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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폭의 역사는 대단히 유구하다. 염장호 경기대 경찰행정학과 교수는 "신라의 청소년 무술집단인 '화랑'이 범죄조직의 기원"이라고 말했다. 다른 논문에서는 무신의 난을 일으켜 정권을 장악했던 정중부(鄭仲夫)를 죽이고 집권한 청년장교 경대승(慶大升)의 사조직  '도방(都房)'이 조폭의 원류라고도 한다.

 

그래도 경대승은 좋은 가문 출신의 엘리트였지만 일자무식의 이의민(李義旼)은 조폭 출신으로서 권력을 잡은 데다, 왕을 죽이기까지 하였으니 그 바닥의 인물들이 비조(鼻祖)로 섬기기에 충분하다 할 것이다.

 

조선 초기 반란을 꿈꾸던 무뢰배들?

 

당시에는 조폭이라는 말이 없었고 무뢰배(無賴輩)로 통칭하였으니 그렇게 표현하기로 하자. 고려시대부터 정변(政變)에 무뢰배가 동원된 기록이 적지 않으며 내전(內戰)에서도 활약이 두드러졌다. 본래 못된 것은 잘 배우기 마련이라 조선에서도 무뢰배들이 횡행했다.

 

「대사헌 남재(南在) 등이 상언(上言)하였다.

- 중략 -

밭을 손질하는 사람은 반드시 풀을 뽑고, 집을 짓는 사람은 반드시 터를 다지니, 국가를 다스리는 사람도 마땅히 환난(患難)을 미연(未然)에 없애서 나라의 기틀을 영세(永世)토록 전해야 될 것입니다. 지난번에 고려 왕조의 후손(後孫)을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나누어 두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도 주현(州縣)에 뒤섞여 사는 사람이 있으니, 만일에 무뢰배(無賴輩) 가운데 왕씨(王氏)인 것을 구실로 삼아 난리를 일으키는 사람이 있게 된다면 그들을 보전하는 방책이 못됩니다. 원컨대, 모두 강화(江華)와 거제(巨濟)에 두어서 미리 방비하게 하소서.

- 하략 -」

- <태조실록> 1년(1392 임신년) 9월 21일

 

당시 대사헌 남재(南在) 등의 관리들이 국기(國基)를 바로하기 위해 건의한 12개 조목인데, 거기서부터 무뢰배가 나타나고 있다. 그런데 이때 나타난 무뢰배 가운데는 우리가 생각하는 조폭의 범주를 벗어나는 자들이 있다. “왕씨인 것을 구실삼아 난리를 일으킨다”는 것은 바로 반란을 의미하는 것이다.

 

신생국가인 조선이 경계할 정도였다면 반란을 구현할 수 있는 무력과 조직력을 갖춘 것이 분명하다. 유흥가에 기생하고 백성을 등치는 일반적인 조폭과는 아예 차원이 다르다고 할 것인데, 아마 고려의 무관이나 사병조직과 관련이 있을 것 같다. 국가나 정권이 멸망한 이후 새로운 흐름을 거부하거나 그것에 편승하지 못한 자들이 발생하게 마련이며 그들이 취할 수 있는 방도는 지극히 제한적이다.

 

중국에서는 전조(前朝)에 충성하는 무관들이 반란을 일으키는 경우가 빈발하였는데, 특히 명나라가 멸망한 이후 '반청복명(反淸復明)'의 기치를 들고 봉기한 정성공(鄭成功)이 유명하다. 일본에서도 멸망한 쇼군(將軍)에게 충성하는 소수의 무사들이 죽음으로 항거하였으며, 도요토미 히데요시 가문이 멸망했을 때에도 그에게 충성하는 무사들이 도쿠가와 이에야스 가문과 상당 기간 항쟁한 기록이 있다.

 

'통행금지'를 무시한 무뢰배들

 

그런 만큼 조선 초기에 등장하는 무뢰배들 가운데 고려의 냄새가 풀풀 풍기는 자들이 함유된 것은 그리 이상할 것이 없다. 고려의 체취가 세월에 흩어지고 조선이 정착됨에 따라 무뢰배들도 시류에 영합하게 되는데, 법의 적용을 받지 않으려는 본질은 전혀 달라지지 않았다. 그런데 태종 초기의 보고 가운데 심상치 않은 것이 눈에 띈다.

 

「- 전략 -

1. 순작(巡綽)을 삼가십시오. 한(漢)나라의 제도에 남·북군(南北軍)은 경성(京城)의 순찰(巡察)을 관장하였습니다. 그 체통(體統)이 엄하고 호령(號令)이 엄한 까닭에 공고(鞏固)함을 유지하여 국가가 편안하였습니다. 대체로 뜻하지 아니한 변(變)은 의례 모야(暮夜)에 생기는 까닭에 마땅히 순작(巡綽 - 순찰과 경계)의 법을 삼가야 합니다. 날마다 각경(各更)에 순관(巡官)이 그 부(部)에 소속된 병졸을 거느리고 맡은 바 시간[更]을 순찰하되, 끝나면 바로 흩어져 집으로 돌아가는 까닭에 병졸은 감소되고 군령(軍令)은 해이해지오니, 금란비환(禁亂備患)의 법에 있어서 미진합니다. 또 맡은 바 시간[更]의 순찰을 끝내고 흩어져 돌아가는 병졸들이 다음 시간[次更]의 순찰을 범(犯)하더라도 수하(誰何)하지 아니하니, 만약 무뢰배가 함부로 ‘순찰을 끝내고 돌아가는 병졸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또한 식별하기 어렵습니다.

- 하략 - 」

- <태종실록> 2년(1402 임오년) 6월 18일

 

사간(司諫)이 올린 여러 시무 조목 가운데 일부인데, 통행이 금지된 도성의 야간순찰의 문제에 대해 아뢰고 있다. 영이 제대로 서지 않아 자신이 맡은 시간이 끝나면 그냥 집으로 돌아가버리는 일이 빈발했던 것 같다. 그러다보니 교대근무자들이 별로 의심하지 않고 통과시키고 있는데, 자신들도 그렇기 때문에 굳이 수하하여 제지할 필요성을 느끼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만일 반대파들이 그것을 이용하여 정변을 일으키려고 한다면 치명적인 결함으로 작용할 수 있으니 규율을 엄정히 세우라는 건의인데, “만약 무뢰배가 함부로 ‘순찰을 끝내고 돌아가는 병졸이라’고 말한다 하더라도 또한 식별하기 어렵습니다”라는 부분이 상당히 흥미롭다.

 

그것은 무뢰배들이 통금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과 함께, 순군(巡軍)들과 안면을 트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당시 도성을 순찰하는 병력의 수효가 얼마나 되는지는 모르겠으나 동료들의 얼굴을 모른다는 것은 말도 되지 않는다. 어둡다고 하더라도 횃불을 비쳐보면 금방 알 수 있을 터인데 “근무를 마치고 돌아가는 순군”이라는 거짓이 통할 것 같은가? 그것은 남들의 이목을 의식한 제스처에 지나지 않는다. 

 

서로 안면을 트고 있기는 하지만 통과시켜주려면 같은 순군이라는 핑계를 대는 센스쯤은 필요하지 않겠는가. 물론 그런 특혜를 받기 위해서는 소위 ‘빽’이 든든해야 할 것이다. 통행금지를 어길 수 있는 무뢰배들은 권력자와 밀접한 관계가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높으신 대감님을 알아서 모시는 식객(食客)이나 통인(通人)의 신분일 수도 있겠으며, 높은 집의 자제와 그를 따르는 무리일 수도 있겠다. 그렇지 않고서는 거나하게 즐긴 다음 통행금지를 무시하기 어렵기 때문이다.

 

무뢰배로 살아가기 위해서는 필수적으로 체격과 완력이 뛰어나고 무술도 상당한 수준으로 연마해야 할 것이다. 그렇지 못하면 시정에서 양민들 등이나 치는 왈짜나 잡배가 될 수밖에 없지 않겠는가.

 

낮과 밤을 가리지 않고 횡행하며 폭력을 휘둘러 재물을 빼앗고 부녀자를 겁간하는 무뢰배와 시정에 기생하는 왈짜는 지금의 조폭과 양아치보다 훨씬 차이가 크다고 해야 할 것 같다. 내가 무뢰배를 조폭에 수평대입하는 것은 그것이 가장 비근하기 때문이지 서로 합치되는 것은 아니다. 지금도 정치깡패와 경제깡패 등이 활개치는 것처럼 조선시대에서도 무뢰배의 상당수가 권력자나 대상(大商)의 하수인으로 활동하였던 것이 분명하다. 권문세가의 서자(庶子)들도 적지 않게 등장하지만 일단 그렇게 구분하는 것이 좋을 것 같다. 

 

조정 관원을 사칭하며 유감동을 강간한 무뢰배 김여달

 

잠시 무뢰배에 대한 기록 하나를 더 읽어보자.

 

 「지사간원사 김학지(金學知) 등이 상소하기를,

- 중략 -

 유감동(兪甘同) 여인의 추악함도 처음에는 이렇게까지 심하지 않았는데, 김여달(金如達)에게 강포(强暴)한 짓을 당하여 이렇게 된 것입니다. 이전에도 부녀들이 강포(强暴)한 자에게 몸을 더럽힌 사람이 간간이 있었지만 모두 시정(市井)과 민간(民間)의 미천한 무리뿐이었는데, 지금 여달(如達)은 어두운 밤을 타서 무뢰배(無賴輩)와 결당(結黨)하여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다니다가, 유감동(兪甘同) 여인을 만나 그가 조사(朝士)의 아내인 줄을 알면서도 순찰을 핑계하고는 위협과 공갈을 가하여 구석진 곳으로 끌고 가서 밤새도록 희롱했으니, 이것을 보더라도 유감동(兪甘同)이 처음에는 순종하지 않는 것을 강제로 포학한 짓을 행한 것이 명백하니, 어찌 미천한 무리들이 간통한 것처럼 가볍게 논죄할 수 있겠습니까. 여달(如達)의 강포(强暴)한 짓이 이와 같았으니, 이미 드러난 것은 비록 이 한 가지 일뿐이지마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남몰래 저지른 나쁜 행위도 역시 많을 것입니다.

- 하략 -」

- <세종실록> 9년(1427 정미년) 9월 29일

 

위의 내용은 앞에 소개했던 유감동 사건의 일부이다. 사간원의 김학지가 세종에게 상언(上言)한 것에 의하면 김여달은 볼 것도 없이 무뢰배다. 어두운 밤에 거리와 마을을 휩쓸고 유감동(兪甘同)을 강간하였는데, 조정의 관원을 사칭하였으니 보통 큰 죄가 아니다.

 

김학지는 또한 “여달(如達)의 강포(强暴)한 짓이 이와 같았으니, 이미 드러난 것은 비록 이 한 가지 일뿐이지마는 겉으로 나타나지 않은 남몰래 저지른 나쁜 행위도 역시 많을 것”이라며 크게 처벌할 것을 주청하고 있다. 무뢰배들이 어떤 짓을 자행하는지 잘 나타내는 대목이라 하겠는데, 언뜻 보기에도 중형(重刑)을 면하기 어렵다. 제대로 처벌하면 최소한 사형이다. 김학지도 그렇게 주장했다.

 

「여달은 완악(頑惡)한 짓이 더욱 심하니 만약 처음 간통한 것이 사죄(赦罪) 전에 범한 것이라 하여 이를 극형(極刑)에 처할 수 없다면, 유감동(兪甘同)의 예(例)에 의거하여 변방 고을에 정역(定役)하여 영원히 돌아오지 못하게 한다면 형벌이 죄에 합당하게 되어 인륜(人倫)에 매우 다행할 것입니다.」

 

김여달은 극형에 해당했지만 의외로 가벼운 처벌에 그치고 말았다. 최초의 판결은  중형으로서 곤장 1백 대에 3천 리(里)의 유형(流刑)이었으나, 최종판결은 유배 없이 곤장 80대로 경감되고 말았다. 이처럼 무뢰배에 대한 기록은 적지 않지만 그들이 실제로 처벌당했다는 기록은 별로 없으니 참으로 개탄할 노릇이다. 그런 무뢰배들이 무슨 짓을 못하겠는가. 심지어는 자객을 보내어 고관(高官)을 암살하려고까지 했다. 

 

영조시대의 전국구 조폭 '검계' 소탕 작전

 

「주강(晝講)을 행하였다. 훈련대장 장붕익(張鵬翼)이 특진관(特進官)으로 입시하자, 임금이 자객(刺客)에 대한 일을 물으니, 장붕익이 대답하기를,

 “잠결에 창 밖의 사람 그림자를 보고서 칼을 들고 나가니, 사람이 칼을 가지고 대청 마루 위에 섰다가 이내 뛰어서 뜰 아래로 내려가므로 함께 칼날을 맞대고 교전(交戰)하여 외문(外門)까지 옮겨 갔었는데 그 자가 몸을 솟구쳐 담에 뛰어 올라 달아났습니다.”하였다.」

- <영조실록> 9년(1733 계축년) 5월 12일

 

장붕익은 영조 연간인 1725년부터 1735년 기간 중에 포도대장을 지냈는데 이때 검계(劍契)라는 무뢰배 조직이 크게 문제를 일으켰다. 검계는 비밀결사 형태의 전국구 조폭으로 살인과 약탈을 서슴지 않았다. 게다가 공공연히 습진(習陣)을 하는 등으로 존재를 드러내어 백성들을 공포로 몰아넣었다.

 

검계를 그냥 두면 안 된다는 대간의 상소가 빗발치자 영조가 당시 포도대장이었던 장붕익에게 소탕할 것을 명하게 되었다. 어명을 받은 장붕익은 마치 빗자루로 쓸어내듯 검계를 소탕했다. 철저히 색출하여 두목 급은 참수하고 행동대원들도 아킬레스건을 끊어 불구로 만들어버리자 검계가 붕괴했다.

 

검계뿐 아니라 다른 무뢰배들까지 장붕익의 이름만 듣고도 오줌을 지리며 도망갈 정도였다고 하니 얼마나 잔혹하게 소탕했는지 짐작이 간다. 그런 장붕익에게 자객을 보낸 자들이 누구라는 것은 굳이 깊이 생각할 것도 없지 않겠는가. 나라의 고관까지 서슴없이 암살하려드는 무뢰배들은 지금의 마피아에 비겨도 손색이 없을 것 같다.

 

공신의 반열에 오른 무뢰배들

 

마지막으로 공신(功臣)의 반열에까지 오른 무뢰배들을 소개해보겠다. 공신이 되면 최고의 부와 명예를 갖출 수 있는 데다, 본인과 자식들이 사형에 해당하는 죄를 지어도 사면되는 등의 특권까지 겸비하여 모두가 선망했다.

 

목숨을 바쳐도 얻기 어려운 공신의 반열에 무뢰배들이 포함되었다면 믿기 어려울지 모르겠지만, 실록에 존재가 분명히 입증된다. 수양대군이 일으킨 계유정난(癸酉靖難)이 성공하자 논공행상으로 정난공신(靖難功臣)이 책록되는데, 이때 녹권(錄券)을 받은 43명 중에는 무사들도 포함되었다.

 

1등 공신이 되고 나중에 좌의정까지 오르는 홍달손(洪達孫)이야 본래 무반(武班)이었다고 해도, 2등으로 좌·우의정은 물론 영의정까지 역임한 홍윤성(洪允成)은 무뢰배 세계에서도 알아주는 주먹이었다. 홍윤성과 같이 2등에 책록되어 크게 출세한 양정(楊汀)도 무신(武臣)으로 칼과 주먹이 앞서는 자였다.

 

물론 홍윤성과 양정 같은 사람들이 무뢰배로 전업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그들도 배울 만큼 배웠을 것인데, 혈기가 뻗치는 젊은 시절에 무뢰배들과 어울렸을 개연성은 충분하다. 그때의 인연으로 무사들을 천거할 수 있었겠지만 말이 좋아 무사였지 쓸 만한 병력이 부족했던 수양대군에게 무뢰배를 스카우트해 준 것에 지나지 않았을 것이다.

 

자타가 공인하는 무뢰배 출신으로 공신 반열에 오른 천하의 행운아는 민발(閔發)이라는 자였다.

  

「고령군(高靈君) 신숙주(申叔舟), 영성군(寧城君) 최항(崔恒), 인산군(仁山君) 홍윤성(洪允成), 좌찬성(左贊成), 김국광(金國光), 호조판서(戶曹判書), 노사신(盧思愼), 이조판서(吏曹判書) 성임(成任)을 불러 술자리를 베풀었는데, 마침 중추부 지사(中樞府知事) 민발(閔發)이 충주(忠州)로부터 와서 알현하니,

- 중략 - 

임금이 민발(閔發)에게 이르기를,

“너는 글[書]을 아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모릅니다.”

하므로, 임금이 말하기를,

“네가 글을 알지 못하고서 어찌 뭇 것[衆]을 다스림이 적은 것[寡]과 같음을 알겠느냐? 《오자(吳子)》를 읽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숙독(熟讀)한 곳은 대강 압니다.”

하니, 〈묻기를〉

“《대학(大學)》을 읽었느냐?”

하니, 대답하기를,

“못 읽었습니다.”

하였다. 신숙주가 말하기를,

“민발은 시위(侍衛)하여 서울에 올 때에 《대학》을 시복(矢服)에 꽂고, 또 읽었습니다.”

하니, 민발이 말하기를,

“익히지 아니하여 읽는 대로 잊었습니다.”

- 하략 -」

- <세조실록> 14년(1468 무자년) 2월 4일

 

3등 공신에 봉해진 민발은 놀랍게도 글을 알지 못했다. 세조의 질문에 대해 본인 스스로가 “모릅니다”라고 명쾌하게(?) 대답하였으니 학문의 기본이라고 할 수 있는 <오자(吳子)>와 <대학(大學)>을 모르는 것은 당연한 노릇이라고 하겠다.

 

세조가 짓궂게 계속 물어보자 신숙주가 민망하였던지 “민발은 시위(侍衛)하여 서울에 올 때에 <대학>을 시복(矢服)에 꽂고, 또 읽었습니다”라고 변명할 정도였다. 그러나 이때에도 “익히지 아니하여 읽는 대로 잊었습니다”라며 스스로 부정하고 있다. ‘읽는 대로 잊었다’는 내용으로 보아 완전한 문맹 같지는 않은데, ‘익히지 아니하여’라는 대목에서 글을 전혀 모른다는 것이 입증되고 있다. 그런 민발이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벼슬을 받았다는 것은 무척이나 신기할 노릇이다. 세조도 신기하였는지 짐짓 말했다. 

 

「“그렇다면 네가 무거(武擧) 때에 강(講)한 것은 무슨 글이냐?”

하니, 대답하기를,

“신(臣)의 등제(登第)는 명령이었습니다.”

하므로, 신숙주가 말하기를,

“민발(閔發)이 무거(武擧) 때에 《대학》을 잘못 읽어 시관(試官) 등이 불통(不通)이라 하니, 민발이 크게 말하기를, ‘성상께서 일찍이 나한데 이와 같이 가르쳤고 신숙주도 나에게 또한 이와 같이 가르쳤는데, 시관(試官)은 도리어 의심하여 조통(粗通)으로 두는가?’ 하여, 이로 인하여 등제(登第)하였으니, 과연 민발이 말한 것처럼 명령이었습니다.”」

 

조통(粗通)과 불통은 과거나 서당에서 글을 욀 때에 성적을 매기는 등급이다. 순(純), 통(通), 약통(略通), 조통(粗通), 불통(不通)의 다섯 등급인데, 지금의 수우미양가로 생각해도 될 것 같다. 이때 민발이 합격한 무과는 급제하여 벼슬을 하고 있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다시 실시하는 중시(重試)였는 바, 시험관이 최악의 점수인 불통을 준 것이다.

 

대학을 제대로 읽지 못했기 때문에 당연한 결과라고 할 것인데, 민발이 크게 노하여 “세조와 신숙주가 그렇게 가르쳤는데 어찌 그것을 틀리다고 하느냐”고 항의했다. 말도 안 되는 억지지만 세조가 아끼는 공신의 억지는 통했다. 그래서 겨우 합격점을 받을 수 있었던 것인데, 언뜻 보기에도 부정의 혐의가 짙다. ‘세조와 신숙주가 그렇게 가르쳤다’는 주장은 미리 범위와 문제를 지정하고 암기하도록 했다는 말이 아닌가?

 

공신으로 봉한 민발이 낙방하여 망신당하는 것을 원치 않았을 세조로서는 충분히 취할 수 있는 조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대로 읽지 못해(외우지 못해) 불통의 성적을 받은 데다, 부정이 개입된 사실을 제 입으로 나불대고 있으니 민발은 적수를 찾기 어려운 ‘꼴통’으로 보아야 마땅하다.

 

영의정에까지 오른 무뢰배 출신 민발

 

그런 자가 무뢰배가 아니었다면 오히려 그것이 더욱 이상할 지경이다. 실록에도 “민발은 얼굴이 흉악하고 목소리가 거칠어, 용맹하나 의리가 없었다”고 하였는 바, 무뢰배라는 것이 명확하게 입증된다. 

 

「민발(閔發)과 최적(崔適)이 일찍이 세조(世祖)에게 입시(入侍)하였을 적에 세조가 최적에게 묻기를,

“민발이 글을 아는가?”

하니, 대답하기를,

“민발이 어렸을 때에 그 집의 종이 밖에 나들이하느라고 포망(捕亡)【무릇 천례(賤隷)가 나루를 건너자면 제 주인의 서간(書簡)으로 증명을 삼으며, 그것이 없으면 잡아서 고(告)하는데, 이것을 속칭 포망이라 한다.】을 써 주기를 청하였는데, 민발이 쓰지 못하므로 속여서 말하기를, ‘오늘은 기일(忌日)이니, 포망을 쓸 수 없다.’ 하였습니다.”

- <예종실록> 1년(1469 기축년) 8월 16일

 

예종 시대까지 민발이 글을 몰라 실수하자 좌우에서 실소했던 기록이 남아 있다. 무식한 무뢰배였기는 해도 이시애의 난을 진압한 공으로 적개공신(敵愾功臣)까지 겸하였으며 여산군(驪山君)의 칭호를 받는 등 대단한 영예를 누렸다. 게다가 성종 무렵에는 영의정까지 역임하고 천수를 다하였지만 하는 짓은 전형적인 무뢰배였다.

 

「어제 모임에 참여한 여러 신하를 서빈청(西賓廳)에 불러서, 임사홍이 박효원(朴孝元)을 가만히 부추겨서 현석규(玄碩圭)를 공격하기를 꾀하였던 등의 일을 물으니, 임사홍이 말하기를,

- 중략 - 

임원준은 과장(科場)에서 글을 대신 지었고 이용(李瑢)의 집에서 약을 훔쳤으며, 또 민발(閔發)과 더불어 신의 처부(妻父) 이덕량(李德良)의 집에 이르러 바둑을 두다가 ‘너’라고 일컬으면서 서로 싸웠기 때문에 배척하여 간사하고 탐탁(貪濁)하다고 지목하는 것입니다.”

- 하략 -」

- <성종실록> 9년(1478 무술년) 4월 30일

 

정승이나 되는 자가 바둑을 두다가 어린애들처럼 싸움을 일삼고 있으니 어이가 없지만 이것은 아무 것도 아니다. 세조 시절에는 왕족에다 공신의 자손인 이석산(李石山)이라는 사람이 자신의 첩과 간통하였다 하여 죽여버렸는데, 칼로 난자하고 눈알을 뽑았으며 성기를 잘라내는 등 극도로 잔혹했다.

 

정황과 증거가 너무나 뚜렷하여 변명의 여지가 없었지만 세조가 적극적으로 두둔하는 바람에 형벌을 피해갈 수 있었다. 그것 외에도 소개할 것이 적지 않지만 이쯤 하겠다. 모든 것을 보았을 때 민발은 무뢰배 가운데서도 초특급이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것이다.

 

그런 자를 공신으로 봉하고 살인마저도 면책하는 것을 보면 한심하기 짝이 없겠지만, 우리도 얼마 전에는 훨씬 더한 세상에 살았었다. 군복을 입은 무뢰배들이 나라를 차지하고 국민 위에 군림한 것은 불과 그리 오래 지난 과거의 일이 아니다. 할 줄 아는 것이라고는 '빳다' 치고 박박 굴리는 것 밖에 모르던 자들이 나라를 다스리면 얼마나 잘 다스렸겠는가.

 

그들은 툭하면 “후세의 역사가 평가하고 심판할 것이다”라고 말하였는데, 자신들에 의해 짓밟힌 현재의 역사는 조금도 개의치 않겠다는 뜻이라고 할 수 있다. 무력으로 정권을 찬탈하여 무수한 국민을 폭압하고 심지어는 죽이는 것까지도 서슴지 않았던 그 사람은 지금도 잘 먹고 잘 살면서 단돈 29만원 밖에 없다고 뻗대고 있으니 그저 탄식할 뿐이다. 최규하 대통령의 집무실에까지 권총을 차고 들어갔던 전모 장성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과연 역사는 돌고 도는 모양이다.

 

[추신1]

 

본문에 통행금지를 말하였는데, 나도 그런 시대를 경험했다. 밤 12시 정각에 통금을 알리는 사이렌이 급박하게 불어댄 직후부터 그나마의 자유는 완전히 사라졌다. 서민들이 통금에 걸렸다가 죽도록 얻어맞기 일쑤였다면 젊은 층은 믿기 어려워 할 것이다.

 

1980년 신군부가 들어선 다음 지옥 같은 통금이 해제되었는데, 그것이 그들의 유일한 치적으로 인정될 지경이었다. 우리의 현대사는 통금 이전과 이후로 크게 구획할 수도 있다고 할 것인데, 당시에도 조선의 무뢰배들처럼 통금의 적용을 받지 않은 자들이 존재했다. 사람 사는 곳은 어디나 비슷하지 않은가, 

 

[추신 2]

 

대통령의 동기로서 자리를 물려받아 ‘보통사람’을 캐치프레이즈로 삼았던 노모씨는 희한한 사례를 많이 남겼다. 당시 방한(訪韓)했던 미국 대통령의 경호원들이 안전을 문제 삼아 청와대 대통령 집무실에까지 폭발물 탐지견을 끌고 들어 왔는데, 그들이 우리를 어떻게 바라보는지 극명하게 드러나는 대목이라 할 것이다.

 

그것 말고도 보리스 옐친 전 러시아 대통령이 방한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당시 옐친 대통령은 구(舊) 소련이 격추시킨 KAL 007기의 블랙박스를 선물로 가지고 왔는데, 매우 융숭하게 대접받고 경협 약속까지 얻어내는 등 실속을 챙겼다. 그에 비해 우리가 얻은 것은 제대로 판독도 되지 않은 블랙박스뿐이었으니 어이가 없다 못해 기가 막힌다.

 

그리고 전씨와 노씨는 베트남전쟁에 참전했다가 고엽제 피해를 당한 참전용사들을 전혀 돌보지 않았다. 경위야 어쨌든 조국의 명령으로 전쟁에 뛰어들었다가 불치의 병을 얻은 참전용사들을 돌보기는커녕 사실 자체를 은폐하고 억압하였는데, 자신들도 참전한 전쟁의 전우들을 어찌 그렇게 대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 자들이 주물러 댄 나라가 이나마라도 유지되는 것이 불가사의 할 지경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기사는 인터넷한겨레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무뢰배, #조선, #민발, #홍윤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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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0권 출판을 목표로 하는 재야사학자 겸 작가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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