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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로 약 1cm 세로 약 28cm인 죽간에 얌전하고 고른 글씨가 최대 28자씩 필사되어 있다. 그러한 죽간 14개가 모여 한 쪽을 이루니 한 쪽의 폭은 14.5cm요, 길이는 약 28cm이다. 16쪽 책의 형태로 접혀 있으니 그 중에서 대학은 5쪽 분량, 중용이 11쪽 분량이다. 전체를 펼치면 하나의 병풍처럼 이어진다.

8월초, 연길에서 천지 가는 길에 주로 장뇌삼을 취급한다는 이름 없는 휴게소에 이끌려 들어가니 한쪽에 골동품 코너가 있었다. 종류는 많지 않았으나 몇 가지 눈에 띄는 물건이 있었다. 그 중에서 나는 죽간으로 엮은 <대학(大學)> <중용(中庸)>을 발견하고 선뜻 추겨 들었다. 다른 죽간은 우리나라에서도 몇 번 본 적도 있고 구입한 적도 있지만 사서 중의 하나인 <대학(大學)> <중용(中庸)>은 처음 보는 '물건'이었기 때문이다.

▲ 죽간으로 엮은 표지도 옛스럽다.
ⓒ 홍광석
옛 물건(고미술품 또는 민속품)을 모으려면 많은 돈이 필요하다는 점에서 일반적으로 호사가들의 취미로 알려졌다. 그러나 비록 깊고 넓은 안목은 없지만 오직 옛 물건에 끌린다는 이유만으로 고서점이나 골동품점을 순회하는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은 알려지지 않은 것 같다.

나는 후자에 속하는 사람이다. 지식도 없고 안목도 없으면서 무조건 조선 목가구가 좋아 골동품점이나 조선목가구 전시회를 기웃거렸다. 지금도 나는 나뭇결이 선명한 오래된 가구를 만나거나, 제대로 대칭을 이룬 먹감나무나 귀목나무로 만든 가구를 보면 쉽게 자리를 뜨지 못하는 버릇이 있다.

장과 농, 궤에 살린 나무의 질감, 흔한 소반의 다리에 기교를 부렸던 장인들의 예술적 감각을 살피면서 조선 가구는 실용성과 미적인 면에서 조상의 지혜를 유감없이 드러낸 민속예술의 걸작이라는 생각을 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좋은 목가구는 가격도 만만치 않지만 서화나 도자기에 비하면 부피가 커서 어지간히 넓지 않은 집이면 보관하기가 어렵다는 점이 문제다. 때문에 보통사람들에게 조선 가구는 전시회의 감상품 이상이 될 수 없는 경우가 많은 것 같다.

▲ 대학 중용의 앞뒤 표지와 일부 내용.
ⓒ 홍광석
가구를 둘 공간이 없는 나 역시 가끔 눈에 띄는 소품을 한 점씩 모으는 것으로 아쉬움을 달래고 있다. 그래서 잊혀가는 우리의 과거 생활을 기념할 수 있는 화로(火爐), 떡살, 향합 등 종류를 가리지 않고 내 형편에 맞추어 모으는 편이다.

버린 자식을 거둔다는 마음으로 한두 점 모으기 시작했는데 해가 갈수록 순수한 우리 민속품은 찾기 어려워지고 있다. 그동안 급작스런 근대화 과정에서 우리 옛 물건의 소중함을 모르고 많은 것을 함부로 버린 결과 때문이 아닌가 한다. 요즘 골동품점에는 중국산이 매장을 메우고 있는 실정이다.

▲ 죽간이 뒷면은 비단으로 배접되어 있다.
ⓒ 홍광석
민족주의적인 사고 때문이 아니라 어쩐지 중국 물건은 끌리는 바가 없어 거의 외면해 왔지만 죽간으로 엮은 책을 보는 순간, '짝퉁'이 많다는 중국이라지만 글씨에 들인 공력으로 봐서 요구하는 금액이 별로 아깝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비록 가정이지만 한때는 누군가의 귀중품이요, 소유하고 있다는 사실만으로 가문의 자존심을 높여주었던 물건이었지 않나 하는 상상도 재미있었다.

아내는 앙증맞은 목가구인 빗접을, 나는 죽간을 들고 차에 오르니 일행은 사라는 산삼 대신 엉뚱한 물건을 사든 우리 내외가 기이했던지 자꾸 무엇이며 무엇 때문에 샀느냐고 물었다. 긴 설명이 필요했다.

옛 물건의 용도는 아직 많다. 실제 사용하기보다는 장식용인 경우가 많지만 가끔은 글 쓰는 소재도 된다는 점에서 유용하다. 물건의 쓰임과 나이, 제재, 생산 지역을 공부하다 보면 자연히 우리 민속 분야에 관심을 두지 않을 수 없게 되고, 그러한 경험이 축적되면 좋은 글감이 되는 경우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나이가 들수록 부부 사이에는 대화의 시간이 줄어들고 내용도 짧아진다는데, 옛 물건을 모으는 취미 역시 다른 취미활동처럼 부부 사이의 대화를 원활하게 하는 점이 있다. 물건에 대한 비평과 이미 구입한 물건과 비교하면서 새로운 사실을 발견하여 대화를 하다 보면 취미가 같다는 점이 참으로 다행이라는 생각을 많이 했기 때문이다. 그래서 누군가 취미가 같으면 원수도 친구가 된다는 말을 남겼는지 모르겠다.

그밖에도 우리 문화에 대한 이해의 폭이 넓어진다거나 주변의 사물이 새롭게 보인다는 점 등도 들 수 있겠지만 생략하겠다.

▲ 지난 해 한국에서 구입한 태상청정경
ⓒ 홍광석
집에 돌아와 <대학> <중용>을 펴놓고 죽간의 내용을 맞추어보니 틀린 글자를 찾을 수 없을 뿐 아니라 대나무를 얇게 깎은 면 위에 한 자 한 자 새기듯 써내려간 정성이 다시 보여 감탄이 절로 나왔다. 비록 연대를 정확하게 알 수 없지만 얕은 지식으로 봐서도 현대인의 솜씨로 보이지 않는다.

책의 표지와 대나무 뒷면에 붙인 비단도 예사롭지 않거니와 끈을 조금씩 잘라 불에 태웠는데 짐승의 털로 실을 꼬아 만든 끈임을 알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이번 계기로 <대학> <중용>을 다시 읽기 시작한 사실만으로도 큰 소득이라 할 수 있을 것 같다.

▲ 노자의 도덕경의 일부를 양각한 죽간
ⓒ 홍광석
우리나라에도 죽간에 글을 써 통에 담아서 경서를 공부했다는 기록도 있고 유물도 있음을 알고 있다. 그런 유물들이 누군가에 의해 소중하게 간직되기를 바란다. 앞으로도 많은 사람들이 우리 주변의 옛 물건을 소중하게 여기고, 하찮은 가구일지라도 대물림을 하는 전통으로 발전했으면 하는 바람을 가져본다.

시대가 변하는 것이지 인간의 본질은 크게 달라지지 않는다고 본다. 빠른 변화를 따라가기에도 바쁜 마당에 옛 물건에 관한 개인의 이야기가 생뚱맞을 수 있다. 그렇지만 바쁜 와중에서도 가끔은 남이 가치를 몰라주는 옛 물건을 찾아보며 옛날의 삶을 돌이켜보고 오늘을 새롭게 하는 시간을 가져보는 것도 필요하지 않을까 하는 생각을 다시 해본다.

태그:#죽간, #대학, #중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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