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3.07.21 18:36최종 업데이트 23.07.21 18: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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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종격투기 선수 코너 맥그리거의 감량 루틴을 보고 수분만 빼는 감량을 포기했다. ⓒ 넷플릭스


휘청거리는 챔피언을 두 명의 스태프가 부축했다. 체중계 위에 올라서는 위태로운 모습이 꼭 중병 환자 같았다. 그는 'UFC(미국 이종격투기 대회)의 전설'이라 불리는 코너 맥그리거였고 지옥의 감량 루틴을 마친 직후였다. 따분한 다큐멘터리를 지켜본 까닭은 주짓수 대회를 한 달여 앞두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특히 계체를 통과하지 못하면 경기에 참가할 자격조차 얻을 수 없으므로 감량은 중대한 문제였다. 급하게 체중계를 사서 아침마다 의식을 치르듯 몸무게를 측정했다. 평상시와 비교하면 현저히 적게 먹었던 탓에 체중은 서서히 줄어들고 있었다.


그러나 핵심을 놓치고 있었다. 근육은 보존하면서 수분만 빼야 하는데 언제 이런 감량을 해봤어야 말이지, 노하우랄 게 전혀 없었다. 맥그리거의 다큐멘터리로 알게 된 사실은 지옥 같은 체력 훈련이 먼저고 수분 빼기가 맨 마지막이라는 거다.

과연 그는 수분을 털어내는 데 필사적이었다. 러닝 머신 위에서 땀을 흘리고 사우나를 들락거렸다. 최후의 수단으로 벨기에 와플처럼 생긴, 지퍼 달린 기계에 들어가서 마지막 한 방울까지 쥐어짰다. 그러자 박해당한 예수 내지 잘 말린 육포 같은 몸이 완성됐다.

탈진한 맥그리거는 자신의 감량법을 일컬어서 '위험한 짓'이라고 했고 거기까지 보던 나는 근육은 보존하면서 수분만 빼내는 감량을 단념했다. 대신 수분, 지방, 근육까지 다 덜어내는, 무식한 방법을 선택했다.

그조차도 쉬운 일은 아니었다. 화장을 비롯한 외모 꾸미기를 일절 중단하면서 다이어트도 세트로 내버린 게 5~6년 전이다. 그동안 나는 굶주리는 감각을 완전히 잊고 살았다. 그래서 감량 초기에는 내가 원하는 걸, 먹고 싶은 순간에 먹을 수 없다는 사실을 좀처럼 받아들이지 못했다.

그동안 술과 음식이 차지하는 쾌락의 지분이 상당했고 먹는 데만큼은 절제라는 걸 몰랐다(생각 이상으로 먹는 데 돈을 많이 쓰고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 깨달았다).

무의식

오랜만에 다이어트라는 걸 해보니 무미건조한 무채색 감옥에 자발적으로 갇힌 것 같았다. 다시 원래 내가 살던 곳인, 다채롭고 알록달록한 감각이 출렁이는 세상으로 돌아가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망해버린 부자가 왕년을 회상하듯 병아리콩이나 방울토마토를 씹으며 무절제했던 과거의 쾌락을 반추했다. 그간 내가 먹은 음식에는, 의도하지 않았으나 꽤 정교하고 드라마틱한 연출이 포함되어 있었다. 에피타이저, 본식, 디저트로 이어지는, 끊임없는 자극과 현란한 스퍼트!

그 안에는 내 성격만큼이나 변덕스럽게 바뀌던 메뉴, 차가움과 뜨거움을 넘나드는 온도, 시고 맵고 달고 짠 맛의 변주 등이 포함되어 있었다. 특히 술은 내가 생각한 것 이상으로 강력한 부스터였다. 저녁 식사 때마다 빼놓지 않고 곁들였던 술 덕분에 더 많이, 다양하게 먹을 수 있었다. 별 하나에 생맥주와 별 하나에 하이볼과, 별 하나에 와인, 와인이여!

그렇게 2주쯤 지나는 동안 몸무게는 꾸준하게 줄어들었다. 허기만 면하도록 조금 먹으면서 죽어라 운동했으니 당연한 결과였다. 느닷없이 감량이 최우선 과제로 올라서지만 않았다면 좋았을 텐데. 일, 독서, 심지어 감량을 시작한 이유였던 주짓수 대회조차 뒷순위로 밀려났다.

줄어드는 숫자를 눈으로 확인하면서 할 수만 있다면 영원히 감량하고 싶다고 생각하기까지, 며칠이면 충분했다. 나는 끊임없는 단속과 체크, 거울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고 실루엣 확인하기 등 그 지겹고 하찮은 것들을 다시 인생에 끌어들였다.

그것들이 그처럼 중요해질 수 있다는 사실이 놀랍고 당황스러웠다. 사실 그건 스위치를 누르는 것만큼이나 쉬웠다. 내가 얼마나 먹는 걸 좋아했는지, 맛이라는 쾌락이 얼마나 강렬한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몸무게가 줄어서 기분이 좋거나 행복했냐면 그것도 아니었다. 그보다 마침내 죗값을 치르면서 몸이 정화되고 정신이 기묘한 안정을 되찾은 것 같았다. 남의 시선을 무시하고 쾌락만 좇던 지난 세월 동안 나는 어쩌면 무의식적으로 시달렸는지도 모른다.

자괴감
 

감량을 시작하고 내 자아는 다시 몸뚱이에 갇혔다. ⓒ 게티이미지


정신의학자 루이즈 캐플런에 따르면 여성들은 감각을 품거나 갈망을 추구하는 건 자신에게 허용되지 않는 일이며 그것을 마음껏 추구하고 누리면 큰 대가를 치러야 한다는, 속삭임처럼 어렴풋하고 무의식적인 감각에 항상 시달린다고 한다. 그는 이러한 현상을 일컬어 '원천징수 방안'이라고 표현했다.

소수점 둘째 자리까지 표기되는 숫자만큼 확실하고 잔인한 청구서가 또 있을까. 처음 감량을 시작하기 위해서 체중계에 올랐을 때 솔직하게 말하면 충격이었다. 몇 년째 재지 않아서 몰랐던 몸무게를 두 눈으로 확인한 거다.

나는 페미니스트이고 몸이 건강하면 그뿐, 남의 눈에 좋아 보이는 체형을 추구하지 않기로 했다. 그런데도 몇 년 만에 다시 감량을 시도했더니, 자기 관리를 완전히 팽개친 나에게 분노한 그 무엇(남의 시선이든, 신이든, 우리 엄마든 간에)을 달래기 위해 노력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생각이 저절로 자리 잡았다.

그 과정에서 내 자아는 다시 몸뚱이에 갇혔다. 그간 그 많은 악성 댓글과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최대한 많은 글을 썼던 건 자아를 확장하기 위해서였다. 여성이 지적인 욕심을 드러내면 외모를 집요하게 물고 늘어지는 인신공격의 집중포화 속에 홀로 서게 된다.

온라인에서 여성을 공격하는 악성 댓글 가운데 하필이면 외모 비하가 지배적인 이유는, 그것이 확장된 여성의 자아를 좁디좁은 몸에 가둘 수 있는 가장 효과적이면서 치졸한 계략이기 때문이다.

실제로 장시간 공격받으면서 안팎으로 시달렸던 나의 자아는 몸이라는 감옥에 갇히면서 어느 정도는 편안해졌다. 아름다움은 이러한 방식으로 거의 모든 연령과 문화권의 여성을 철저하게 옭아맬 수 있었고 유감스럽게도 그 지배력은 갈수록 더욱 강력해지고 있다.

물론 몸이 가벼워지는(6킬로그램도 넘게 덜어냈으니까) 느낌, 체력이라는 부상, 아침에 몸을 일으키기 수월하고 정신이 맑아지는 현상이 따라온 것 또한 사실이다. 그걸 다 뭉뚱그린 게 '건강'이고 나는 감량에 열중한 페미니스트로 자괴감을 느낄 때마다 그걸 방패처럼 내세웠다.

"확실히 건강해진 것 같아. 나이 들수록 소박하게 먹으라고 하잖아."
익숙하고 지겨운 변명, 그리고 기만도 그대로였다.
덧붙이는 글 브런치에도 게재하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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