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몇 해 전에 MBC에서 <조선과학수사대 별순검>이란 추리 사극이 방영된 적이 있다. 이 드라마는 비록 대중적 흥행에는 실패했지만, 조선시대를 배경으로 한 흥미진진한 과학수사를 보여주었다는 점에서 센세이션을 일으킨 작품이다.

셜록 홈즈의 추리소설에 익숙한 한국인들은 ‘과학수사의 원조는 서양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품을 수도 있다. 하지만, 20세기 후반부터 집중적으로 발굴되고 있는 동아시아 죽간(문자가 적힌 대나무 묶음) 자료를 보면, 동아시아에서 이미 수천 년 전부터 높은 수준의 수사가 이루어졌음을 알 수 있다.

드라마 <주몽>에서 등장인물들의 서신 교환에 사용된 대나무 두루마기를 연상하면, 죽간이 무엇인지를 쉽게 이해할 수 있을 것이다.

오늘날 중국 쓰촨성 북부의 전국시대(BC 8~3세기) 무덤에서 발견된 죽간 자료들을 보면, 고대 동아시아 수사의 수준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그중에서 관청의 법률사건을 기록한 죽간 하나를 소개하기로 한다.

‘고대 중국 수사’라 하지 않고 ‘고대 동아시아 수사’라 한 데 대해 의아함을 품을 수도 있다. 지금 소개하고자 하는 죽간은 진나라 이전인 전국시대에 제작된 것이다. 한족 중심의 통일제국이 출현한 시기는 진나라 및 한나라 때다. 한족들은 자신들이 현재 지배하고 있는 땅에서 일어난 역사는 무조건 자신들의 역사라고 주장하는 경향이 있다.

전국시대의 쓰촨 지역이 오늘날의 한족 문화권과 동질적인 것인지 여부는 한족 학자들의 말만 듣고는 판단할 수 없는 일이므로, 여기서는 일단 유보적인 시각을 취하여 동아시아 역사라는 관점을 취하기로 한다.

정확히 전국시대의 어느 때지는 알 수 없지만 대략 2500년 전일 것이라고 하면 별 무리가 없을 어느 시점이었다. 이때 제작된 죽간에 살인사건에 관한 관청의 수사내용이 기록되어 있다. 이해의 편의를 위해 일부 문장을 쉬운 표현으로 수정하였음을 밝힌다.

“우리 서(署)의 관할지역에서 피살체 1구가 발견되었다는 신고가 접수되었다. (우리 지역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신고가 접수되자 수사 명령이 떨어졌고, 이에 따라 관청 서기가 예신(隸臣, 관비)을 데리고 현장으로 달려갔다. 서기가 현장에서 본 시체의 상태는 다음과 같았다.

“어느 집의 남쪽에 남자 시신이 반듯이 누워 있었다. 목 왼쪽에는 칼날에 의한 상처가 있었다. …… 머리와 등과 땅바닥에 피가 흥건하였다. …… 저고리 속에도 두 군데의 칼자국이 있었다.”

서기가 확인한 바에 따르면, 시신의 목과 머리와 등과 저고리에 여러 군데의 칼자국이 있었다. 이른 바 난자(亂刺)가 행해졌던 것이다. 땅바닥에까지 피가 흥건하였다고 하니, 살인 장면이 얼마나 참혹했을 것인지를 짐작할 수 있다. 시신의 상태를 확인한 서기는 눈을 시신 옆으로 돌린다.

“시체 서쪽에 비단 신발 1켤레가 있었다. 한 짝은 (시신으로부터) 여섯 발자국 떨어져 있었고, 다른 한 짝은 열 발자국 떨어진 곳에 있었다. 시신의 발에 신발을 신겨 보니, 신발이 맞았다. 땅바닥이 딱딱해서 살인자의 발자국을 식별할 수는 없었다.”

비단 신발을 신은 인물이라는 점을 볼 때, 피살자는 보통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리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그리고 신발이 두 군데나 떨어진 점을 볼 때에 피해자가 사망 직전에 서둘러 몸을 움직였음을 짐작할 수 있다. 그는 서쪽에서 동쪽으로 급히 움직였다. 그런데 땅바닥이 딱딱해서 가해자의 도망 경로를 확인할 수는 없었다.

사건 현장을 어느 정도 파악한 서기는 이제 현장 주변으로 시선을 돌린다. 그는 시신이 발견된 곳에서 관아까지의 거리를 측정했다. 

“시신이 있는 장소에서 관아까지의 거리는 100보다. 아무개의 농가까지는 200보다.”

그런데 관아에서는 이 사건을 원한에 의한 살인으로 추측하지 않고 강도살인으로 추측한 모양이다. 다음 내용에서 그 점을 추론할 수 있다.

“관아에서는 현 서기에게 시신을 묻고 다음 영(令)을 기다리라는 명령을 내렸다. …… 조사가 시작되었다. 관헌이 돌아다니면서 ‘그 사람이 언제 죽었는지 아느냐?’ ‘도둑이야! 하는 소리를 들었느냐?’ 등을 확인했다.”

관아에서는 시신을 묻으라는 명령을 내렸다. 이는 피해자의 연고를 확인할 길이 없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다. 피살자의 연고를 확인할 수 없으니 그가 원한에 의한 살해로 죽었는지도 확인할 수 없었을 것이다.

그리고 관헌이 현장 주변에 사는 사람들에게 “도둑이야!” 하는 소리를 들었느냐고 확인하고 다닌 점을 볼 때에, 관청에서는 이 사건을 재물사건 즉 강도살인사건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위 죽간의 기록을 볼 때에, 관청은 크게 3가지 점을 근거로 이 사건을 강도살인으로 파악한 것으로 보인다.

첫째, 피살자는 ‘(우리 지역 사람들이) 모르는 사람’이었다. 그가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이고 이 지역 사람들과 별다른 관계를 갖지 않은 것으로 추정된다는 점을 근거로, 적어도 원한에 의한 살인사건일 가능성은 낮다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둘째, 피살자는 비단 신발을 신고 다니는 사람이었다. 비단 신발을 신는 사람이라면 보통 이상의 생활수준을 누리는 사람일 것이라는 추정 하에 범인이 피해자의 재물을 노렸을 것이라고 판단한 것으로 보인다.

셋째, 시신 옆에서 비단 신발 외의 다른 물건이 발견되지 않았다. 다른 지방에서 온 사람이고 또 부유한 사람이라면 분명히 보따리 같은 것을 들고 있었을 텐데, 사건 현장에서 피해자의 짐이 전혀 발견되지 않았다. 이 점을 근거로 관청에서는 범인이 보따리를 갖고 달아났을 것이라고 추정한 것으로 보인다.

누군가가 갑자기 자신의 보따리를 들고 달아나자 당황한 피해자가 급히 쫓아가느라고 신발을 두 군데나 흘렸고, 피해자가 뒤따라오자 위험을 느낀 가해자가 칼을 마구 휘두른 것이라고 추정할 수 있을 것이다. 당시의 관헌들도 기본적으로 위와 같은 추정 하에 이 사건을 재물사건 즉 강도살인사건으로 이해한 것으로 보인다.

위와 같이 고대 동아시아 쓰촨지역의 한 관청에서는 타 지방 사람의 피살 현장을 조사한 뒤에 강도살인으로 추측하고 수사에 착수하였으며, 이런 내용이 죽간 자료를 통해 오늘날에까지 전해지고 있다.

오늘날처럼 종이가 흔하지 않은 그 시대에 수사 내용을 일일이 죽간에 기록한다는 것은 번거로운 일일 뿐만 아니라 비용이 많이 드는 일이었을 것이다. 그런데도 위와 같이 상세한 기록이 남겨졌다는 것은 매우 놀라운 일이라고 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리고 위의 죽간 자료를 통해 고대 동아시아 수사에 관한 몇 가지 내용을 짐작할 수 있다.

첫째, 수사에 관한 내용이 상당히 꼼꼼하게 기록되었다는 점이다. 오늘날의 경찰들이 보더라도 상당히 세세한 현장조사기록이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둘째, 수사 기록이 체계성을 띠었다는 점이다. 시신의 상태를 먼저 기록한 다음에 시신의 주변 상황을 적고 그런 다음에 현장 주변을 스케치함으로써, 사체를 중심으로 관찰의 범위를 순차적으로 확대해 나가는 방식을 취하고 있다. 이는 관청에서 관리들에게 수사기록에 관한 테크닉을 전문적으로 가르쳤을 가능성을 보여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셋째, 수사가 일종의 과학적 추리에 바탕을 두었다는 점이다. 단순 살인사건으로 치부해버릴 수도 있는 사건이었지만, 관헌에서는 ▲피해자가 낯선 사람이며 ▲비단 신발을 신고 있었으며 ▲다른 재물이 발견되지 않은 점 등을 근거로 재물사건 즉 강도살인사건으로 판단하였다. 

2500년 전 동아시아 관헌들의 수사기록을 담고 있는 쓰촨성의 죽간 자료는 고대 동아시아에서도 오늘날 못지않은 과학수사가 이루어지고 있었음을 보여주는 것이라 할 수 있을 것이다. 이런 점들을 볼 때에, 과학적 전통을 무조건 서양에서 찾으려고 하는 것은 편협한 태도일지도 모른다. 


태그:#동아시아문명, #과학수사, #죽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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kimjongsung.com.일제청산연구소 연구위원,제15회 임종국상.유튜브 시사와역사 채널.저서:대논쟁 한국사,반일종족주의 무엇이 문제인가,조선상고사,나는 세종이다,역사추리 조선사,당쟁의 한국사,왜 미국은 북한을 이기지못하나,발해고(4권본),패권쟁탈의 한국사,한국 중국 일본 그들의 교과서가 가르치지 않는 역사,조선노비들,왕의여자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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