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큐멘터리 <3인 3색 : 건축계의 여성들> 스틸컷

다큐멘터리 <3인 3색 : 건축계의 여성들> 스틸컷 ⓒ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주의!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돼 있습니다.

01.
여기 세 건축가가 있다. 베를린의 요한나 마이어 그로브뤼게, 멕시코시티의 가브리엘라 카리요, 그리고 뉴욕의 모리 토시코다. 세 사람은 지금 건축가로 활동하고 있다는 사실 외에 하나의 다른 공통점을 갖고 있다. 여성. 이들은 자매이자 아내, 누군가의 엄마이자 할머니로 살아왔고 또 살아가고 있다. 색다른 곳에 가면 자연스럽게 여성의 역할을 주목하게 된다는 이들은 역사적으로 남성의 직업으로 여겨져 온 건축가의 길을 걸으며 지금까지 많은 어려움을 겪어왔다. 그리고 좋은 건축가가 더 많아지기 위해서는 현재의 유연하지 못한 사회적 시스템에 변화가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보리스 누아르 감독의 다큐멘터리 < 3인 3색 : 건축계의 여성들 >은 앞서 이야기한 세 건축가의 모습과 목소리를 담아낸 작품이다. 이들 모두는 현재 각자의 자리에서 스스로의 영역을 온전히 구축하고 있지만, 그 과정에서 힘으로 결정된 사회 구조의 부조리한 면을 온몸으로 지나왔다. 지금 목소리를 높이고자 하는 이유는 지난 세월에 대한 보상을 원해서가 아니다. 이제 걸음을 시작하는 새로운 세대가 자신들과는 다른 환경에서 조금 더 나은 세상을 경험하기를 원할 뿐이다. 그 과정에서 드러나는 이들이 살아온 시간의 모습과 이 시대에 필요한 건축의 요소에 대한 견해는 이 작품이 말하고자 하는 또 하나의 모습이다.

이 다큐멘터리에서 한 가지 흥미로운 지점은 극의 중심에 서 있는 세 인물의 대화가 때때로 정확히 구분되어 있지 않다는 부분이다. 의도적인 연출로 여겨지는 이 편집은 각자의 이야기가 마치 하나의 문장을 정확히 완성해 내는 듯이 이어지곤 한다. 이는 서로가 다른 문화와 대륙에 살고 있고, 심지어는 약간의 시간적 배경에 차이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 경험이 유사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영리한 접근법처럼 여겨진다.

02.
처음 이들이 건축계에 종사하고자 했을 때, 여성이라는 사실이 문제가 된다는 사실에 대해서는 아무도 이야기하지 않았다고 한다. 물론 현실은 달랐다. 당시 건축계의 남성들에게는 특정한 이미지가 있었고, 사람들은 그들이 무엇을 보여주었는가 하는 문제보다는 그들이 남자라는 사실 하나로 신뢰를 하곤 했다. 역사적으로 볼 때도, 스스로가 직접 겪은 바에 의해서도 이 직업에 종사하는 여성의 이미지를 떠올리기란 쉽지 않았다. 배울 기회도 적었을뿐더러 여성이 하기에 어려운 일이라는 인식이 팽배했다.

실제로 건축가 모리 토시코는 자신이 처음 일을 시작했던 1970년대 후반의 분위기를 떠올리면 최악의 건축 현장을 경험했다는 사실을 느낀다. 우연히 맨해튼 고층 건물 프로젝트에 배정되었을 당시의 일이다. 사람들은 모두 여자가 일하기 힘든 환경이라고 말했다. 매일 안전모를 쓰고 높은 곳을 올라야 했고 정말 사고가 생길 수도 있는 환경이기에 두려움을 느끼기도 했지만, 젊었기 때문에 원래 일터는 전부 그런 줄 알았다고 한다. 하지만 그렇지 않았다. 그건 이제 막 업계에 들어온 젊은 여성을 향한 배척과 조롱의 시선에 가까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들은 우리 모두에게 죄가 있다고 말한다. 남성적인 이미지가 힘, 성공과 같은 현실적인 부분과 연결되어 있다는 사실 때문에 그들 역시 그런 이미지를 갖기 위해 노력했기 때문이다. 사회는 다양해야 하고 열린 사고를 인정해 주는 것이 옳지만, 그들 자신은 평생을 힘으로 결정된 사회 구조 속에서만 살아왔기 때문에 어쩔 수 없는 일이었는지도 모른다. 어떤 이유에서건 다른 요인을 탓하는 것이 아니라 자신의 행동을 먼저 돌아보는 모습에서 이들의 진심을 느낄 수 있게 된다.

03.
"제가 하는 모든 일을 저 혼자선 할 수 없어요."

여성이라면 누구나 쉽게 자유로울 수 없는 임신과 출산의 문제 역시 이들이 한 분야에서 제대로 성장하는 데 어려움이 되었다. 이전처럼 자신의 영역에서 마찬가지의 일을 하기를 원하지만 지금 우리가 사는 자본주의 세상은 근무 시간과 장소가 정해져 있고 유연하지 못하기 때문에 여성들은 언제나 직업과 육아 사이에서 둘 중 하나만 선택하길 강요당하고 있다고 이들은 말한다. 자신감과 결단력을 갖고 시간을 잘 써보고자 매일 고군분투하지만 배려가 부족한 현재의 시스템 하에서는 어려움이 크다.

이 문제는 아이들을 키우는 과정에서도 마찬가지다. 점심시간을 줄여서라도 어떻게든 아이를 데리러 가보지만 다시 직장으로 돌아와야 하는 상황에서 어디로 가야 할지 방법을 찾을 수 없다. 사무실에는 아이가 있을 곳이 없고, 집에 혼자 둘 수도 없는 상황. 유일한 방법은 결국 할머니가 되고, 이는 다시 돌고 돌아 모든 세대의 여성에게 다시 짐을 지우는 행위가 된다. 요한나 마이어 그로브뤼게는 이 문제가 건축이 나아가는 길과 닮아있어야 한다고 말한다.

전통적으로 건축은 경계를 만드는 일이었다. 실내는 집으로 만들고, 밖에는 경계를 만드는 식이다. 다시 집 안에서도 특정 공간은 또 다른 특정 활동을 위해 할애된다. 다른 활동과 경계를 만드는 일이다. 하지만 현대의 좋은 건축이란 이 경계를 허무는 일에 가깝다는 것이 그녀의 생각이다. 경계를 만드는 일보다 이 경계를 허물어내면서 여러 가지의 관계를 강화하고 촉진하는 것이다. 이 사회 역시 현재의 딱딱하고 일방적인 구조에서 벗어나 경계를 허물고 서로의 의사소통이 원활하게 이루어질 때 더 나은 사회가 될 것이라 믿는다.

04.
사회의 많은 부분이 지금까지 약탈적이고 배타적이며 차별적이었다고 이 세 사람은 말한다. 건축이 그러했듯이, 이 문제는 과학계에서도 그렇고, 공학계와 사업계에도 마찬가지다. 건강한 호기심만으로 이 사회가 유지되고 발전될 수 있다면 우리는 끝없이 사람과 공간, 또 사회와 소통할 수 있게 될 것이다. 더 중요한 일은 그렇게 쌓은 지식과 경험을 다음 세대에 전파할 수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2023년 하버드 대학 입학생의 70%가 여성이라고 한다. 이제 한 세대를 뛰어넘어 젊은 여성들이 건축을 진지하게 직업으로 생각하고 이 업계에서 나아가고자 한다는 것이다. 이제 사회는 이들이 경력을 쌓아오는 동안의 시간과는 전혀 다른 시대를 맞이하게 될 것이며, 우리 모두는 변화의 앞에 서서 두려워하지 않는 태도로 이전의 사회가 정해놓은 삶의 방식을 신경 쓰지 않고 나아가는 일이 중요하다고 이 작품은 말한다. 다큐멘터리 속에 놓여 있는 세 사람의 이야기가 일면 너무 일방적이거나 중립적이지 못하다고 느끼는 이들도 분명 있을 것이다. 다만 이들이 남성 중심의 업계와 시대를 지나는 동안 느끼고 경험했을 시간들에 대한 이해는 필요하다고 생각한다.

이들 역시 남성과 여성이 신체적인 면을 포함해 다양한 측면에서 다르다는 점을 인정하고 있다. 지금은 사람을 카테고리화하는 문제에 대해 이야기하는 일이 어렵고 문제가 되지만, 오랜 세월의 협의를 거쳐 이 단계를 넘어서는 순간 서로의 차이를 편하게 이야기하고 칭찬할 수 있게 되는 날도 오리라 믿는 이유다. 그러니까 이 작품은 그 과정을 최대한 잘 지나고자 하는 바람을 담은, 그들의 공통된 목소리를 사회에 들려주기 위한 또 하나의 시도에 가깝다.
덧붙이는 글 이 작품은 제15회 서울국제건축영화제 온라인 상영작에도 포함되어 있습니다. 온라인 상영작은 오는 9월 17일(일)까지 네이버TV에서 무료로 관람하실 수 있습니다.
다큐멘터리 서울국제건축영화제 SIAFF 3인3색 건축계의여성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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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가 숫자로 평가받지 않기를 바라며 글을 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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