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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할머니댁 살구나무, 거목이다.
ⓒ 조명자
우리 마을 옆 골목에 사시는 할머니댁에는 아주 큰 살구나무가 있다. 따스한 봄날, 부엌 쪽창으로 바라보이는 연분홍 살구꽃은 꽃구름이 흘러가는 듯, 꽃이불을 펼쳐놓은 듯 숨 막히는 풍광을 연출하곤 했었다.

그 풍광에 젖어 짧은 봄을 어떻게 보낸지 모르게 보내고 나면 갖고 놀던 장난감 팽개치는 아이들처럼 살구나무는 까마득히 잊어버리곤 했었는데 며칠 전 집 앞을 지나가던 마을 아저씨가 그 댁 살구나무에서 떨어진 살구가 발아래 지천이니 따가라는 말씀을 하셨다.

살구? 입안에 침부터 괸다. 당도보다는 신도가 강한 살구 맛이 별로라 내가 즐기는 과일은 아니지만 돌아가신 우리 어머니가 생전에 유난히 잘 잡수셨던 과일 중 하나다. 지난 번 5일장에 나갔을 때 직접 따오셨음직한 살구를 조그만 플라스틱 바구니에 수북이 담아 파시는 할머니들을 뵈었는데 살구 한 사발에 3천원쯤 받으시는 것 같았다.

노란 살구색이 너무 예뻐 사지도 않을 거면서 한참을 들여다 보았다. 우리 어머니가 유난히 좋아하시던 살구. 사고 싶었지만 참았다. 다른 식구라도 있으면 나눠 먹겠는데 나 혼자 살고 있으니 사다놓아 봤자 먹을 사람이 없다.

먹을 것이 생기면 머리 속에 누구 줄까부터 생각하는 습관이 몸에 뱄기 때문에 살구 이야기를 듣는 순간 큰 소쿠리를 들고 옆 골목으로 튀었다. 거둬서 나눠주는 재미, 이거 해보면 보통 즐거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또 하나, 먹는 것도 먹는 것이지만 우선 발아래 지천이라는 살구 구경 나가는 것도 즐겁다. 구경이라면 자다가도 벌떡 일어나는 내가 놓칠 일이 아니었다.

▲ 텃밭에 떨어진 살구
ⓒ 조명자
▲ 풀숲에도...
ⓒ 조명자
▲ 담장에도...
ⓒ 조명자
과연 텃밭에도, 풀숲에도 심지어 담장까지도 살구나무 품을 덮는 땅아래 어디든지 살구가 지천이었다. 떨어진 살구는 농익은 탓에 낙하 순간부터 깨어져 성한 것이 별로 없었지만 그 중에 성한 것 하나 주워 깨물어 보니 새콤달콤한 맛이 일품이었다.

땅바닥에 떨어진 살구가 하도 많아 성한 것만 추려 담는데도 금세 소쿠리가 채워졌다. 엎드려 살구를 줍는 순간에도 살구 서너 개가 머리 위로 떨어져 과육이 머리칼에 엉겨 애를 먹을 정도로 농익은 살구는 약간의 미풍에도 견디지 못하고 떨어져 버렸다.

▲ 성한 것만 추려 담아도 이만큼
ⓒ 조명자
상품으로 나온 과일은 약간 덜 익은 것을 내놓기 때문에 과일의 참맛을 보기가 쉽지 않다. 그러나 밭이나 나무에서 바로 딴 과일은 당도나 신선도나 그야말로 둘이 먹다 하나가 죽어도 모를 만큼 맛있으니 그런 과일 맛을 볼 수 있는 것도 촌사람들의 특권 중에 하나라면 하나겠다. 어쨌든 살구를 전혀 좋아하지 않는 나도 몇 개씩이나 먹을 만큼 나무에서 갓 떨어진 살구는 맛이 좋았다.

순식간에 소쿠리 하나 가득 살구를 채워 즉각 살구잼 만들기 작업에 들어갔다. 먹을 사람도 없는데 그대로 두었다간 몇 시간 안에 시커멓게 녹아 들어갈 것은 불 보듯 뻔하기 때문이다. 살구잼을 먹어보진 않았지만 새콤달콤한 맛이 딸기잼만큼 맛있다는 소리를 들은 적이 있어 잼으로 갈무리하면 안성맞춤일 것 같았다.

▲ 처음엔 호박죽이랑 똑 닮았다
ⓒ 조명자
▲ 중간쯤...맑은 체리색?
ⓒ 조명자
살구를 깨끗이 씻어 씨를 뺀 다음 설탕을 듬뿍 넣고 불 위에 올렸다. 살구와 설탕 비율을 얼마만큼 해야 하는지는 모르지만 신맛이 가실 만큼 충분히 넣어 주었다. 그리고 나무 주걱으로 슬슬 저어 주면서 끓이기 시작했는데 처음에 호박죽 색깔처럼 노란 빛깔로 보글보글 끓는 모양이 얼마나 예쁘던지.

시간이 갈수록 점점 진해지는 살구잼. 노란 살구색으로 시작하다 시간이 가니까 맑은 체리 색처럼 변했다. 그러더니 마치 딸기잼 만들 때처럼 진 자색으로 변하고 마침내 쫀득쫀득한 살구잼이 완성되었다.

▲ 드디어 완성, 딸기잼과 별로 다르지 않다
ⓒ 조명자
완성된 살구잼 맛을 보자니 초기에 새콤한 맛이 상당히 줄어들어 제법 맛있었다. 살짝 구운 식빵에 발라 먹으면 딸기잼 저리 가라 할 정도로 맛있을 것 같았다. 난생 처음 만든 살구잼을 누구부터 줄까 머리를 굴리기 시작했다.

살구나무가 너무 커 올라가 딸 수 없지만 매일 아침 저녁 떨어진 것만 주어다 잼을 만든다 하더라도 살구잼 장사를 해도 문제없을 정도로 많은 양일 것이었다. 동생네부터 줄까, 근처에 모여 사는 지인네부터 돌릴까?

돌릴 순서를 고민하다 좋은 생각이 떠올랐다. 우리 모임에서 가끔 후원하는 지체장애인 보호소에 간식으로 가져다주자. 그야말로 무농약 살구잼인데 바로 조린 살구잼을 식빵에 발라주면 얼마나 맛나게 먹을까? 쉽게 먹지 못하는 특별한 간식을 받아들고 좋아 할 아이들을 생각하니 절로 기분이 좋아진다.

어제 양으론 간이 안 차 더 만들기로 했다. 어제보다 더 큰 소쿠리를 들고 살구를 줍기 위해 가는데 왜 그렇게 의기양양하든지. 마치 세상에 아쉬울 것 하나 없는 부자가 된 기분이다.

태그:#살구, #살구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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