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6.27 10:57최종 업데이트 23.06.27 10:5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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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년필을 수리하며 만난 사람들의 따뜻한 사연과 그 속에서 얻은 깊은 통찰을 전합니다. 갈수록 디지털화 되어가는 세상에서, 필기구 한 자루에 온기를 담아내는 사람들이 있다는 걸 알리고 싶습니다. 온/오프(On/Off)로 모든 게 결정되는 세상이지만, 그래도 아날로그 한 조각을 품는 것만으로도 행복해질 수 있다고 믿는 펜닥터의 이야기를 나누고 싶습니다.[기자말]
몇 개월 전, 메일 한 통을 받았습니다.

"안녕하세요. 저는 김제에 있는 대안고등학교 교사입니다. 저희 학교에 만년필 쓰는 학생들이 많아 '만년필 동아리'를 만들었어요. 매주 모임을 갖는데,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다 선생님 책을 알게 되었습니다. 만년필 수리하는 과정에서의 사람 냄새 물씬한 사연들이 참 반가웠어요. 책을 다 읽고 나니, 우리 아이들에게도 선생님 이야기를 들려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요. 가능하다면 저희 학교에 와주실 수 있을까요? 연락 기다리고 있겠습니다."


"세상에… 만년필 동아리를 가진 학교가 다 있다니요. 그런 학교가 있는 줄은 미처 몰랐어요. 선생님과 학생들이 만년필에 대해 얘기 나누는 장면을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제가 다 좋아요. 기꺼이 가겠습니다."

그렇게 몇 개월간 수차례 메일을 주고받으며 일정을 조율했습니다. 독일, 이탈리아, 그리고 일본이 삼각뿔 형태로 만년필계 힘의 균형을 유지하고 있다면, 학교라는 교육기관의 세 축은 학생, 학부모, 그리고 교사입니다. 이중 어느 한 축의 중요성도 결코 덜하지 않습니다. 제 자신도 중학생, 고등학생 두 자녀를 키우는 학부형입니다. 모두가 각별합니다.

신분이 학생이라고 녹록한 하루하루를 보내는 건 아닙니다. 한 생명이 다 자랄 때까지 양육해야 하는 부모의 어깨도 가볍지는 않지요. 하지만 나날이 교육 인프라가 급변하는 환경에서, 학생과 학부모에게 변화 상황을 온전히 알릴 소임을 가진 교사의 짐이 가장 무거운 시대가 요즘이 아닐까 싶습니다.

우리는 빠름이 미덕으로 여겨지는 세상을 살지만, 때론 더디게 가야 제대로일 때가 있습니다. 차를 타지 않고 걸어가야만 눈에 들어오는 풍경, 들을 수 있는 소리와 맡을 수 있는 냄새가 있지요. 값을 매길 수 없을 만큼 귀한 게 시간이지만, 무조건 빠른 것만이 절대적인 궁극의 가치는 아닙니다. 빠름은 바름에 뿌리를 두고 있을 때, 한층 밝은 빛이 납니다.

2025년부터 태블릿에 디지털 교과서

수년 내 종이 교과서가 사라질 전망입니다. 2025년부터 태블릿에 디지털 교과서를 심어 보급한다는 거지요. 그렇게 몇 년이 지나는 사이 종이 교과서의 존재가 점차 희미해지다, 이내 역사 속 유물로만 남을 겁니다.

지금의 초등학생과 중학생은 말할 것도 없고, 고등학생 역시 모두 2000년대 이후 태어났습니다. 디지털 기기에 대한 이해도가 높다기보다, 완전히 자연스러운 세대라 봐야 합니다.

그런 아이들에게 아날로그의 효용성에 대해 아무리 말한들, 무슨 큰 감흥이 있겠어요. 디지털이 대세가 된 지 오래지만, 어떻게 하면 아이들에게 아날로그 정서를 맛 보여줄 수 있을까… 고심했을 선생님의 마음에 공감이 갔습니다.

디지털이 우리 삶을 한층 풍요롭게 만든 건 참입니다. 하지만 사람은 발을 땅에 딛고 있을 때 비로소 추진력을 갖는 생명체입니다. 본디 사람의 몸 자체가 아날로그입니다. 한 가지 영양소만 과하게 섭취하면 영양불균형 상태에 이를 수 있습니다. 어느 한쪽이 우월하지도, 열등하지도 않습니다. 몸에 좋은 영양성분을 골고루 흡수하듯, 서로의 장점만을 뽑아 융합하는 지혜가 필요한 시점입니다.

인간의 문명이 비약적으로 진보하는 것에 우려와 경계의 시선을 보내는 이들도 많습니다만, 이미 기술의 발전은 임계점을 넘어선 지 한참입니다. 집채만큼 커다란 얼음덩어리도 일단 깨지면 급격히 녹아내리는 것처럼, 첨단화의 수레바퀴에 올라선 이상 과거로 회귀할 순 없습니다. 아무리 종이로 된 교과서에 의미를 부여하더라도, 디지털 전환은 인류의 숙명입니다.

전북 김제엔 아이들이 디지털 시대에 뒤처지지 않게끔 시류를 읽는 힘을 키워주되, 근본을 바로 아는 것의 중요성을 통감하는 학교… 앞서 본을 보이는 것이 마땅하고도 옳은 나의 책무라 여기는 교사들이 있었습니다. 그렇게 요즘 세상 보기 드물게 만년필 동아리가 있는 지평선고등학교 학생들과 그 못잖게 희소한 만년필 수리공이 만났습니다.

질문이 자연스러운 아이들
 

지평선고등학교 도서관에서 학생들과 함께 했습니다 ⓒ 이승재

 
학생들이 행여 집중하지 못하면 어쩌나, 염려했던 건 저만의 우려였습니다. 학생들의 표정은 강연 내내 밝았고, 단단한 눈빛은 그저 생기로웠습니다. 질문하는 데도 스스럼이 없습니다. 한 학생이 손을 번쩍 듭니다.
 
"이 일이 선생님에게 어떤 의미인지 궁금해요. 행복하세요?"
"만년필을 정말 좋아한다면 꽤 행복한 일이 분명해요. 세계 곳곳에서 온 다양한 만년필을 늘 손에 쥐어볼 수 있으니까요. 또 그 과정에서 셀 수도 없이 많은 사람들을 만나는 즐거움이 있어요. 게다가 펜에 담긴 감동적인 사연들은 덤이에요. 사실 저는 만년필 자체보다 그 안에 배어 있는 이야기를 더 좋아해요. 만년필의 끝을 쥐고 있는 건 결국 사람이니까요."

"선생님 강연을 듣고 나니 저도 만년필이 새롭게 보여요. 직업으로서의 '만년필 수리공'은 어떤가요? 추천할 만한가요?"
"직업에 대해 어떤 가치관을 갖고 있는지가 중요해요. 뭔가 의미 있는 일을 하며 산다는 뿌듯함을 느낄 때가 많아요. 그 감정이 고스란히 보람으로 이어져요. 하지만 누구에게 권하긴 조심스러워요. 효율이 썩 좋은 일은 아니거든요. 내가 들인 시간만큼 그에 합당한 성과가 바로바로 눈에 보이길 원한다면, 나와 맞지 않을 수 있어요. 그럼에도 마음이 끌린다면 연락주세요. 기꺼이 힘이 돼 줄게요. 그리고 또 누가 아나요? 여태까지보다 앞으로 더 주목받는 일이 될지도요?"


애초에 시작부터가 거짓말 같았습니다. 금속 펜촉이 꽂힌 딥펜을 연필이나 샤프 다루듯 일상으로 쓰고, 촉이 유리로 된 글라스펜에 여러 색상 잉크를 찍어 낙서를 하며, 만년필로 수학 문제를 푸는 학생들이 그득한 고등학교가 있다는 말은 여태 들어보지 못했으니까요.  

만년필이 재미있는 점 중 하나는, 내 마음이 담기는 필기구라는 겁니다. 동급생 중 더러 얌체 짓을 해도 어쩐지 밉지 않은 친구가 있고, 뭘 잘못하는 게 없는데도 왠지 정이 덜 가는 친구가 있는 것처럼, 만년필도 그런 면이 있습니다.

한번 마음에 들면 가끔 잉크가 잘 안 나와도 뭐 그럴 수 있지, 관대한 마음으로 대하게 됩니다. 그런데 첫 인연이 잘못 맺어진 펜은, 멀쩡히 잘 써져도 손이 안 가곤 합니다. 또 분명 어제까지 잉크가 잘 나왔는데, 갑자기 선이 뚝뚝 끊기는 경우도 있습니다. 변덕스러운 친구처럼 말이에요.

학교는 작은 규모의 사회입니다. 큰 사회로 나와 아무리 전문성을 띤 독자적 직업을 갖더라도, 사람들과의 소통은 필수입니다. 독립화된 공간에서 일을 해도 마찬가지입니다. 그런데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어디 항상 순탄하기만 한가요? 부모 형제간에도 머쓱한 일이 생길 때가 적지 않습니다.

하물며 서로 모르고 살아온 타인과의 관계는 더욱 그렇습니다. 영 의견 조율이 요원한 경우라면 각자의 길을 가야겠지만, 시간을 써 일치를 볼 수 있는 상황이라면 후자를 택하는 게 지혜롭습니다. 문제가 생길 때마다 자르고 끊어내다 보면, 종국에는 마음 둘 곳이 없어집니다.

세상이 변해도 살아남는 것
 

오디로 천연 잉크 만드는 재미를 아는 만년필 동아리 학생들 ⓒ 이승재

 
만년필은 분명 꽤 성가신 도구가 맞습니다. 하지만 바로 그 때문에 반전이 있는 '쓸 것'이기도 합니다. 만년필 쓰는 행위는, 사회로 나가기 전 미리 관계 맺기를 선행하는 것과 같습니다. 사물을 통해 나 자신과 대화하는 법을 먼저 익힌 사람은, 그런 경험이 없는 사람에 비해 타인과의 소통이 한결 매끄러울 수밖에요.

인품과 인격을 가르치려 들면 반발심이 생기기 마련입니다. 선생(先生)은 글자 그대로 먼저 태어난 사람을 말합니다. 앞서 걷는 이의 걸음이 곧으면, 뒤따르는 이도 닮아가는 게 이치입니다. 아무리 세상이 변한들, 교사와 학교의 역할이 가볍지 않은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학생들에게 만년필을 지급하고 동아리 활동을 장려하는 학교가 있다는 소식이 무척이나 반가웠던 까닭입니다.
 

3만 5천 권 이상의 장서가 꽂혀있는 지평선고등학교 도서관 ⓒ 이승재

 
챗GPT(ChatGPT)로 유명한 미국의 인공지능연구소 오픈AI사의 최고경영자 샘 알트만(Sam Altman)이 지난 9일 방한해 매스컴의 주목을 받았습니다. 불과 3개월 전 최신 버전 'GPT-4'를 출시했는데, 올 연말엔 5.0 버전을 내놓을 예정이라니 놀라울 따름입니다.

세계적인 미래학자들은 2030년까지 현존하는 직업의 50%가 사라지고, 인공지능이 사람을 대체하는 속도는 더욱더 빨라질 거라고 예측합니다. 셀 수없이 많은 직업이 사라지겠지만, 분명 새로운 직업도 생겨날 겁니다. 또 이미 사라진 줄로만 알았던 업종 중, 살아남은 직업도 있다는 걸 알게 되겠지요. 제가 하는 이 일, '만년필 수리공'처럼 말입니다.
덧붙이는 글 학생, 학부모, 교사 모두 교육 대전환기를 맞고 있습니다. 그 어느 때보다 학교의 역할이 중요한 시점입니다. 지혜를 얻는 방법엔 여러 가지가 있겠으나, 경험이 차서 넘치면 지혜가 된다고 합니다. 학생들이 세상이라는 큰 사회로 나가기 전, 다양한 형태의 간접 경험을 해볼 수 있도록 애쓰는 교사의 시선을 따라가봤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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