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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를 멜 사람만 없는 게 아니라 꽃상여 앞에서 선소리를 넣어 줄 요령잡이도 없는 게 우리네 고향의 현실입니다.
 상여를 멜 사람만 없는 게 아니라 꽃상여 앞에서 선소리를 넣어 줄 요령잡이도 없는 게 우리네 고향의 현실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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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노란색 삼베건을 쓰고, 바짓가랑이에 행전을 찬 복인의 입장이었지만, 이승을 떠나는 형수님을 모신 상여를 벙어리 꽃상여로 만들 수는 없기에 시동생인 제가 요령잡이를 하였습니다. 

복인의 입장인 시동생이 요령잡이를 한다는 게 흔한 일은 아니지만 마지막 길을 가고 있는 형수님을 벙어리 꽃상여로 모실 수는 없기에, 딸랑딸랑 요령 흔들어가며 알록달록한 종이 꽃 나풀거리는 꽃상여 앞에서 진혼가를 불러 줄 선소리꾼이 될 수밖에 없었습니다.

복인이 요령잡이를 해야 하는 현실

농사일을 하며 일상생활을 하기엔 크게 문제가 없었던 형수님이 졸지에 돌아가셨습니다.
 농사일을 하며 일상생활을 하기엔 크게 문제가 없었던 형수님이 졸지에 돌아가셨습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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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여를 멜 상두꾼이 모자라고 선소리 한 마디 넣어줄 요령잡이조차 없는 게 우리네 농촌의 현실이다 보니 고향마을도 예외일 수는 없었습니다. 울컥하는 감정이 목구멍까지 치솟아 목소리는 갈라지고 리듬 역시 깨질 수밖에 없었지만 이렁저렁 발을 맞추고 저렁저렁 후렴에 맞추며 요령잡이 노릇을 하였습니다.
영가 된 이 살아생전, 어~허~어~허

천년만년 살 거라고, 어~허~어~허
먹고픈 것 아니 먹고, 어~허~어~허
입고픈 것 아니 입고, 어~허~어~허
가고픈 곳 아니 가고, 어~허~어~허
쓰고픈 것 아니 쓰고, 어~허~어~허
동전 한 닢 아껴가며, 어~허~어~허
아등바등 살았건만, 어~허~어~허
인생이란 일장춘몽, 어~허~어~허
공수래에 공수거라, 어~허~어~허
잘있거라 잘있거라, 어~허~어~허
고향마을 정든 산천, 어~허~어~허
너희들은 유구한데, 어~허~어~허
이내일신 떠나간다, 어~허~어~허
잘있어요 잘있어요, 어~허~어~허
일가친척 이웃사촌, 어~허~어~허

꽃상여 주변에 모여든 사람들에게 사별의 인사를 나누다 보니 목구멍까지 치솟았던 감정이 꺼이꺼이 하는 울음으로 바뀝니다. 눈물 밥, 눈물 뚝뚝 흘리며 숟가락질을 하듯 설운감정으로 요령을 흔들고 애달픈 마음으로 선소리를 하였습니다.


영가 된 이 살아생전, 어~허~어~허

한평생을 살다보니, 어~허~어~허
죄 없다고 말 못하니, 어~허~어~허
싸웠던 일 있었걸랑, 어~허~어~허
미워 한일 있었걸랑, 어~허~어~허
한 맺힌 일 있었걸랑, 어~허~어~허
원 갖은 일 있었걸랑, 어~허~어~허
오뉴월에 봄눈 녹듯, 어~허~어~허
아침이슬 사라지듯, 어~허~어~허
모두모두 잊어주오, 어~허~어~허

이승에서 맺은 인연, 어~허~어~허
저승 갈 때 짐 되나니, 어~허~어~허
이런 인연 저런 인연, 어~허~어~허
모두모두 잊어주고, 어~허~어~허
명복만을 빌어주오, 어~허~어~허

어머니 같던 내 형수님, 일주일 만에 가시다니

마흔번째로 맞이하는 아버님 제삿날인데도 극성스럽다 할 만큼 적극적인 둘째 형수님이 보이질 않았습니다. 제사 음식을 준비하려 도착해 보면 이미 송편을 빚고 있던 형수님이었지만 이번에는 보이지 않았습니다.

전화벨이 울려서 받으니 형수님이 "서방님! 나 아파서 병원 갔다와서 오늘은 못 내려갈 것 같어" 합니다. 웬일이지 하며 고개를 갸우뚱거리다 해답을 찾았습니다. 극성스러울 정도로 적극적이던 형수님이 제사를 지내러 내려오지 못할 만큼 아프다는 것이었습니다.

형수님이라고는 하지만 조카가 저와 동갑인지라, 저에겐 어머니와 같은 형수님입니다. 중학교 때, 충주로 이사를 했지만 학기가 끝나지 않아 형님 댁에서 학교를 다녀야 했을 때는  도시락을 챙겨주고 옷 빨래를 해주며 돌봐주기도 하셨습니다.

지병이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농사를 짓고 일상생활을 하기엔 크게 지장이 없어 보이던 형수님이 그렇게 아프다고 하시더니 일주일 만에 돌아가셨습니다.

입원을 하였다는 연락을 받고 조카에게 전화를 하니 20일에서 한 달쯤의 시한부 생명이라고 합니다. 20일에서 한 달쯤이라던 형수님의 시한이 다음날에 자명종을 울렸습니다. 위독하다는 연락을 받고 부랴부랴 찾아가니 이미 말씀을 못하실 만큼 중증입니다.

경황이 없을 정도로 갑작스런 일이다 보니 모두가 말을 잊은 황망한 상황입니다. 길어야 이틀 정도 이어질 수 있는 생명이라기에 운명을 달리하기 전에 생시의 모습이나 보게 해드리려고 아무 것도 모르고 계시는 어머니를 모시러 대전 집엘 갔더니 그새 숨을 거뒀다는 연락이 왔습니다.

자식들과 일가친척에 대한 사랑이 끔찍이도 깊었던 형수님이었기에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실이 더 서글픕니다.
 자식들과 일가친척에 대한 사랑이 끔찍이도 깊었던 형수님이었기에 말 한마디 남기지 못하고 눈을 감았다 사실이 더 서글픕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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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상생활에 크게 지장이 없을 정도의 건강이 20일에서 한 달쯤의 시한부로, 한 달쯤의 시한부에서 내일 모레로 바뀌는 촉박한 생명이 되더니, 하루이틀마저도 다하질 못하고 서너 시간을 넘기지 못하는 애달픈 운명이 된 것입니다.

어머니는 둘째 며느리가 위독해 병원엘 가봐야 한다는 이야길 듣고 너무나 갑작스런 소식에 밥맛이 없다며 점심도 먹지 않은 채 주섬주섬 옷가지를 챙겨 입다 둘째며느리가 임종을 했다는 소식을 전하니 "나 같은 늙은이가 갈 거지 젊은 애가 왜 먼저 가" 하며 통곡을 합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로 만나 50년이란 세월을 함께 살아왔으니 고부간의 갈등이 전혀 없지는 않았겠지만 그만한 세월을 함께한 식구, 자식을 먼저 보내야 하는 노모의 한과 설움이 통곡으로 나왔을 겁니다. 

그래도 지켜지고 있는 고향마을 풍습

고향마을의 장례풍습도 2년여 전부터 달라지기 시작했습니다. 모자라면 모자라는 대로 넉넉하면 넉넉한 대로 집안에서 마을사람들과 더불어 치르던 장사였지만, 2년여 전 한 집에서 장례식장을 이용하더니, 장례식장을 이용하는 장례로 자연스레 바뀌어가고 있습니다.

현실이 그렇다보니 형수님도 장례식장으로 모셨습니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집에서 치렀어야 할 장례가 장례식장을 이용한 장례로 바뀌었지만 그래도 지켜지는 풍습은 있었습니다.

요즘 장례식장에서 웬만해서는 듣기 어려운 소리, 아연실색할 정도로 경황이 없는 상황이었지만 어머니를 기리는 조카(상주)들의 마음은 장례기간 내내 '애고애고' 하는 곡소리로 이어졌습니다.

건을 쓰고 행전을 찬 시동생 복인이었지만 형수님을 모신 꽃상여 앞에서 딸랑딸랑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넣어야 했습니다. 사진은 진천 농다리 축제 광경임.
 건을 쓰고 행전을 찬 시동생 복인이었지만 형수님을 모신 꽃상여 앞에서 딸랑딸랑 요령을 흔들며 선소리를 넣어야 했습니다. 사진은 진천 농다리 축제 광경임.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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졸지에 지어미를 잃게 된 형님, 유달리 금실이 좋았던 형님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장례기간 내내 눈물뿐입니다.
의지할 곳을 잃은 듯 장례식장 주변을 빙빙 겉돌고 있을 때도, 영정 앞에 술잔을 올릴 때도, 조문객들을 만나 인사를 나눌 때도 형님의 두 눈은 그렁그렁한 눈물입니다.

운구차가 도착하기도 전에 고향마을 입구에 사람들이 모였습니다. 운구차로 내달을 수도 있는 널찍한 길이었지만 꽃상여가 마을입구에 준비되어 있고, 마중인지 배웅인지를 나온 사람들이 무리를 지어 모였습니다.

비록 가정에서의 장사가 장례식장의 장사로 바뀌었지만 아직도 고향에서는 꽃상여를 이용한 운구만은 반드시 치러집니다.

영가 된 이가 마지막 가는 길(발인 8월15일), 조금이라도 호사롭게 보내며 명복을 비는 마음을 전하려는 듯 장지가 지척일지라도 꽃상여 운구만을 꼭하고 있는 게 고향마을의 풍습입니다.

여기저기서 늙수그레한 할머니들이 훌쩍훌쩍 울고 있습니다. 한 동네로 시집을 와 새댁시절과 중년시절을 보내며 동무가 되었고, 함께 늙어간 마을 할머니들이 이웃친구를 잃은 슬픔과 사별의 정을 눈물로 나누는 시간입니다.

유언 아닌 유언, 그래도 제대로 해보고 싶었데 

마을 입구가 빼곡하도록 많은 사람들이 모인 가운데 조문도 받고, 사별의 정을 건네는 동안 꽃상여는 꾸며졌지만 요령잡이가 없었습니다. 논산에서 왔다는 형수님의 이질이 해볼 거라며 요령을 잡았지만 지방에 따라 제각각 다른 게 요령소리다 보니 상여를 메고 후렴을 넣어야 할 상두꾼들과 호흡이 맞질 않아 출발조차 하질 못하고 있었습니다.

몇년 전부터 고향마을에서 꽃상여를 꾸며야할 일이 있으면 제가 요령잡이를 하고 있습니다. 이전에도 몇 번 그런 이야길 했었지만 100여일 전인 5월 10일에도 요령잡이를 마치고 나무그늘에 앉아 있으니 형수님이 다가와 '나도 나중에 서방님이 요령잡이 해줘'하고 유언 아닌 유언을 했던 게 현실로 된 것입니다.

형수님 생전에 타박타박 걸어 다니던 길이었기에 벙어리 꽃상여로 모실 수는 없어 건을 쓰고 행전을 찬 시동생 복인이었지만 요령을 잡고 딸랑딸랑 흔들었습니다. 이왕 할 거 형수님이 들었던 그런 목소리로 일가친척 뿐 아니라 동네 사람들까지 찔끔찔끔 눈물 흘리도록 구성지게 해볼 거라고 생각했지만 가슴을 치고 올라오는 감정에 목소리가 짓눌리고 말았습니다.

안 나오는 목소리로 겨우겨우 하는 선소리니 듣는 사람들에겐 별로였겠지만 영가일지언정 당신과의 사별을 애달파하는 시동생의 마음, 목 메일 수밖에 없는 시동생의 마음을 형수님께서는 아실 거라고 생각하며 흐느낌 같은 마음으로 요령을 흔들고 곡소리 같은 마음으로 선소리를 넣었습니다. 

당신이 훌쩍 40년을 넘기며 살던 집에 들려 노제를 지내고, 알록달록한 종이꽃이가 나풀거리는 꽃상여를 탄 형수님은 시동생이 흔드는 요령소리에 발맞추고, 시동생이 토해내는 진혼곡 같은 선소리를 들으며 지수화풍으로 환원할 음택 떼집으로 모셨습니다.

남들이 보기엔 그냥 쿵쾅거리며 흙을 다지는 의식일 뿐이겠지만 천리를 흘러 온 천기와 지기가 형수님의 유택으로 이어지길 기원하는 달기호(達氣號)에서 형수님의 생전과 저승에서의 명복, 남은 사람들에게 들려주고 싶은 이야기를 선소리로 그렸습니다.

봉분이 완성되니 울음을 참고 있던 아이처럼 꾹꾹 참아주던 하늘에서 장대비가 쏟아집니다. 흐르는 빗방울을 하염없이 바라보는 형님의 두 눈에서도 장대비에 버금가는 눈물이 주루룩하고 떨어집니다. 

칠순을 넘긴 나이에 홀로 살아야 하는 지아비의 설음과 그런 홀아버지의 삶을 지켜보아야 하는 조카들의 마음이 그렁그렁한 눈물로 이어집니다. 생겼다 흩어지는 뜬구름처럼 사라지는 게 인생임을 알지만 눈물로 맞아야 하는 현실이 덧없고 애달플 뿐입니다.

유달리 금실이 좋았던 형님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장례기간 내내 눈물뿐입니다.
 유달리 금실이 좋았던 형님은 의사로부터 가망이 없다는 소식을 듣는 순간부터 장례기간 내내 눈물뿐입니다.
ⓒ 임윤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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덧붙이는 글 | 형수님! 다하지 못한 천수, 명복으로 대신하소서.



태그:#요령잡이, #진혼곡, #선소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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