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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빛 환한 지난 토요일(5일), 동래 읍성을 찾았다. 신화에서 성은 국조나 영웅의 절대적 능력과 신성함의 표상이다. 하지만 우리의 경우 대개 외적의 침입을 막기 위해 쌓은 시설이고, 동래 옛읍성 또한 나라를 지키기 위한 호국의 의지가 서려있는 성지다.

왜구의 노략을 방어하기 위한 성이다
▲ 옛 동래읍성은 왜구의 노략을 방어하기 위한 성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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왜구를 막기 위한 동래읍성

성은 위엄과 권위를 상징하고, 이 성을 지키는 것은 나라를 지키는 일과 같다. 동래 읍성은 고려 현종 12년(1021)에 왜구의 노략을 방어하기 위하여, 현재의 부산지방 병무청을 중심으로 수영구 망미동 일대에 고쳐 쌓았던 성이다. 동래는 기원전 1세기, 삼한시대 독로국(또는 장산국, 거칠산국)으로 건국되어, 신라시대 경덕왕 16년 동래군이 되었다.

최초의 격전지이자, 패전지이지만, 유서 깊은 성으로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 임진왜란 당시 최초의 격전지이자, 패전지이지만, 유서 깊은 성으로 부분적으로 복원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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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31년 축성한 동래읍성의 둘레는 17,291척(약 3.8Km), 높이는 17척(약 5.1m)이다. 읍성 안에는 우물 10개와 못이 있었고, 자연 지형을 효과적으로 이용한 타원형에 가까운 형태의 평산성이며, 북쪽과 동쪽은 산으로 둘러 싸여 있고 남쪽과 서쪽은 열려 있다. 정면인 남문이 가장 중요한 출입문이다. 남문을 비롯해서 서문, 암문, 북문, 인생문, 동문의 6개가 있었다.

각 문에는 문루가 있었는데, 동문에는 지희루, 서문에는 심성루, 남문에는 무우루, 암문에는 은일루가 있었다. 또 중요한 문루였던 남문에는 익성을 두고, 문은 앞의 세병문과 뒤의 주조문이 있는 이중 구조로 되어 있었다. 서문·동문·북문 등 다른 문에는 성문 보호를 위해 옹성을 부설하였고 장대, 망루 및 15개소의 보루를 갖추고 있었다.

동래읍성의 축성법을 엿볼 수 있다.
▲ 조선전기 동래읍성의 축성법을 엿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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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의 눈물이 얼룩진 역사의 생생한 현장

동래읍성은 '동장대'가 있는 충렬사 뒷산에서 마안산을 거쳐, 서장대가 있는 동래향교 뒷산까지의 구릉지와 현재 동래 시가지 중심지역인 평지를 일부 포함하는 지세에 전형적인 평산성 형식으로 축조되어 산성과 평지성의 장점을 두루 갖춘 대표적인 성이다. 고려 말 우왕 13년(1387)에 수축된 것으로 보이는, 동래읍성은 1592년 임진왜란 때 동래부사 송상현 공을 위시한 모든 군관민이 혼연일체가 되어 장렬한 전투를 벌였던 임란초기의 최대 격전지이다.

이후 부분 보수된 성을 1731년(영조 7) 정언섭 동래부사가 조선의 관문의 중요성을 감안하여 훨씬 규모를 크게 고쳐 쌓았는데, 이 성이 현재 흔적으로 남아있는 읍성의 기원이다. 일제 때 '시가지계획'이라는 명목으로 서문에서 남문에 이르는 평지의 성벽은 철거되었다. 부산시에서는 이를 보수·복원할 계획이며 문화유적지를 원위치대로 보존해 교육적 자료로 활용하고 있다.

많은 부분이 철거되기도 했다.
▲ 일제강점기를 거치면서 많은 부분이 철거되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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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워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 어렵다"

옛부터 전쟁에 지면, 성은 함락되는데, 입성한 적은 제일 먼저 성벽을 무너뜨린다. 임진왜란 때의 송상현 동래부사는 왜구가 밀어닥치면서 커다란 나무판에 "싸우고 싶으면 싸우고 싸우고 싶지 않으면 길을 빌려달라"는 글을 써서 세우자, "싸워 죽기는 쉬워도, 길을 빌려주기는 어렵다"고 나무판에 써서 적에게 던지고 대항하여 끝까지 싸웠다. 이후 군사의 수가 턱없이 적어 성이 함락당하자, 관복으로 갈아입고 임금이 계시는 북쪽을 향해 절한 후 단정히 끓어 앉아 죽임을 당하였다고 전해진다.

역사 속으로
▲ 천년의 역사 속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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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박물관
▲ 동래읍성 역사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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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전기 동래읍성의 모습을 상세히 그린 '동래부순절도'는 현재 육군박물관에서 소장하고 있다. 이 그림에는 당시 조선군과 왜군의 치열했던 교전 상황이 상세하게 묘사되어 있다. 동래 옛읍성은 일제 강점기 등을 거치면서 많은 부분 철거되었다. 이후 동쪽부터 북쪽의 산등성이에 이르는, 성의 일부분이 원형 그대로 남아 전해 오다가, 1979년부터 복원되었다.

1731년(영조 7) 증축 이전 조선전기 때 읍성의 둘레는 3090척(약 657m), 높이는 13척(약 3.9m)이었다. 현재는 그 당시 읍성 규모의 약 1/6에 해당된다고 한다. 조선전기엔 기초 다짐석과 같은 크기의 돌을 3~4단 정도 허튼 쌓기를 하였는데 반해, 조선후기엔 가공기술의 발달로 수직에 가깝게 쌓았다. 산지쪽의 성은 바깥쪽만 돌로 쌓고, 안쪽은 지형에 따라 흙을 조금 파내고 잡석이나 판축 흙다짐으로 채워 놓았다.

주변 마을
▲ 동래읍성 주변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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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밟기는 성을 보수하기 위해 시작 되다

성터 성밟기는 성을 보수하기 위해 시작된 것이 민속신앙으로 전이 되었다고 한다. 그 옛날 부녀자들은 각자 목침덩이만한 돌을 하나씩 이고 성의 왼쪽에서 출발해서 한 바퀴 돌면 다리병이 낫고, 두 바퀴 돌면 무병장수 하며 세 바퀴 돌면 죽었을 때 저승길이 환히 트여 극락 세계에 갈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국가 기원과 개인적인 축원의 '성밟기'를 하던, 그 옛날 부녀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옛 동래 읍성을 빙빙 돌다보니, 해는 어느새 서산에 걸려 있다. 동래 읍성 역사관, 관람 시간은 오전 9시부터 오후 6시까지며 관람료는 무료다. 매주 월요일 (월요일이 공휴일인 경우 그 다음날)휴관한다.

사람은 가고
성터는 남아
무상함이 이리도 새삼스럽다
무너진 성돌 위에 푸른 이끼
세월이 남기고 간 슬픈 얘기여,

'접동새'-'황금찬'

덧붙이는 글 | 동래읍성 역사관 소재지는 부산 동래구 복천동 1-28번지이며, 동래지하철 역 혹은 명륜동 역에서 하차하여, 복산동 동사무소 곁이나 동래문화회관 등을 찾으면 쉽다.



태그:#동래읍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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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곧 인간이다고 한다. 지식은 곧 마음이라고 한다. 인간의 모두는 이러한 마음에 따라 그 지성이 나타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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