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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기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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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월 12일, 일주일간 여정으로 체코공화국을 다녀왔다. 프라하에서 있었던 국제리더십학회에 논문을 발표하는 것이 여행의 주목적이었지만, 방문기간 중 체코의 벨벳혁명(무혈혁명을 상징) 20주년 기념행사를 접할 수 있어 더욱 의미 있는 시간이 되었다. 20년전 11월 17일은 체코공화국이 구소련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한 날이기도 하고, 공산주의 독재로부터 자유를 얻은 민주화의 날이기도 하다.

당시 학생운동의 대변인이었고 현재는 외무부의 요직을 담당하고 있는 Monika Macdonagh Pajerova라는 여성은 국제리더십학회에서 당시를 회상하는 특별연설을 해서 뜨거운 박수를 받았다. 벨벳혁명은 소련의 몰락으로 자동적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오랜 시간 지치지 않고 끊임없이 저항해온 지하운동권 조직의 역할이 컸음을 상기시켰다. 무혈혁명이 가능했던 것은 이름도 없고, 힘도 없던 학생과 지식인의 용기 있는 리더십 덕분이었다고 그녀는 회상했다.

수도 프라하에서 2-3시간 떨어진 올로모츠(Olomouc)라는 대학도시에서 독립기념일을 보냈다. 시에서는 그 날을 기념하는 다양한 행사를 준비했다. 그 중 가장 눈길을 끌었던 행사는 '사회주의의 재구성'이라는 시청 앞 광장과 거리에서 펼쳐진 연극이었다. 연극배우들은 "No Jazz" "No God"이라는 자그마한 사인을 마을 곳곳에 붙이며 '금지'를 상징하는 붉은 줄과 바리케이드를 쳤다. 군복을 입고 손에는 채찍을 든 경찰 수뇌부가 전투차를 진두지휘하며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광장에는 최루탄을 쏘아대던 대포 비슷한 차량이 전시되었고, '공공안전'이라는 글귀가 선명한 경찰차를 타고 시민의 안전을 위협하는 경찰의 모습도 재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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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년전 식료품을 배급받았던 모습을 보여주기 위해 주최 측은 참석자들에게 바나나를 나눠주었고 사람들은 길게 늘어 섰다. 기관총으로 무장한 군인이 확성기에 대고 소리를 질렀다. "기다리면 모든 사람에게 평등하게 나누어줄테니 질서를 지켜라" 사람들은 20년 전의 모습이 상상이 가지 않는다는 표정으로 키득거리면서 줄을 섰다.

다음날 저녁에는 특별 콘서트가 있었는데 혁명 당시 시위대 앞에서 "우리 승리하리라"의 체코판 노래를 불렀던 6인조 가수들의 노래를 들을 수 있었다. 그 중 몇몇은 당시 40대였다고 하니 이미 백발이 되어버렸지만 그 날의 열정만큼은 그대로 간직한 듯했다. 시민들의 참여를 이끌어 내려는 듯, 그들은 노래를 부르는 중간 중간 시민들에게 자신의 열쇠꾸러미를 흔들게 했다. 20년 전 시위에서도 시민들은 열쇠를 흔들며 독재타도와 자유를 외쳤다고 한다.

닮은 꼴의 파시즘과 사회주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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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골의 농가에서 만난 한 노인도 "자유는 결코 양보할 수 없는 것"이라고 외쳤다. 자유는 이미 공기처럼 당연한 것이 되었지만 그들은 처음 마셔보는 오래된 와인의 깊은 맛을 느끼듯, 의미를 새기고 또 새기며 독립기념일을 축하했다.

우리도 2년전 6.10항쟁 20주년을 기념했을 것이다. 체코인처럼 우리도 열정적으로 우리가 누리는 민주주의에 대해 감사했던가. 무덤덤하게 민주주의와 자유를 너무 당연하게 받아들였던 것은 아닐까. 우리에게 민주주의가 찾아온 것도 1987년 6.10항쟁 이후이니 우리는 체코보다 겨우 2년 빨랐을 뿐이다. 그들은 자유의 날 20주년을 크게 기념하고 의미를 되새기는데 비해, 우리에게 '민주주의'는 어느새 박물관이나 보내야할 유물이 되어버렸다. 민주대연합이란 흘러간 옛노래이거나 낡은 프레임 취급을 받는다.

마침 프라하행 비행기 안에서 나는 시네21 편집장을 지내고 최근 영상자료원장을 성공리에 마친 조선희가 낸 신간 <클래식중독>을 읽었다. 한국의 오래된 영화를 감독별, 주제별로 재미있게 구성한 이 책은 20년전 독재정부 치하에서 영화에 대한 검열이 얼마나 지독했는지 생생하게 보여주고 있다.

시대를 앞서 갔다는 이유로 투옥되었던 소설가 장정일과 반공법 위반으로 실형을 산 이만희 감독 이야기가 고조선시대 이야기처럼 펼쳐져 있었다. 사회부조리를 폭로했던 소설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이 검열과 심의 끝에 외설영화로 둔갑한 끔찍한 이야기를 몸서리치며 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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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로모츠의 광장에 펼쳐진 '사회주의 재구성' 연극을 보며 나는 <클래식중독>에서 본 오래된 영상을 친구에게 말했다.

"우리는 미니스커트를 입고 지나가는 여성의 무릎 위 치마길이를 경찰이 자를 가지고 와서 쟀다. 그래서 걸리면 경범죄에 처해 벌금을 물렸지."
"우리도 그랬는데... 남성들은 장발단속에 걸리곤 했지."

체코 친구가 맞장구를 쳤다.

"남성이 장발단속에 걸리면 경찰이 머리칼을 밀어서 고속도로를 내곤 했지."

우리는 함께 박수를 치며 웃었다. 어떻게 이렇게 체제를 뛰어넘어 탄압의 유형도 비슷한지 감탄하지 않을 수 없었다.

사실 이번 학회에서 가장 많이 들은 말이 "사회주의와 파시즘의 차이를 모르겠다"는 것이었다. 세계주의를 모토로 하는 사회주의와 민족주의를 전면에 내세우는 파시즘의 차이를 학자들이 모를 리 없다. 하지만 '원인'이야 어찌되었든 통치의 형태가 전체주의라는 점에서는 차이가 없다는 말이다.

체코인에게 있어서 사회주의는 이미 지나간 역사가 되었지만 우리에게 있어서 권위주의 통치는 아직도 현재 진형형이다. 이명박 정부의 퇴행정치로 우리는 요즘 권위주의 정치의 진면목을 목격하고 있다. 땡전 뉴스는 사라졌는지 몰라도 정부는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언론을 통제하고 있다. 신문이나 방송의 뉴스에서 자기검열의 흔적을 찾는 것은 너무도 쉬운 일이되었다. 전임 대통령의 장례식 사회를 보았다고 자리에서 내몰리고, 토론프로그램의 사회를 너무 공정하게 본다고 쫓겨나고, 평화적 시위를 하다 경찰의 폭력에 피투성이가 되고....

20년 전에는 감독을 감옥에 가두는 방법으로 표현의 자유를 억압했다면 요즈음에는 좀 더 세련된 방법으로 감독의 목줄을 쥘 것이다. 민주정부 10년간 만끽했던 표현의 자유는 이제 안녕을 고해야할지 모른다. 정부는 기업의 목줄을 쥐고, 기업은 자금이란 목줄로 영화감독의 표현의 자유를 압박할지 모른다. 이 정부의 교묘한 탄압과 외압으로 밥줄을 끊어 놓는 행태는 이미 공공연하게 자행되고 있다.

정작 나는 아무렇지도 않게 우리의 현재 상황을 전했는데 체코 친구의 반응은 격렬했다.

"아니 그건 공포정치잖아? 그런 끔찍한 일이 어떻게 민주국가를 자처하는 나라에서 벌어질 수 있지? 그건 도저히 용납할 수 없는 일이야. 왜 한국국민은 저항하지 않는 거지? 지식인들이 어떻게 침묵할 수가 있어?"

공포정치에 맞서는 길은 민주대연합 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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격한 친구 반응을 접하고서야 나는 스스로를 반성했다. 민주대연합이 낡은 프레임이라는 주장이 난무하는 데에도 반박 한 마디 못했으니 말이다.

국민이야 저항하는 데에도 지쳤을 것이다. 선거 때 표로 심판하기 위해 때를 기다리고 있을 것이다. 하지만 정작 위험한 사람은 자칭 진보 엘리트들이다. 국민은 이 정부에 대항하는 대안만 나타나면 표를 찍어주려고 대기하고 있지만 일부 정치인들이 연대를 거부하고 있기 때문이다.

소위 진보를 자처하는 지식인, 정치인, 언론인은 틈만 나면 '민주 대 반민주'의 대결은 낡은 구도이며, 민주대연합은 흘러간 연합이라고 외친다. 과연 민주주의 연대 없이 특권정치, 패거리 정치, 부자들만을 위한 정치를 청산할 수 있을까? 그들이 말하는 진보정치의 정체는 무엇인가. 권위주의라도 좋으니 사회주의를 하자는 말인가. 책상머리 관념적 진보주의라고 치부하기에는 그들이 바로 민주주의의 적이 되는 현실이 너무도 두렵다.

진보지식인이라는 사람이 "정권이 한나라당으로 넘어가도 좋다"고 말할 때 진즉에 깨달았어야 했다. 극과 극은 통한다는 사실을. 파시즘적 권위주의든, 좌파적 권위주의든 권위주의는 한 몸이라는 사실을.

지금이야말로 민주대연합이 필요한 때가 아닌가. 진보연합도 민주주의의 우산 아래에서 이루어져야 한다. 복지와 분배도 국민의 민주적 선택을 통해 이루어야 한다. 그래야 지속가능하다. 민주주의를 거부하는 진보는 더 이상 진보적일 수 없다. 권위주의의 혐의가 짙다.

오마이뉴스가 기획한 "다시, 민주주의를 말한다" 특별강연이 시의적절하면서도 관심이 가는 이유는 이 때문이다. 민주대연합이 과연 흘러간 노래인지, 우리가 애절하게 불러야 할 세레나데인지 성찰의 계기가 되기를 기대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cafe.naver.com/chomagic에도 실렸습니다.



태그:#체크공화국, #벨벳혁명, #민주대연합, #민주주의, #오마이뉴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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