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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히틀러의 연인 에바 브라운이 찍은 히틀러의 모습을 방영하는 다큐 프로그램을 잠깐 보았다. 인종 전쟁과 흉포를 일삼던 히틀러에 대한 애정과 존경이 고스란히 묻어나는 카메라 앵글. 비디오 속 에바 브라운도 자유분방하고 호탕해 보인다. 좀처럼 자신을 받아주지 않는 히틀러 때문에 2번이나 자살을 시도했다는데, 그 위로의 선물로 히틀러가 개를 보내주었단다.

 

개를 껴안고 언제 죽음을 생각했냐는 듯 세상 누구보다 기쁜 표정으로, 파티를 즐기고 주변을 챙겼던 그녀. 자신들이 유대인이 아님을 감사해했다는 멘트 뒤로, 나치 고위층의 자녀인 사내 아이가 눈덩이를 가지고 노는 장면이 이어진다. 잔인한 전쟁의 한복판에서 최상의 평화를 누릴 수 있는 모순. 그러므로 삶은 때때로 비정하다. 

 

    에바 브라운은 히틀러의 정치도, 야심도, 사상도 잘 몰랐다고 한다. 그녀는 오직 히틀러에게 구애하고, 히틀러를 존경했으며, 히틀러를 사랑했다고. 히틀러 자살의 순간에도 그녀는 아내로서 죽음을 함께 맞이했다.  히틀러의 실상에 대해 아무 것도 모르고, 알고  싶어 하지도 않았던 에바 브라운. 문득 그 지독스러운 무지와 맹목이 부러워졌다. 아무 생각 없이 마냥 천진하게 웃고 떠들며 연인 대신 개를 안고도 좋아 날뛸 수 있다면….

 

전쟁 속의 그녀는 보이지 않아 즐거워 했는데, 평화로운 날,  나는 눈이 밝아져, 바스스 기뻐할 수가 없다.

 

    며칠 전 한 아이가 상담을 하고 싶다며 찾아왔다. 1학년 때 친구 관계가 원만하지 않아 고생하던 아이였는데, 2학년이 되어서는 그럭저럭 잘 지내 보였다. 눈물 바람이던 1학년 때와는 달리 2학년이 되고는 보건실에 찾아오는 표정이 밝아져 내심 다행이다 싶은 아이였다.

 

    야간 자기 주도 학습 시작하기 전 저녁 시간에 잠깐 상담을 했는데, 첫 마디도 못 하고 눈물을 왈칵 쏟는다. 당황하는 내 기색을 눈치 채지 못했는지, 띄엄띄엄 말을 이어나가기 시작했다. 요즘 들어 공부에 집중이 안 된다는 것이다. 오랫동안 병석에 누워계신 아버지. 아버지를 대신해 가장이 되신 어머니는 하루 종일 일하시느라, 퉁퉁 부은 다리의 붓기가 빠질 때가 없단다. 지금 형편으로는 대학을 가는 것보다는 빨리 취업해서 뭐든 집에 보탬이 되고 싶은데, 무능한 자기가 도대체 뭘 할 수 있느냐는 것이다.

 

    대학 나와도 취업이 안 된다는 뉴스를 들으니 불안해지기만 하고, 어머니는 어떻게 해서든 대학은 보내주시겠다고 하지만, 취업이 잘 된다는 학과에 척척 붙을 만큼 실력도 안 되니 더 괴롭다며 하소연 아닌 하소연을 했다. 아이들은 어눌한 자신을 놀리거나 무시하는 것만 같고, 왜 사는지 잘 모르겠다며 엉엉 울어버렸다.

 

     달래기도 전에 스스로 추스르고는, 방학 때 아르바이트를 하면 가계에 조금이라도 도움이 되지 않겠느냐며 한숨을 쉰다. 결국 그 날의 상담은 몇 마디 위로의 말을 건네고, 그저 들어주는 것 밖에는 내가 할 수 있는 것이 없었다. 다른 것은 잊고 이제 곧 시험이니 공부에 집중해보자며, 수첩에 공부 계획을 세워 제출하라는 입바른 숙제만 내주고 말았다.

 

    소설가 장정일씨는 <너희가 재즈를 믿느냐>에서 수박을 먹을 때마다 고민이 많다고 고백했다. 수박을 먹을 때마다 껍질을 얼마만큼의 두께로 남겨야 하는지 늘 고민이라는 것이다. 껍질을 두껍게 남기면 낭비한다고 흉볼 테고 바싹 깎아 먹으면 가난하게 자랐다고 흉 볼 것 아닐까 싶다고. 가끔 소설가의 "가난"에 대한 예민함이 떠오를 때가 있다.

 

     때로는 구조적 한계에 갖혀, 처음부터 뒤쳐져서 달릴 수밖에 없는 아이들에게 "그래, 열심히 하면 된다"라고 이야기하기가 괴로워진다. 이면의 아픔을 공유하지 못하고 피상적으로 긍정의 단어들을 나열하는 것이, 모든 고통을 지켜보면서도 생글거리던 에바 브라운과 무엇이 다를까 싶어 어지러워진다. 신나서 공부 계획표를 가져온 아이, 씁쓸해하는 내 표정을 부디 읽지 못했기를.   

덧붙이는 글 | 이기사는 부천자치신문에도 실렸습니다. 오마이뉴스는 직접 작성한 글에 한해 중복 게재를 허용하고 있습니다.


태그:#보건교육, #보건실, #학교보건, #보건교과, #보건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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