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저희는 오늘 사형대에 오릅니다. 그동안 언제 잘릴까 두려워하며 시키는 대로 다했는데… 여기 있는 사람 중 얼마 안 있으면 태어날 아기가 있는 사람도 있고, 곧 돌이 되는 아이를 가진 아빠도 있습니다. 신부님, 나와주세요. 우리와 대화해 주세요."

 

"오늘 밤부터 당장 두렵습니다. 저희들 원래부터 목소리가 컸던 사람들이 아닙니다. 지금도 많이 창피합니다. 그래도 어쩔 수가 없었습니다. 지금 여기 계신 환자분들, 보호자분들, 기자분들 다 간 밤이 되면 저희들 용역직원한테 끌려 나갈지 모릅니다. 지켜주세요. 무섭습니다."

 

30일 낮 12시 서울 서초구 반포동 강남성모병원 1층 로비 안. 강남성모병원 비정규직 노동자 11명이 한 명씩 돌아가며 목청을 높였다. 간간이 울음을 터뜨리는 이도 있었다. 길게는 5년에서 짧게는 1년 6개월까지 일했던 간호보조원 28명은 이날 계약이 해지됐다.

 

지난 2002년부터 강남성모병원은 정규직이 담당하던 간호보조업무에 비정규직을 '직접고용'하는 식으로 바꿨다. 이후 2006년에는 직접 고용한 비정규직을 파견업체로 넘겼다. 그리고 2008년 '2년 이상 근무한 파견직에 대해 정규직화'가 명시된 현행 근로자파견법을 들며 "법 때문에 2년 되어서 해고할 수밖에 없다"며 '간접고용' 비정규직 노동자들에게 해고를 통보했다. 

 

기륭전자, KTX, 이랜드, 코스콤 노동자들에게 벌어졌던 일들이 고스란히 재현된 것이다.

 

"시험이 내일인데 엄마가 밥 못해줘서 미안해"

 

지난 2006년 2월부터 병원에서 일했던 박정화(45)씨는 올해 고3, 고1인 아이들 이야기를 꺼내자마자 눈물을 흘렸다. 잠시 말을 잇지 못하던 박씨는 "딸이 내일부터 중간고사고, 아들 수능시험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엄마가 밥도 못 지어주고 있다"며 "(아이들에게)엄마가 너무 미안하지만, 이 상황이 잘못된 것이니깐 이해해 달라고 말한다"고 했다. 

 

박씨가 병원에서 일한 기간은 2년 7개월. 병원은 2년이 넘게 일한 그에게 계약해지 통보와 함께 파견직으로 전환된 2년 치의 퇴직금만을 안겼다. 직접고용 비정규직으로 일했던 7개월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졌다.

 

"정규직이랑 비정규직이랑 똑같은 일을 했다. 그런데 법에 따라 2년이 지나면 정규직화를 해줘야 하니깐 잘라버린 거다. 소문이 돌면서 병원 측에 '계속 일하게 해달라'고 호소했다. 하지만 병원은 '헛된 희망을 가지게 할 수 없다, 병원은 (정규직화) 계획 없으니 나가라'고 말했다."

 

병원 측의 의사를 확인한 박씨와 동료들이 직원 식당 앞에서 선전전을 진행했지만 병원의 태도는 변하지 않았다. 강남성모병원은 지난 2002년 정규직 노조가 노사교섭을 요구하며 217일 동안 파업을 하는 동안에도 꿈쩍 않던 '강적'이다. 박씨와 동료들은 결국 추석 연휴가 끝난 지난 17일 행정동 앞에 천막을 치고 농성에 들어갔다.

 

그러나 천막농성에 들어간 후 세 번이나 용역직원들이 들이닥쳐 천막을 철거했다. 선전전에 쓰던 피켓과 선전물도 뺏겼다. 천막은 다시 세워졌지만 계약이 해지된 날 이후부턴 용역직원이 아닌 경찰 병력이 그들을 끌어낼지도 모른다.

 

박씨는 불안감을 감추지 않았다. 그러나 "나 혼자 이 자리를 피하려고 하니 평생 양심의 가책을 느껴 살아갈 자신이 없다"며 투쟁을 계속하겠다는 의지를 내비쳤다.

 

"파견업체들, 비정규직 노조 탈퇴 종용하고 부당전직까지 시켰다"

 

홍희자(34)씨는 "파견업체가 병원 측에 잘 보이기 위해 노조 가입도 못하게 막는다"고 주장했다. 현재 강남성모병원에서 간호보조업무를 하는 파견직 노동자는 총 65명이지만 모두가 노조에 가입한 것도, 투쟁에 동참하는 것도 아니다. 파견업체가 노조 가입여부를 물으며 탈퇴하지 않으면 계약을 해지할 수밖에 없다고 으름장을 놓아 노조에서 탈퇴한 이들도 있다.

 

홍씨 역시 투쟁에 앞장 서다 불이익을 당한 경우다. 그를 병원에 파견한 파견업체 '메디엔젤'은 홍씨를 포함한 조합원 5명에게 지난 19일 메디엔젤 본사 발령을 통보했다. 천막농성을 가장 열심히 했던 조합원들이었다. 병원도 아닌 '본사'에서 홍씨가 할 수 있는 일은 없다. 병원에 항의를 하니, "업체(메디엔젤)에 도와달라고 했을 뿐이다, 우리가 본사 발령을 내달라고 메디엔젤에 요청한 적은 한 적은 없다"라는 변명이 돌아왔다. 사실상 자신들의 요청을 시인한 셈이다.

 

"9월 초에 병원장과의 면담을 요구하면서 연좌시위를 했다. 그러자 파견업체 간부들이 와서 '자꾸 이런 식으로 하면 당신네들 여기 아닌 다른 곳으로 발령 내겠다'고 협박했다. 그 때는 우리가 '부당 전직'이라고 항의하니깐 사과했는데 (우리가) 계속 투쟁하니깐 일을 저지른 것이다."

 

홍씨 등 본사로 발령난 5명은 현재 부당 전직에 항의하는 의미로 출근투쟁을 하고 있다. 하지만 그것도 계약해지 날짜인 이날 이후부터는 제대로 될 수 있을지 미지수다. 병원은 민주노총, 가톨릭대 대중운동네트워크, 새사회연대, 천주교인권위원회 등 105개 시민사회단체들의 면담요청에도 답을 하지 않고 있다.

 

홍씨는 천막농성 시작 후 저녁마다 촛불을 들고 찾아오는 이들에게 희망을 걸고 있었다.

 

"비정규직 문제는 이미 전 사회적인 문제다. 기독교 기업 이랜드그룹도 있었지만, 가톨릭 병원에서 이런 일이 벌어지고 있다는 것도 사람들이 많이 분노하고 있다. 더 많은 분들이 도와주시리라 본다."

 


태그:#비정규직, #근로자파견법, #강남성모병원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