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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경들의 겨울을 푸르게 수놓는 보리밭.
 만경들의 겨울을 푸르게 수놓는 보리밭.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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굽이굽이 펼쳐진 만경들을 지나며

나는 지금 망해사로 간다. 그동안 난 바다가 안겨주는 막막함 보다는 산의 너그러움을 더 사랑하는 했다. 그러나 정월 초이틀, 오늘은 왠지 막막함을 사랑하고 싶다. 판소리 명창 임방울이 부르는 '호남가'의 한 구절처럼 '굽이굽이 만경'을 돌아서 망해사로 가는 길은 한가하다. 오랜만에 마주 대하는 만경들. 끝없이 펼쳐진 보리밭이 마치 바다 같다.

매어놓은 한 척의 배 같은 논 이랑들. 먼발치에 정지해 있던 푸른 들판이 우르르 밀려온다. 내가 사랑하는 두 가지 겨울 풍경은 눈 덮인 산과 푸른 들판이다. 눈 덮인 산을 보려면 북으로 가야하고, 푸른 보리밭이나 마늘밭을 보려면 남으로 가야 한다. 대조적인 풍경만큼이나 엇갈린 행보인 셈이다.  

달려오는 들판을 향해 도시 생활 내내 굳게 닫아두었던 내 감성의 밸브를 활짝 열어 놓는다. 열어놓은 밸브 속으로 만경들이 겪어야 했던 일제 강점기 수탈의 역사와 당시 민중들이 겪었을 고통과 아픔이 쏴~소리를 내며 한꺼번에 쏟아져 들어온다.

초등학교 시절엔 이 맘 때면 얼어서 들뜬 보리 뿌리를 가라앉히려고 보리밭 밟기를 하곤 했다. 한 줄로 죽 늘어서서 자근자근 밟아나가는 것이다. 보리싹은 밟아줄수록 더 푸르게 자라고 벼 포기는 묶어줄수록 더 굳건하게 자란다. 말하자면 민중이란 한겨울 보리밭 같은 존재들이다.

지평선이 끝나는 곳에서 마주치다

심포항 쪽에서 바라본 진봉산. 동그라미 표시한 곳이 망해사가 있는 자리다.
 심포항 쪽에서 바라본 진봉산. 동그라미 표시한 곳이 망해사가 있는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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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사 전경.
 망해사 전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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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해사는 서해로 흘러가던 만경강이 잠시 숨을 멈춘 진봉산 자락에 있다. 해발 72m밖에 되지 않는 나지막한 산이다. 김용택의 시 한 구절을 빌리면, "봉준이 키보다 낮게 엎드린 산('눈 내리는 김제만경' 일부)" 이다. 아무렴 광활한 바다를 경배하는 자세가 키를 바짝 세워 뻣뻣해야 쓰것는가.

망해사로 들어가는 길가엔 수령 2,30년가량 돼 보이는 소나무가 적당한 간격으로 들어차 있다. 해풍을 맞고 자란 소나무치고는 꽤 풍치가 의젓하다. 얼마 걷지 않아 바다를 안은 천 년 고찰 망해사가 슬그머니 모습을 드러낸다.

전각이라야 대웅전과 낙서전, 대웅전 뒤쪽 높은 곳에 지어진 삼성각과 범종각이 전부인 조촐한 절집이다. 그러나 망해사를 장엄하고 있는 건 광대무변한 서해바다이다. 어찌 울긋불긋한 단청이나 화려한 공포 따위에 비기겠는가.

망해사는 백제 의자왕 2년(642)에 부설거사가 창건했다고 전해진다. 불가에는 전설적인 세 거사가 이름이 전해진다. "중생이 앓고 있으므로 나도 앓는다"라는 대승 선언으로 잘 알려진 유마힐 거사, 전 재산을 바다에 던져버리고 대바구니를 짜 생계를 유지하면서도 당대의 내로라 하는 선사들을 통쾌하게 꺾어버린 선의 방온 방거사, 결혼해서 아들과 딸까지 두었지만 그 가족과 더불어 도통했다는 부설 거사가 바로 그들이다.

그러나 망해사가 본격적인 가람의 모습을 갖추기 시작한 것은 조선 중기 불교의 거목이었던 진묵대사에 이르러서였다고 한다.

절 입구에 자리잡은 요사채 청조헌. 청조헌이란 '파도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이다.
 절 입구에 자리잡은 요사채 청조헌. 청조헌이란 '파도 소리를 듣는 집'이란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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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낙서전(전북 문화재자료  제128호).
 낙서전(전북 문화재자료 제128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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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천히 망해사의 전각을 둘러본다.  이 조촐한 절집에서 가장 고풍스런 전각은 서해바다를 즐긴다는 의미를 지닌 낙서전이다. 이 낙서전은 진묵대사가 지은 것이라고 전해진다.

팔작지붕을 한 ㄱ자형 평면을 지닌 건물이다. 건물 오른쪽에는 방과 부엌이 딸려 있어 법당 겸 요사로 사용하던 건물이라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1986년에 해체 복원하였다고 하는데 다행히 고풍스러운 맛을 잃지 않았다.

낙서전 앞에는 두 그루의 팽나무가 버티고 있다. 조선 선조 때 진묵대사가 낙서전을 창건한 것과 그 역사를 같이한다고 하니, 수령 400년 이상이 된 늙은 나무이다. 큰 나무는 할배나무, 조금 작은 나무는 할매나무라고 부르는 나무다.

할배 팽나무는 한쪽으로 크게 기울어져 있다. 온몸으로 바닷바람을 견디느라 힘들었나 보다. 세월을 견디느라 용을 쓴 흔적이 몸에 가득하다. 팽나무는 느릅나무과의 낙엽교목이다. 어릴 적 배고플 때 팽나무 열매를 따 먹은 적이 있는데 맛이 약간 떱떠름했던 기억이 있다. 

낙서전 뒤쪽으론 시누대숲이 우거져 있다. 불어오는 바닷바람에 스르륵스르륵 몸을 뒤챈다. 해거름에 낙서전 마루에 서서 떨어지는 해를 바라보노라면 제행무상이 절로 느껴지리라.

이 세상에 바다보다 더 깊고 넓은 경전은 없다

낙서전 쪽에서 바라본 범종각. 왼쪽의 나무는 낙서전 앞을 지키는 전북도 기념물  제114호 팽나무이다.
 낙서전 쪽에서 바라본 범종각. 왼쪽의 나무는 낙서전 앞을 지키는 전북도 기념물 제114호 팽나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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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 끝에서 바라본 풍경. 건너편은 군산시 대야면이다.
 마당 끝에서 바라본 풍경. 건너편은 군산시 대야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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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당가에는 범종각이 홀로 걸터 앉아있다. 1989년에 건물을 지어 낙서전 마루에 걸려 있던 범종을 이곳으로 옮겨 왔다고 한다. 범종에는 상원사 동종의 것을 빼다 박은 듯한 비천상이 새겨져 있다. 언젠가 해거름에 이곳에 다시 와서 바람을 타고 바다로 밀려가는 종소리를 들으리라.

망해사의 오전은 적막하다. 망해사는 서해바다의 무릎을 베고 잠들고, 서해바다는 그런 망해사의 가슴에 기대어 깊이 잠들어 있다. 절 마당가로 다가가서 서해바다를 내려다본다. 바다가 발밑까지 바짝 다가오더니 짭조름한 소금기 풍기는 입을 열어 가만히 말을 건다. "내가 보고 싶어 왔느냐"고, "내 진면목을 보고 싶으면 한 없이 더 낮아져야 한다"고 말한다.

그렇구나. 바다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큰 대장경이구나. 세상 어느 경전도 바다보다 더 많은 가르침을 품은 경전은 없다. 때때로 바다를 바라볼 때면 살아온 날들을 크게 뉘우치고 싶다는 생각이 드는 건 그 때문인지도 모른다.

마침내 오랜 응시 끝에 서해바다로부터 시 한 편을 건져올린다. 시란 마음이 길을 잃었을 때 꺼내보는 지도 같은 것이다.

심포에는 바다에 몸을 던지려다가
문득, 머리를 깎은 뒤
제 스스로 절이 된 망해사가 있다
시퍼렇게 깎은 머리를 한 채
벼랑 끝에 가부좌 틀고 앉아 수행하는
망해사 낙서전이 있다

망해의 생살을 밀고 나온
검붉은 사리 하나 서해로 떨어진다
닮아진 염주처럼 떠 있던 고군산열도,
바닷물 붉게 그 사리를 닦는다

잘 씻겨진 보름달이 젖은 채로
곧 올려질 것이다 - 박성우 시 '망해사' 전문

황혼이 아니라서 그럴까. 시를 읽어도 좀처럼 마음의 지도가 선명해지지 않는다. 오후부터 서해안 쪽으로 눈발이 날릴 거라는 기상대의 예보가 아니었다면 오후 늦은 시각에 도착했을 것이다. 망해사로 오는 사람들이 가슴에 품고 오는 화두는 서해바다로 떨어지는 일몰이다. 그 화두를 타파하지 못한 채 중도에 떠난다는 건 얼마나 안타까운 일인가. 부탁하노니 망해사야, 내가 화두를 뚫지 못하고 그냥 갔다는 말은 아무에게도 말하지 않기 바란다.

삶의 막막함이 사무치는 날에 다시 오리라

망해사를 나서 진봉산 꼭대기 낙조대를 향해 올라간다. 절 입구에 있는 부도밭에 잠시 들린다. 망해사의 중흥조인 진묵대사(1562~1633)는 이곳에서 멀지 않은 만경 불거촌에서 태어났다.

절 입구에 있는 부도밭.
 절 입구에 있는 부도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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술을 잘 마셨으며 신통력을 지녀 많은 이적을 행하였다고 한다. 물고기를 먹고 나서 팔딱팔딱 살아숨쉬는 물고기들을 도로 배설해냈다는 이야기는 그가 얼마나 무장무애한 스님이었는지 알게 해 준다.

"나 간다/ 하고 길가에서 앉아 세상을 마치셨다/ 사명은 나라와 놀고 진묵은 마을과 놀았다(고은 시 '진묵' 일부)"라고 고은 시인은 진묵 선사의 삶을 평한다.

사명대사가 1544년에 태어나 1610년에 입적했으니 두 사람은 거의 동시대를 산 셈이다. 그러나 수행의 길이 천양지차였다. 사명대사는 직접 승병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여했지만 진묵대사는 선 수행에 진력했던 것이다.

진묵대사의 선풍은 끊어지지 않은 채 이곳에서 대대로 이어졌던 모양이다. 망해사의 규모치고는 꽤 많은 축에 속하는 4기의 부도가 그걸 말해준다. 진묵대사부도는 그가 여섯 살 적 맨 처음 입산했던 완주 봉서사에 있다.
                                                                                                                                     부부도들은 하나같이 소박하다. 부도의 주인공을 알려고 이름을 쓰는 제액 부분을 찬찬히 들여다본다. 세월을 먹은 글씨가 희미하다.  겨우 만화탑, 심월당, 호심당, 덕유당 등의 이름을 읽어낸다.

진봉산을 한참 걸어 내려가 심포항 쪽에서 망해사 쪽을 바라본다. 망해사는 쓸쓸함을 감출 수 없는 바닷가 한 켠에서 여전히 묵조선 중이다. 생각해보니 망해사는 내면이 견딜 수 없이 쓸쓸한 사람들이 찾는 절집 같다. 막막함으로써 막막함을 치유하는 그런 곳. 그러니 삶의 막막함이 사무치면 언제고 망해사에 다시 오리라.

덧붙이는 글 | 설 다음 날(2월 8일)에 다녀왔습니다.



태그:#김제, #망해사 , #낙서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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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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