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12.21 10:05최종 업데이트 23.12.21 1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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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남학생인권조례 폐지안 처리가 예정됐던 지난 15일 충남도의회 제348회 정례회 제4차 본회의에 앞서 더불어민주당 도의원들이 '역사 앞에 부끄러울 학생인권조례 폐지 반대'라는 손팻말을 들고 서 있다. ⓒ 연합뉴스

 
학생인권조례가 제정 10여 년 만에 존폐기로에 놓였다. 충남에서는 전국 최초로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됐다. 서울에서도 당초 시의회가 폐지안을 상정·심의하기로 했다가, 18일 법원의 가처분 신청 인용으로 상정이 무산됐다.

지난 7월 서울 서이초 교사 사망사건 등으로 교권 침해 논란이 뜨거웠던 가운데, 교육 당국과 일각에서 꾸준히 원인으로 거론된 것이 학생인권조례였다. "학생인권조례 제정 이후 학생의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교사들의 교권은 급격히 추락했으며 공교육이 붕괴되고 있다"(이주호 사회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라는 지적이었다.

학생인권조례가 생겨난 이유

존폐를 논하기에 앞서 학생인권조례가 생겨난 연원부터 살펴볼 필요가 있다. 학생인권조례는 2010년 경기도에서 처음 제정됐다. 이후 광주, 서울, 전북, 충남, 인천, 제주 등 7개 시도에서 제정·시행했다.


시도별로 다소간의 차이는 있지만 학생 인권은 인간으로서 존엄성을 유지하기 위해 반드시 보장돼야 하며, 교육활동에서 우선 보장돼야 한다는 내용은 대동소이하다. 차별받지 않을 권리, 체벌 등 폭력으로부터 자유로울 권리, 학습권, 휴식권, 사생활의 자유 등도 함께 포괄한다. 조례가 제정될 당시에는 두발이나 복장에 대한 규제, 가혹하다 싶을 만큼 문제적인 체벌 이슈가 터져 나왔다.

학생인권조례에서 보장하는 학생들의 인권이란, 사실은 헌법에서 보장하는 기본권과 크게 다르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학생인권조례를 따로 제정한 것은 학생이라는 이름으로 기본권을 쉬이 보장받지 못하던 당시의 사회적 배경이 존재한다. 학교를 이루는 주요 주체 중 하나면서도, 어른들에 의해 계도되고 훈육되어야 할 대상으로만 여겨졌던 학생이라는 구성원의 주체성을 강화할 필요 때문이었다.

교권과 학생 인권은 '제로섬 게임'이 아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과 최교진 세종시교육감이 지난 19일 오전 서울시 종로구 서울시교육청에서 서울시의회의 학생인권조례 폐지 논의 중단을 촉구하고 있다. 조희연 서울시교육감, 도성훈 인천시교육감, 이정선 광주시교육감, 천창수 울산시교육감, 최교진 세종시교육감, 김지철 충청남도교육감, 박종훈 경상남도 교육감, 김광수 제주시교육감 등 8명의 교육감은 이날 입장문에서 서울시의회가 서울 학생인권조례 폐지를 시도하는 것과 관련해 "시대착오적이며 차별적인 폐지를 중단하라"고 주장했다 ⓒ 연합뉴스

 
이 부총리의 말처럼 학생인권조례 제정으로 학생 인권이 지나치게 강조되면서 교권은 추락한 것일까. 학생 인권과 교권은 어느 하나가 신장되면 나머지 하나는 추락할 수밖에 없는 '제로섬 게임'인가. 교권에 관해서는 여러 정의가 분분하지만 최근 들어서는 대체로 교사들의 교육권, 노동권으로 축약된다.

헌법에 보장된 기본권도 그렇지만, 모든 기본권은 당연히 '타인의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다. 학생 인권이 교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반대로 교사의 교권도 학생 인권을 침해하지 않는 선에서 행사되어야 하는 건 당연한 법리다. 일각에서 말하는 '학생인권조례 때문에 수업 중 잠자는 학생을 깨우는 것이 곤란하다', '수업 시간에 휴대폰을 사용하는 학생을 제재할 수 없다'는 주장 등은 학생인권조례를 잘못 적용했을 때 일어나는 부작용에 가깝다.

수업 중 잠자는 학생의 존재는 다른 학생들의 면학 분위기를 흐리는 한편으로 교사의 교육권을 침해한다. 수업 중 교과 내용과 무관하게 휴대폰을 사용하는 학생도 마찬가지다. 학생인권조례를 악용하는 일부 시도나 사례를 두고, 조례 자체가 잘못됐다고 말하는 것은 제도에 대한 이해가 부족한 처사다.

학생 인권을 축소하려는 움직임들
 

이주호 부총리 겸 교육부 장관(왼쪽)과 김용서 교사노조연맹 위원장이 지난 7월 24일 오후 서울 영등포구 한국노총빌딩에서 열린 교육부-교사노동조합연맹 교사 교육활동 보호를 위한 간담회에서 대화하고 있다. 이 장관은 이 자리에서 "시도교육청과 협의해 교권을 침해하는 불합리한 학생인권조례 개정도 병행 추진해 지나친 학생인권 중심의 기울어진 교육환경을 균형있게 만들겠다"라고 밝혔다. ⓒ 연합뉴스

 
학생인권조례를 폐지하려는 움직임에서는, '교권 침해'를 빌미로 학생인권을 축소하려는 의도가 엿보인다. 줄곧 학생인권조례 개정 의사를 밝혀온 교육부는 지난달 '학생 구성원의 권리와 책임에 관한 조례 예시안'을 내놨다. 조례 예시안에서 학생 인권에 관한 항목은 대폭 축소됐다. 사생활의 자유, 차별받지 않을 권리, 휴식권에 관한 내용이 모두 빠졌다. 교육 현장을 이루는 주체가 아닌, 교육을 받는 객체로서의 입장만 강화되었다.

충남에서도 학생인권조례가 폐지되며 비슷한 수순을 겪고 있다. 폐지안을 대표 발의했던 국민의힘 박정식 의원은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 임신 또는 출산 등 이유로 차별받지 않아야 한다는 차별금지 조항은 어린아이들에게는 부적절한 내용"이라고 말했다.

성별 정체성이나 성적 지향, 임신 또는 출산 등의 이유로 차별받지 말아야 한다는 것은 남녀노소 할 것 없이 적용되는 '보편적 기본권'이다. '어린아이들에게 부적절한 내용'이라는 것은 그 자체로 교육 현장에서는 배제되어야 할, 비교육적 내용이라는 것을 함의하고 있다. 학생이라는 이유로 보편적 기본권이 지켜지지 못하는 학교야말로 비교육적 공간이 아닌지 따져 묻고 싶다.

"왜 학생들의 의견을 듣지 않느냐"
 

지난 2월 10일 오후 2시, 서울학생인권조례 지키기 공동대책위(공대위) 소속 청소년들이 서울시교육청 앞에서 기자회견을 열고 “시의회는 학생인권조례 폐지, 우리에게 물어는 봤느냐”고 외쳤다. ⓒ 윤근혁

 
학생인권조례 폐지 국면에서 가장 와닿았던 목소리 하나. "학생들을 위해 만들어진 조례인데 폐지안을 다루면서 왜 학생들의 의견을 단 한 번도 듣지 않느냐"던 김태영 충남학생인권의회 의장(서산 중앙고 1)의 발언이었다. (관련 기사: '왜 학생 의견도 안 듣고 학생인권조례 폐지하려 하나', https://omn.kr/26r3y) 그는 어른들의 의회에서, 자신들의 목소리는 전혀 반영되지 않은 채로 조례안이 사라질까 걱정했다. 그러나 바로 다음 날인 15일, 충남도의회는 폐지안을 재석의원 44명 중 찬성 31명, 반대 13명으로 의결했다.

학생인권조례의 순기능 중 하나는 학생인권 정책을 자문하거나 심의하는 위원회를 만들고, 학생들이 직접 참여하는 인권 기구, 진정을 접수하고 구제하는 학생인권옹호관 등을 둔 것이었다. 제도적으로 '학생인권'의 의미를 계속해서 되짚어가는 과정에 당사자인 학생을 참여시켰다. 이를 통해 학교의 구성원으로서, 학생들의 주체성과 자율성이 보장됐다. 김태영 의장이 속한 '충남학생인권의회'도 학생인권 조례에 근거한 청소년 자치활동기구다.

'학생인권조례 존폐'라는 중차대한 사안을 다루는 데 있어, 정작 당사자인 학생들의 목소리가 보이지 않는다. 충남도의회는 3년 간 학생들에 영향을 미치던 조례를 없애면서, 충남학생인권의회의 얘기를 경청했는가. 학생인권조례는 의회와 사법부의 영역이기에 앞서, 학생들의 영역이자 학교의 영역이어야 한다. 존폐를 논하겠다는 각 시도의 의회들은 학교의 목소리를 듣는 작업부터 선행했는지, 학생 없는 학생인권조례 폐지는 아닌지 자문해 볼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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