싫어하는 태도가 있다. 누군가 제가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대면할 때 흔히 발견되는 태도다.
 
낯선 것을 마주하여 그것을 이해하지 못한 이가 보이는 태도는 크게 둘로 나뉜다. 하나는 제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음을 인정하고 제 인식의 틀, 수용의 크기를 돌아보는 것이다. 그리고 다른 하나는 제 이해의 폭은 고려하지 않은 채로 이해되지 않는 것에 모든 책임을 돌리는 태도다. 물론 후자가 압도적으로 많다.
 
이해는 내가 주체가 되는 일이다. 외부의 사물이나 개념, 사건을 마주하여 나의 의식 아래 분별하여 받아들이는 것이다. 사물과 개념, 사건은 모두에게 같은데, 각자가 포용할 수 있는 크기는 천차만별이게 마련. 누구는 이해하는 일을 다른 누구는 이해하지 못하는 데는 이러한 연유가 자리한다.
 
그러나 사람들은 좀처럼 저를 돌아보지 않는다. 저는 고정된 무엇으로 놓아둔 채 제가 이해할 수 없는 것과 그를 이해한 이들을 손가락질 하는 경우를 자주 보게 된다. 저의 부족함이 문제의 원인인데도 남을 탓하는 것, 내가 싫어하는 태도는 바로 이것이다.
 
여행자의 필요 포스터

▲ 여행자의 필요 포스터 ⓒ 전원사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대면했을 때
 
홍상수의 신작 <여행자의 필요>를 보며 이를 떠올렸다. 이해하지 못하는 것과 대면했을 때 쉬이 내가 아닌 남을 탓하려 드는 태도 말이다. 충분한 이해와 판단에의 노력을 들이지 않은 채로 빨리 결정짓고 돌아서는 것, 그로부터 저의 세계를 확고히 유지하려드는 그 늙음과 고집스러움을 나는 생각하였다.
 
영화는 프랑스에서 한국으로 건너와 지내는 이리스(이자벨 위페르 분)의 이야기다. 어디서 어떤 삶을 살아온 건지 알 수 없는 이 여자는 이제 막 한국에서 프랑스어 강사로 일을 시작한 참이다. 이리스는 그렇게 두 여자를 만나 방문강의를 하게 되는데, 영화는 차근히 그녀의 독특한 수업을 뒤따른다.
 
처음 만난 여자(김승윤 분)는 이리스 앞에서 제 아버지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또 피아노를 연주한다. 이리스는 그녀에게 영어로 몇 가지 질문을 하고 그 답을 듣는다. 이리스는 작은 종이 위에 여자가 내놓은 답변을 프랑스어로 옮겨 적고 카세트테이프 녹음 버튼을 누른 뒤 그를 가만히 읽어낸다. 그렇게 녹음된 프랑스어를 여자가 연습해오면 되는 것일까. '피아노를 연주할 때 어떤 감정이 들었어요?' 하고 물어오는 이리스의 거듭된 질문에 변화하는 여자의 답변은 보는 이로 하여금 특별한 감상을 갖도록 한다.
 
여행자의 필요 스틸컷

▲ 여행자의 필요 스틸컷 ⓒ 전원사

 
이리스의 비범한 프랑스어 수업
 
두 번째 강의 또한 독특하게 이뤄진다. 이번엔 수업을 듣는 여자(이혜영 분)의 동료이자 친구처럼 보이는 남자(권해효 분)가 자리를 함께 한다. 이들은 편히 술을 마시고 대화하는데 그저 누구를 초대해 갖는 술자리처럼 보일 만큼 자연스럽다. 술자리가 무르익을 즈음 여자는 기타를 연주하는데, 연주가 끝난 뒤 이리스는 앞의 수업과 마찬가지로 연주할 때의 감정이 어떠했느냐고 묻는다. 처음엔 행복했다던 여자는 거듭된 질문에 제 연주 실력이 마음에 차지 못해 짜증스러운 마음도 들었다고 말하지만 그중 무엇이 진짜 답에 가까운 것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리스는 이번에도 기록할 만한 문장을 종이에 적어서는 프랑스어로 녹음해 건넨다. 이들의 수업이 어떤 성취에 이를지는 모르겠으나 그 교수법이 매우 이색적인 건 분명해 보인다. 술자리를 마치고 이들은 함께 공원을 걷고 청운문학도서관 앞을 산책하며 인근 윤동주 시비 앞에서 시인의 삶이며 외모를 두고 이런저런 대화를 나눈다. 모두가 모두를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는 상황의 어색함이 거듭 두드러지는 가운데 관객은 이 미묘한 상황이 마침내 끝날 즈음에야 평안을 얻는다.
 
이후 이리스는 문 닫힌 도서관 앞에서 제게 관심을 보이는 오지랖 넓은 어느 여자와 대화하고, 그녀의 요청에 따라 윤동주의 시를 프랑스어로 번역해 읽어주고는 제가 사는 집으로 들어선다.
 
여행자의 필요 스틸컷

▲ 여행자의 필요 스틸컷 ⓒ 전원사

 
관객 숨죽이게 하는 모자의 시간
 
그런데 웬걸? 그가 사는 집에는 동거인이 있다. 동거인이라기보다는 집주인, 이리스에게 공짜로 숙박을 제공한 젊은 남자 인국(하성국 분)이다. 나이차가 수십 살은 족히 나 보이지만 인국과 이리스 사이엔 묘한 기류가 흐른다. 성적 접촉이 있는 것은 아니라지만 진한 포옹이며 남다른 대화가 어딘지 미묘하다. 서로를 친구라고 말하지만 그 친구가 영화를 보는 관객들의 흔한 친구사이와는 같지 않으리란 걸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러나 또 한편으론 세상 어느 친구사이가 다른 친구사이와 완전히 같겠는가. 우리는 우리 아닌 다른 누구도, 심지어는 저 자신조차 온전히 이해할 수 없는 것이다.
 
<여행자의 필요>가 가장 재밌어지는 지점이 여기부터다. 둘의 대화가 무르익을 즈음 갑자기 들이닥친 인국의 어머니(조윤희 분), 이리스는 제가 인국의 프랑스어 교사라고 말하고 자리를 뜬다. 그런 줄만 알았던 인국의 어머니지만 집안을 돌아보다 이리스가 이곳에 눌러 살고 있음을, 인국과 그저 평범한 관계가 아님을 알아차린다. 그리고는 여느 어머니가 보일 법한 반응을 보이기 시작한다.
 
'너는 저 여자가 어떤 사람인지 알 수가 없어', '확실히 알아봐야 해', '어떻게 살았는지 이력을 보라는 말이야' 그렇고 그런 말들. 그러나 인국은 이리스가 삶을 대하는 진지하고 성의 있는 자세에 이미 반해버린 터다. 그 태도가, 행동이 이리스가 누구인지를 말해준다고 여긴다. 누가 감히 그것이 틀렸다고 말할 수 있을까.
 
여행자의 필요 스틸컷

▲ 여행자의 필요 스틸컷 ⓒ 전원사

 
우리에겐 여행자의 시선이 필요하다
 
그러나 세상엔 그것이 틀렸다고, 너를 이해할 수 없다고 함부로 말하는 이가 얼마나 많은지. 어린 남자가 수십 살쯤은 많은 여자와 함께 살 때, 그 미묘한 성적 긴장감이 결코 자연스럽지 않은 것이라고, 어려서 어머니와 유대가 긴밀하지 못했던 결핍의 발현이라거나 혹은 그밖에 건강하지 못한 여러 이유가 있을 것이라고 쉽게들 재단하곤 하는 것이다. 제 이해를 넘어서는 일과 마주하여 저의 수용의 폭이, 또 세상을 바라보는 틀이 좁음을 탓하는 게 아니라 문제와 사건과 사물이 잘못된 것이라고 비난하는 짝이 아닌가 말이다.
 
홍상수는 세상 사람들이 궁금해하고 이야기하고 재단하고 씹어대는 저의 연애담을 이리스와 인국의 이야기로써 성별만 바꾸어서 풀어내고 싶었던 걸까. 아니면 그저 우연히 비슷한 이야기를 해본 것뿐일까. 분명한 건 이리스가 젊고 매력적인 인국 또래의 프랑스 여자였다면 굳이 겪지 않았을 법한 일을 겪어내야 했다는 것이다. 누군가에겐 문제되지 않는, 그러나 다른 누군가에겐 지나치다 비난받을 태도들을 마주했다는 말이다.
 
이리스는 어떤 사람인가. 영화 속 그녀를 마주한 모든 사람들 가운데 그녀를 제대로 이해했다고 할 수 있는 이는 과연 누구인가. 국민시인이라는 윤동주도, 그 시를 읽고 시비를 향해 절을 하는 사내도, 그 사내를 오래 알고 지냈다는 여자도, 그 여자의 딸도, 그밖에 모든 사람들이 정말로 다른 누구를 제대로 이해하고 있는 것일까. 혹은 이해를 포기한 채 저의 틀만 굳혀나가고 있는 것일까.
 
어쩌면 중요한 건 열린 마음과 자세, 또 이따금은 낯설게 바라볼 줄 아는 여유일지 모르겠다. 정말로 여행자가 필요한 건 더는 여행하지 않는 이들이니까.
덧붙이는 글 김성호 평론가의 얼룩소(https://alook.so/users/LZt0JM)에도 함께 실립니다. '김성호의 씨네만세'를 검색하면 더 많은 글을 만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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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평론가.기자.글쟁이. 인간은 존엄하고 역사는 진보한다는 믿음을 간직한 사람이고자 합니다. / 인스타 @blly_kim / 기고청탁은 goldstarsky@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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