 협력이 아닌 군사적 협력을 전개하고 있다. 

과거 1971년 1월 11일 신년기자회견에서 박정희는 상당히 도발적인 발언을 내놨다. 안보 분야에 관련된 미국의 역할을 일본에 맡길 수 있다는 발언이었다. 한국과 군사동맹을 맺은 미국의 역할을 일본에 맡길 수 있다고 했으니, 그가 군사협력을 넘어선 군사동맹까지 생각했음을 알 수 있다.
 
1971년 1월 11일자 <경향신문> 1면 '주월국군 단계적 감축 검토 朴(박)대통령 연두회견'기사. (출처: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1971년 1월 11일자 <경향신문> 1면 "주월국군 단계적 감축 검토 朴(박)대통령 연두회견"기사. (출처: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 네이버뉴스라이브러리

관련사진보기

 
이에 관한 박정희의 언급은, 아시아 문제에 가급적 개입하지 않겠다는 미국의 닉슨 독트린으로 인해 힘의 공백이 생길 것이라고 지적하는 대목에서 나왔다. 그의 발언은 이렇다.

"이 힘의 공백을 메우기 위해서 미국 대신에 일본을 반공의 대역으로 내세우자 하는 논의도 나오고 있는 것 같은데, 일본을 반공 대역으로 내세우자는 그 구체적인 내용이 무엇인지 우리는 아직 자세히 모르지만, 만약에 일본의 이러한 역할이 아시아 지역에 있어서의 집단 안보의 일환으로서 제기되는 문제라 할 것 같으면 우리로서는 굳이 반대할 이유는 없다고 봅니다."

일본 대역론을 자세히 모른다고 하면서도 아시아 안보를 위해 반대할 이유가 없다고 발언했다. 다음날 신민당 대통령 후보 김대중은 '일본 대역론이 한국의 독립을 해칠 것'이라고 경고했다.

김대중은 4월 15일 원주공설운동장 유세에서는 "일본이 미국에 대신해서 아시아의 맹주가 되고 한일군사동맹을 맺고 일본군이 미국 대신 이 땅에 주둔하는 것을 허용하려는 박 후보야말로 이 나라를 다시 일본에 예속시키려는 사대주의의 표본이 아니고 무엇이냐"고 비판했다. 일본 대역론이 한일군사동맹으로 이어진 이후의 결과를 경고한 것이다. 이런 반응들이 나올 것을 감안해 톤을 낮추기는 했지만, 박정희의 신년회견은 한일동맹에 대한 의지를 드러낸 입장 표명이었다고 할 수 있다.

박정희와 일본의 인연 

그로부터 6년 전인 1965년, 박정희는 굴욕적인 한일협정(기본조약+부속협정)을 체결한 일로 인해 거국적인 저항 투쟁에 직면했다. 처음에는 남로당 경력 때문에 그와 공산주의의 관계를 의심했던 일부 국민들은 한일협정 체결을 계기로 그와 일본의 관계를 의심하게 됐다.

박정희는 집권기간 동안에 한일정상회담을 한 번도 갖지 못했다. 대통령 자격으로 일본을 방문한 적도 없었다. 1969년 11월 20일 <동아일보> 1면 좌상단 기사는 그가 일본 정부의 초청을 받고도 "여러 가지 사정으로" 갈 수 없게 된 일을 보도했다.

일본과의 관계를 의심하는 국민적 시선 때문에도, 그해 9월에 장기집권을 위한 3선 개헌을 관철시켜 국민 여론을 악화시킨 것 때문에도 박정희는 일본 방문을 추진하기 힘들었다. 그런 박정희가 1971년 새해 벽두에 한일동맹론을 제시했다. 일본과의 협력에 대한 그의 애착이 어느 정도였는지 절감할 수 있다.

일본이 미국의 역할을 대행하는 문제와 관련해, 미국은 찬성하고 일본은 소극적 입장을 보였다. 이 같은 양국의 입장이 내포하는 함의가 있었는데도 박 정권은 이를 충분히 고려하지 않고 일본 대역론을 섣불리 지지한 측면이 있다.

정세분석 기사인 1970년 10월 27일 <동아일보> '아시아의 새 판국' 등에 보도된 바와 같이 "극동 지역에 있어 미국의 역할을 일본으로 하여금 대역시킨다는 점"은 미국이 바라는 바였다. 그해 7월 11일자 <경향신문> 1면 하단 기사의 제목이 '사또 일(日) 수상 언명, 미군 대역 못 맡아'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일본 정부는 대역론에 대해 소극적 입장을 표명하고 있었다.

일본에서는 총리가 사망하면 정부·자민당 합동장을 치르는 게 관행이었다, 이럴 때에 예외적 사례로 거론돼온 것이 1967년 요시다 시게루 국장과 1975년 사토 에이사쿠 국민장이다.

위 <경향신문> 기사에 언급된 사토 에이사쿠를 위해 일본 정부가 국민장을 치러준 것은 그의 성과 때문이었다. 그는 1879년 이래 일본이 강점하다가 1945년이 미국에 점령한 오키나와(옛 유구왕국)를 일본이 1972년부터 다시 지배하는 데에 기여한 인물이다.

일본은 1870년대에 조선 및 유구왕국과 중국령 대만을 동시에 공략하다가 유구는 1879년에, 대만은 1895년에, 조선은 1910년에 강점했다. 일제 패망 뒤에 오키나와는 해방됐어야 하지만, 미국의 지배를 거쳐 일본의 지배를 다시 받는 처지에 놓이게 됐다.

린든 존슨 행정부(1963~1969)까지의 역대 미국 정부는 '언젠가는 오키나와를 일본에 반환해야 한다'는 막연한 생각을 갖고 있었을 뿐, 당장에 어떻게 하겠다는 식의 구체적 계획은 없었다. 그랬던 오키나와 반환 문제가 리처드 닉슨 행정부(1969~1974)와 사토 내각 때에 급물살을 탔다. 이 과정에서 의미 있는 역할을 한 것이 일본 대역론이다.

미국이 베트남전쟁의 수렁에 빠진 상태에서 백악관에 들어간 닉슨 대통령과 그의 참모 헨리 키신저는 '중국과 소련을 경쟁시켜 미국이 균형자 위상을 갖는다' '일본 등의 역할을 증대시켜 미국의 부담을 줄인다' 등의 방법으로 미국 주도의 세계평화를 달성하려 했다. 일본 대역론은 이런 필요성에 부합하는 것이었다.
 
헨리 키신저(자료사진).
 헨리 키신저(자료사진).
ⓒ 위키백과

관련사진보기

 
일본 입장에서 보면, 그 같은 대역론은 경제적 부담을 유발하는 단점이 있는 동시에 일본의 국제적 위상을 증대시키는 장점이 있었다. 1970년 전후의 일본은 대역론이 초래할 단점을 크게 부각시켰다. 사토 총리가 대역을 못 맡겠다고 천명한 것도 그것의 일환이었다.

하지만 당시의 한국 언론보도들에서 일본 군사대국화에 대한 우려가 나왔던 데서도 알 수 있듯이, 이 시기의 일본은 자국의 국제적 위상을 높이는 데에 관심을 갖고 있었다. 1960년대 후반의 일본은 경제력을 발판으로 동남아 등지에 영향력을 팽창하고 있었다.

이를 두고 1970년 7월 24일자 <동아일보> '미 대역의 전기(轉機), 일본 반향'은 "닉슨 독트린 적용에 의한 미국의 대역이라는 새로운 역할을 떠맡기 시작한 것"이라며 일본의 행동을 분석했다. 사토 총리는 '대역 못 맡아'라고 천명했지만, 제3자들이 볼 때는 일본이 그쪽으로 다가가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면서도 일본은 공식적으로는 관심 없는 듯이 행동했다. 일본이 역할을 맡아주기를 희망한다는 의사를 미국이 내비치는데도 일본은 무관심한 듯이 행동했다. 줄다리기라면 줄다리기일 수 있는 이런 상황이 오키나와 반환에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는, 헨리 키신저 회고록 제18화를 연재한 1979년 10월 24일자 <경향신문> 3면 기사에서 느낄 수 있다.

회고록 제18화에 담긴 키신저의 생각을 읽어보면, 일본 대역론과 오키나와 반환협상이 대가 관계를 이뤘음을 느낄 수 있다. 그는 닉슨 행정부가 오키나와 반환을 결정한 과정을 설명하는 대목에서 "우리는 일본이 아시아에서 보다 큰 정치적 역할을 수행하도록 격려하기로 했다"라며 "우리는 또한 일본이 자체의 방위력을 점진적으로 증강토록 격려하기로 했다"라고 회고했다.

미국은 오키나와를 반환하는 대신 일본에 부담을 지우기로 했다. 그것이 일본 대역론이다. 사토 내각이 대역을 맡을 뜻이 없는 듯이 한 것은 미국의 애를 태우기 위한 측면도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미국과 일본은 1971년 6월 17일 오키나와 반환협정을 체결했다. 이 협정은 이듬해에 이행됐다. 박정희는 협정 체결 5개월 전인 1971년 1월 11일 신년기자회견에서 일본 대역론을 언급했다. 그는 구체적으로 모른다면서도 대역론에 대한 지지 입장을 표명했다.

박정희 한일동맹 지지의 나비효과... 김대중 "자주독립 손상, 과오일 것"

결과적으로 보면, 박정희의 한일동맹 지지는 일본의 오키나와 재점령을 돕는 역할을 한 측면이 있다. 본의든 아니든, 일본의 위상을 높여줘 일본이 반환협정에서 유리한 위치를 점하도록 하는 데 기여한 측면이 있다. 오키나와인들은 물론이고 한국에도 실질적 이익을 주지 못한 채 일본의 전락적 이익을 돕는 데 그친 것이 박정희의 한일동맹론이었다고 평가할 수 있다.

1971년 대선에 신민당 후보로 출마한 김대중은 일본 대역론 및 한일동맹은 한국의 독립을 해칠 뿐 아니라 아시아 각국으로부터 욕 먹을 일이라고 비판했다. 1971년 1월 12일자 <동아일본> 1면 우단은 김대중의 비판성명 요지를 이렇게 소개한다.

"이는 가뜩이나 일본에 대한 예속화 경향이 보이고 있는 오늘의 우리 현실 아래 국가의 자주독립을 크게 손상하게 되는 과오일뿐 아니라 중공과 북괴의 연대를 더욱 강화시키고 여타의 아시아 제국(諸國)으로부터는 심한 빈축을 면치 못하게 될 것이다."

태그:#한미일 군사둥맹, #한미일 군사협력, #한미일 연합군사훈련, #오키나와 반환, #닉슨 독트린
댓글2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