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6 07:05최종 업데이트 23.06.26 07: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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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의 한 온라인 쇼핑몰에서 판매 중인 티셔츠 "중국제 아님(NOT MADE IN CHINA)" ⓒ 온라인 갈무리


대학교수는 활동량이 가장 적은 직업 중 하나일 것입니다. 앉아서 강의 준비하고, 잠시 서서 강의한 뒤에는 다시 앉아서 채점하고, 학생과 면담하고, 오랜 시간 논문 쓰고, 다시 강의 준비를 해야 하니까요. 테니스와 달리기 등으로 틈틈이 건강관리를 하는 동료 교수들도 있지만, 저는 심각한 허리 통증이 찾아온 뒤에야 쫓기듯 운동을 시작했습니다.  

그렇게 해서 동네 체육관에 나가게 됐는데, 코로나로 시설이 문을 닫는 바람에 한동안 운동을 멈춰야 했습니다. 한국에서는 시설이 폐쇄되는 경우가 많지 않았지만, 제가 사는 미국에서는 극장, 공연장, 체육관 등의 공공시설이 거의 다 문을 닫았습니다. 그러다 다시 운동을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지난 4월, 체육관에서 팔 운동을 하다가 눈이 번쩍 뜨이는 장면을 목격했습니다.  


제 맞은편에 중년으로 보이는 백인 남성이 상체 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검은 티셔츠에 반바지 차림이었는데, 상의에 커다랗게 찍힌 글귀가 한눈에 들어왔습니다. "중국제 아님(NOT MADE IN CHINA)". 글자가 모두 대문자인 데다, 굵은 볼드체로 인쇄돼 마치 주위를 향해 큰 소리로 외치는 듯했습니다.     

이 남성은 제가 앉아 있던 기구(생각해 보니 운동조차 앉아서 하고 있었군요) 정면에 서 있었기에, 일부러 고개를 돌리지 않는 한 그를 바라보지 않을 도리가 없었습니다.

남자는 제가 동양인이라는 사실을 파악하고는, 계면쩍은 표정을 짓더니 슬그머니 자리를 떴습니다. 이곳에서 10년 넘게 살면서 이런 장면을 보는 건 처음이었습니다. 제 눈에 펼쳐진 이질적 풍경은 날로 격화하고 있는 미-중 갈등의 단면을 생생히 보여주고 있었습니다.  

미국 아저씨의 기묘한 일인 시위, '중국제 아님' 

남자가 사라진 후에도 "중국제 아님" 글귀는 오랫동안 머릿속을 맴돌았습니다. 가장 궁금했던 점은 그가 옷 구석에 찍혀 있는 제조국을 확인해 봤는지 여부였습니다. 통계적으로나 미국에서 20년 넘게 산 제 경험으로나, 그 면 셔츠가 중국제일 가능성이 컸기 때문입니다.  

현재 미국에서 팔리는 의류의 40퍼센트 가까이가 중국에서 생산됩니다. 이어 베트남(약 15%)과 방글라데시(약 10%)가 큰 격차로 2, 3위를 차지하고 있고, 인도네시아, 온두라스, 인도, 캄보디아, 파키스탄 등이 한 자릿수 점유율로 뒤를 잇고 있습니다. 하지만 그 셔츠가 중국 아닌 다른 생산지에서 왔다고 해도 크게 달라지는 것은 없습니다. 그가 온몸으로 전하려던 메시지가 이런 것은 아니었을 테니까요. "중국제 아닌 방글라데시제임." 

그렇다고 그 남성이 (이제는 희귀품이 된) 미제 옷을 입었노라고 자랑한 것으로 볼 수도 없습니다. 그랬다면 "당당히 미국에서 생산한 제품(Proudly Made in USA)"이라는 구호가 적혀 있었을 테니까요. 

결국 그가 전하려던 메시지는 '이 몸만은 중국제가 아니다'라는 항의였습니다. 미국인들이 매일 입고 쓰는 생활용품 대다수가 중국제인 현실에서, 중국의 경제적, 기술적 부상에 대한 불안감이 (코로나 이후 폭발적으로 증가한) 인종적 반감의 형태로 드러난 것이지요. 하지만 왜 그 아저씨는 별로 어울리지도 않는 장소에서 소심한 '일인시위'를 벌이고 있던 것일까요?  
 

도시 중심가를 조금만 벗어나면 이처럼 문이 닫힌 공장 건물들을 볼 수 있습니다. 오대호 인근에 줄지어 늘어선 산업도시들에는 한때 풍요를 안겼던 공장 건물과 설비가 녹슨 채 버려져 있는 탓에 '러스트 벨트'라는 이름으로 불립니다. ⓒ 강인규

 
제가 살고 있는 곳은 오대호 인근에 자리한 미 동부의 도시입니다. 과거에는 제조업 번성한 도시로 부와 풍요를 누렸지만, 이제는 "러스트 벨트(Rust Belt)"라 불리게 된 몰락한 제조업 지대에 속해 있습니다. 80년대 들어 미국 전역의 공장들이 본격적으로 해외로 이전하거나 폐업하기 시작했고, 미국에서 생산되던 물건은 처음에는 일본과 한국에서 만들어지다가, 이후 중국, 베트남, 인도 등으로 넘어갔습니다. 미국 제조업체들이 인건비를 삭감해 이윤을 높일 목적으로 생산지를 바꿔온 것이지요. 

앞의 남성은 제조업으로 부흥했다가 몰락한 도시의 변화를 지켜보았을 것이고, 주민 다수가 그랬듯 제조업에 종사하다 직장을 잃은 사람일 수도 있습니다. 저는 그의 좌절과 절망을 이해하고 공감합니다. 하지만 길 잃은 분노는 문제 해결에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습니다. 트럼프나 그 비슷한 지도자들을 낳는 토양에 거름만 제공하고 있을 뿐이지요.  

코로나가 중국에서 시작됐으니 중국인에 분노하는 게 아니냐고 말할 분들이 있을지 모르겠습니다. 만일 코로나가 미국에서 왔다면 미국 혐오, 백인 혐오가 등장했을까요? 2007년 발생한 버지니아 공대 학살사건은 33명의 사망자를 내며, 미국 역대 최악의  교내총기 사건으로 기록되었습니다. 이 사건의 범인인 조승희가 한국에서 태어났다고 해서 한국인에 대한 혐오가 정당화될 수는 없을 것입니다.

코로나 대유행 이후 미국 전역에서 한인을 포함한 아시아인에 대한 살인, 폭행, 모욕 행위가 발생한 것을 보듯, 인종차별은 나라를 가리지 않습니다. 인종주의자들 가운데 국적을 먼저 물은 뒤 분노를 표출하는 이들은 없으니까요. 따라서 "나는 중국인이 아니니, 나는 미워하지 말라"가 아니라, 인종차별과 혐오 자체에 맞서야 한다고 생각합니다. 인종차별을 조장하는 동시에 그것을 피해 갈 수는 없으니까요. 

탈제조업과 '디지털 전환'이 가져온 것 
 

미국 펜실베이니아주 이리에 있는 보스턴 스토어. ⓒ 위키미디어 공용


제가 사는 도시를 걷다 보면, 과거에 이 도시가 얼마나 큰 번영을 누렸는지 알 수 있습니다. 도시 가운데 웅장하고 화려한 극장이 중심축처럼 놓여 있고, 그 옆에는 부티크 상점으로 채워졌던 아르데코 양식의 우아한 건축물이 솟아 있습니다. 워너 극장을 등지고 돌아서면 쇼핑객들로 북적이던 백화점 '보스턴 스토어'의 시계탑이 모습을 드러내고, 그 뒤로 펼쳐진 주택가에는 (이탈리아계 주민이 많은 도시답게) 로마네스크 양식의 저택들이 자태를 뽐냅니다.  

이 때문에 처음 방문한 사람들은 도시에 드리운 짙은 그림자를 잘 보지 못합니다. 무려 23%에 달하는 시민들이 빈곤선 아래 살고 있는데 말이지요. 앞서 말씀드렸듯, 도시를 먹여 살렸던 제조업체들이 인건비가 싼 국가로 생산시설을 이전하거나 전통 제조업에서 손을 떼고 소프트웨어나 서비스에 집중하는 '디지털 전환(digital transformation)'을 추진해 왔기 때문입니다.  
 

도시 한 가운데 자리잡은 워너 극장의 입구 간판. 도시의 화려했던 시절을 보여주는 듯합니다. ⓒ Pat Noble

 
독자 가운데 이렇게 생각하는 분도 있을 것입니다. 제조업체의 해외 이전은 불가피한 선택이고, '굴뚝산업'으로 불리는 촌스러운 제조업에서 벗어나 서비스나 디지털화에 집중하는 게 바람직한 방향 아니냐고 말입니다.

만일 그렇게 생각하는 분이라면, 이 글을 끝까지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저는 기술에 관심이 많아 '디지털 기술의 사회적 형성'이라는 주제로 박사 학위를 받았고, 미국 실리콘 밸리의 첨단기술과 기업문화를 소개하는 글로 꽤 큰 호응도 받았습니다. 대학에서 강의하고 연구하면서 한국의 대표적인 테크기업에 초청받아 프로그래머들을 상대로 강연을 하기도 했고요.  

그로부터 10여 년이 지난 현재, 저는 앞의 이력을 매우 부끄럽게 생각합니다. 사실 '기술 전도사'는 호응을 얻기 쉽고 돈 벌기에도 괜찮은 일입니다. '앞으로 좋은 세상이 열린다'는 전망을 싫어하는 이가 없기에, 첨단기술을 '장밋빛 미래'와 연결 지어 사람들을 설득하기는 어렵지 않지요. 여기에 '미리 준비하지 않으면 재앙이 온다'며 겁까지 주면 효과가 배가 됩니다.

그런 면에서 '기술 전도사'는 '신앙 전도사'와 비슷합니다. (내 책을 읽고 강연을 들은) '준비된 자'는 구원을 받아 부와 행복이 넘치는 세계 속에 살게 되지만, 믿음을 거부한 이들은 비참한 삶이 기다리는 나락으로 떨어진다고 외치기 때문입니다.  

하지만 저는 전망들이 흔히 과장되거나 허술한 토대에 근거해 있을 뿐 아니라, 특정 계급에 대한 이해관계를 숨긴 이데올로기로서 유포된다는 사실을 깨닫게 됐습니다. '곧 자율주행이 나올 텐데 택시 기사 일자리를 왜 보호하냐'는 식의 주장처럼 말이지요. 기술은 혜택과 해악을 동시에 가져오지만, 혜택이라고 해서 모두가 이익을 누리는 것도 아닙니다.  

우리는 기술 수용을 경쟁의 관점에서 바라봅니다. 기술을 빨리 받아들인 사회가 혜택을 '선점'할 것으로 믿는 것이지요. 하지만 기술로 인한 부작용과 불평등을 가장 빨리 맞이하는 사회가 될 수도 있습니다. 제가 살고 있는 미국 도시처럼 말이지요. 이곳은 우버가 사업을 확장한 후, 마지막 택시 회사가 문을 닫았습니다. 저는 한국에서 돌아올 때 뉴욕 공항에 내려 기차를 타는데, 새벽 2시가 넘어야 목적지에 도착합니다.  

기차역에서 저희 집까지는 어중간한 거리입니다. 차로 6~7분이면 도착할 수 있지만, 걸으면 40분이 족히 걸리기 때문이지요. 돈이 안 되는 짧은 거리를 새벽 2시에 운행하려는 우버 기사는 없기 때문에, 저는 매번 걸어 다닙니다. 과거에는 도착 전에 택시 회사에 전화로 예약하고 역 문을 나서면 밖에 택시가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솔직히 이 택시 회사가 '고객 감동'을 안기는 업체는 아니었고, 기사들도 무뚝뚝하거나 불친절한 경우가 많았습니다. 하지만 커다란 여행 짐을 어깨에 멘 채 고행의 길을 걷는 것에 비교할 바는 아니었습니다. 게다가 불평등이 심각할수록 범죄율도 높기 때문에, 제 도시에는 펜실베이니아 주 평균의 1.6배가 넘는 범죄가 발생합니다. 도시를 천천히 걸으며 새벽 공기를 음미하기 좋은 환경은 아니지요.  
 

펜실베이니아의 이리시 스카이라인. 반짝이는 호수를 끼고 있어 '보석 도시(Gem City)'라는 별명을 지닌 아름다운 도시로, 보랏빛 일몰로 유명합니다. 제조업으로 한때 부와 명성을 누렸습니다. ⓒ Wikimedia Commons

 
노동자들의 도시, 지역총소득 1위의 울산 

2차 세계대전이 끝난 뒤 1970년대 후반까지 30여 년간 미국은 엄청난 제조업 중흥기를 맞았습니다. 이 시기에 일인당 총생산, 평균 소득, 생산성, 기술개발투자 모두 가파르게 치솟았습니다. 지금은 믿기 어렵지만, 일본은 미국의 탄탄한 제조업을 선망의 눈을 바라보았고, 미국의 첨단 부품을 수입해서 조립하는 방식으로 산업을 일궈 갔습니다. 소니도 이렇게 사업을 시작했지요. 잘 알려져 있듯, 미국의 막강한 제조업은 다른 나라에서 보기 어려울 만큼 두터운 중산층을 만들어 냈습니다.  

중산층이 두터워진다는 것은 두 가지 면에서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하나는 계층 이동의 수월함, 즉 부의 불평등이 감소하는 것을 의미합니다. 제조업이 높은 교육과 기술 수준을 갖춘 사람들과 그렇지 않은 사람들 모두를 고용할 수 있도록 여러 형태의 일자리를 만들어 내는 데다, 제조되는 상품과 관련한 여러 파생 산업도 창출합니다. 공장이 생기면 주위에 부품 공장이 들어서고, 물류 설비와 서비스가 따라 들어 오고, 은행 영업소와 식당 등도 생겨납니다. 

이렇듯 제조업은 서비스업을 유인하지만, 그 역은 잘 성립하지 않습니다. 은행 영업소가 생겼다고 근처에 공장이 생겨나지는 않으니까요. 게다가 제조업은 대규모 인력을 필요로 하는 탓에 주변에 쉽게 공동체를 만들고, 그로 인해 학교와 병원 등도 생겨나기 때문에 인근의 다른 공동체들도 덩달아 이익을 얻게 됩니다.  
 

울산만 주변 현대중공업과 현대미포조선 전경. ⓒ 연합뉴스


한국에서 1인당 지역총소득이 가장 높은 도시가 어디일까요? 서울이 아닌 울산입니다. 통계청 자료에 따르면, 울산은 2021년 기준 5935만 원으로 1위였고, 서울은 5421만 원으로 2위였습니다. 다른 지역 평균보다 무려 1800만 원 이상 더 많습니다. '노동자의 도시'가 해당 지역과 나라 전체에 어떤 혜택을 안기는지 알 수 있습니다.

울산은 1인당 개인소득(가계 총처분가능소득을 인구로 나눈 값)에서도  2016년까지 부동의 1위를 차지하다가 그 뒤 서울 아래로 떨어졌습니다. 저는 울산의 개인소득 하락에서 한국 제조업 약화의 징후를 봅니다. 안타까운 일이지요. 이먼 핑글턴은 <제조업이 나라를 살린다>는 책에서 미국 사례를 들며, 제조업 탈피를 '선진화'로 착각해서는 안 된다고 경고합니다.  

"매스컴의 보도가 진실이라면, 현재의 세계를 번영으로 이끌어가는 것은 제조업이 아니고, 컴퓨터, 소프트웨어나 오락, 금융이라는 정보베이스 산업이며, 이제 그러한 사실에 이의를 제기하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 된다. […] 그동안 미국은 조금씩 제조업 분야에서 철수해 가고 있다." 

그로부터 25년이 지난 현재, 제조업은 물론 첨단기술에서도 중국에 밀려나 허둥대는  미국의 모습을 보면, 핑글턴의 경고를 무시한 대가가 어떤 것인지를 알 수 있습니다. 제조업 후퇴가 국가 경제의 몰락을 초래한다는 점은 마키노 노보루가 일본 산업에 대해 경고했던 것과 놀랄 만큼 닮았습니다. 그는 <제조업은 영원하다>에서 경제구조의 축이 제조업에서 서비스산업으로 옮겨가는 것을 우려했고, 그 결과는 '잃어버린 30년'으로 나타났습니다.     
 

70년대까지 활발했던 제조업의 쇠퇴는 소득 정체, 노조쇠퇴, 빈부격차의 증가를 불러왔습니다. 그래프는 노조조직률의 감소가 소득양극화와 상관관계가 있음을 보여줍니다. ⓒ Economic Policy Institute

 
우리의 기회와 노동혐오

다행히 한국은 아직 기회가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미국이나 일본보다 심각한 문제 또한 안고 있습니다. 바로 '노동혐오'입니다. 한국 사회가 육체노동을 천시하는 오랜 전통을 갖고 있는 데다가, 언론이 사용자의 편에서 만들어 낸 '귀족노조' 같은 모순 형용적 조어가 여전히 힘을 발휘하고 있기 때문입니다. 삼성과 현대의 공장이 중국, 인도, 베트남으로 떠날 때 남의 일처럼 바라본 것은 '노동'이 나와 내 자식과 먼일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은 아닌지요? 

많은 이들이 '강성노조'를 비판하지만, 독일처럼 기업이 노동자를 기업 의사결정에 참여할 기회를 보장한다면 굳이 목숨을 건 싸움을 할 이유도 없을 것입니다. 노조의 이기주의를 지적하는 분이 있다는 것도 알고 있습니다만, 노동조합은 본래 "노동자가 주체가 되어 노동조건을 유지하거나 개선함으로써 자신들의 경제적·사회적 지위의 향상을 목적으로 조직한 단체"입니다.  

한국의 법률은 허용되는 파업의 범위를 엄격히 규제하고 있는데, "근로조건의 유지 또는 향상을 주된 목적으로 하지 않는 정치·사회문제 등과 관련한 노조파업은 노동법 상의 쟁의행위가 아니라"는 헌법재판소의 결정까지 나와 있고, 한국의 공권력은 노조가 사회문제에 개입하는 것을 엄격히 규제하고 처벌합니다.  

노동조건의 향상 이외에 다른 사회 문제에 개입하지 못하도록 금지해 놓고 '이기주의'를 비판하는 게 정당한 일일까요? 저는 '노조 이기주의'의 유령이 떠도는 원인이 14퍼센트 언저리의 낮은 노조조직률(2021년 기준)에 있다고 생각합니다. 더 많은 노동자들이 노동조합에 가입하고 함께 연대한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 수 있다고 믿습니다. 버락 오바마나 조 바이든 미국 대통령이 노동자들을 향해 '더 잘살고 싶다면 노조에 가입하라'고 권하는 까닭도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기 위해서는 스스로가 노동자라는 사실을 인식해야 할 것 같습니다. 앞서 말씀드린대로 저는 주로 앉아서 일하지만, 매달 월급을 받지 않으면 생활이 불가능한 임금 노동자입니다. 제가 가르치는 미국 학생들 가운데는 가문에서 처음 대학에 진학한 학생들이 적지 않고, 가족들을 이를 매우 자랑스럽게 여깁니다. 그리고 이 학생들 다수가 지금은 사라진 제조업체에서 일하며 가족을 부양한 노동자의 손녀, 손자들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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