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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는 결코 인생이 만만하지 않은 것인 줄 진작에 알고 있었다. 행복과 불행, 화해와 갈등, 원망과 그리움, 상처와 치유, 이상과 현실, 시작과 끝, 그런 모든 반어적인 것들이 결코 정리되지 않고, 결국엔 한 몸으로 뒤엉켜 어지럽게 돌아가는 것이 인생이란 것쯤은, 나는 정말이지 진작에 알고 있었다. 아니, 안다고 착각했다. 어떻게 그 순간들을 견뎠는데, 이제 이 정도쯤이면, 이제 인생이란 놈도 한 번쯤은 잠잠해져 주겠지, 또 다시 무슨 일은 없겠지, 나는 그렇게 섣부른 기대를 했나 보다. 이런 순간에, 한없이 막막해지는 걸 보면. - 책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중에서.

 책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겉그림
 책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 겉그림
ⓒ 헤르메스 미디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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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다보면 하염없이 답답하고 마음이 먹먹한 순간이 온다. 분명 내 마음일진데, 내 뜻대로 움직여주지 않고 나를 더욱 힘들게만 한다. 시원하게 울고 싶지만 눈물조차 나오지 않고 지난날에 대한 후회와 자책으로 잠도 오지 않는다. 하얀 밤을 고민으로 지새우던 중 책장 한  편에 꽂혀있는 이 책, 드라마 작가 노희경의 에세이집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유죄>에 눈길이 갔다.

평소 인간미 넘치는 노희경 작가의 드라마들을 감명 깊게 봐 온 터라, 일말의 기대감을 가지고 책 첫 장을 넘겼다. 최소한 단 한 줄이라도 기댈 곳이 있기를 바라는 심정으로 천천히 읽어내려 갔다. 페이지 곳곳에는 훈훈한 온기가 서려있었고 나는 얼마 지나지 않아 시원하게 눈물을 흘려가며, 흐른 눈물을 휴지로 닦아내가며 책에 빠져들 수 있었다.

자신의 상처를 남에게 내보이는 것은 쉬운 일이 아니다. 사람은 누구나 주변 이들에게 좋은 모습으로 각인되고 싶어 하며, 그렇기에 치부 드러내기를 꺼린다. 나 역시 '가까우면 타 죽고, 너무 멀면 추워 죽는다'는 나름의 원칙에 따라 애인과도, 친구들과도 적당한 거리조절을 하며 살아왔다. 하지만 가끔은 모든 방패막이를 내려두고 진심으로 소통하고 싶어진다.

책 안에서 노희경은, 거침없이 자신의 상처를 드러내 보인다. 그러면서도 흔들리거나 창피해하거나 하지 않고 그저 덤덤한 어조로 자신의 과거를 회상할 뿐이다. 환영받지 못했던 탄생, 자신을 버리고 돌아서던 어머니에 대한 기억, 핏빛 식용물감으로 물들인 '피자두'를 훔쳐 달아나던 꼬마 시절의 모습, 어머니의 임종 후 지하방에서 글쓰기에 몰두했던 젊은 날 등등. 아프고 시렸던 지난 시간들을 보듬으며, 그녀는 '당신도 힘을 내라' 고 독자들에게 따뜻한 메시지를 건넨다.

나 자신도 때로는 얄미운 가해자가 아니었던가, 생각하게 만드는 책

'어른이 되었다는 건 상처 받았다는 입장에서 상처 주었다는 입장으로 가는 것. 상처준 걸 알아챌 때 우리는 비로소 어른이 된다'고 그녀는 말한다. 상처를 받기만 했다고 생각했던 과거에서조차, 그 자신도 때로는 가해자였음을 고백한다. 읽다 잠시 멈추어, 그러면 나는 어땠는가 하고 돌이켜보았다. 서러웠던 일, 기분 나빴던 말 한 마디에 그 혹은 그녀를 비난하며 물고 늘어지지 않았는가. 서운했던 기억만을 꾹꾹 눌러 담아 마음 속 한 구석에 지옥을 만들지 않았는가. 나 자신도 때로는 얄미운 가해자가 아니었던가.

이 책은 단순한 에세이가 아니라, 내가 나 자신에게 고백성사를 하게 만드는 힘이 있는 책이다. 거친 바람보다는 따뜻한 태양이 나그네의 옷을 벗기듯, 괜찮다며 토닥이는 작가의 말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내 내면을 열어 보게 된다. 과거 미숙했던 나 자신들을 현재의 눈으로 마주하며 어루만지게 한다. 수줍은 듯 조용한 노희경의 글은, 이렇듯 독자를 성장시킨다.

'너무 잘난 사람들하고만 어울려 놀지 마, 희경씨.'
'책 많이 읽어, 희경씨.'
'버스나 전철 타면서 많은 사람들을 봐, 희경씨.'
'재래시장에 많이 가, 희경씨,
그 곳에서 야채 파는 아줌마들을,
할머니들 손을, 주름을 봐봐 희경씨,
그게 예쁜 거야, 희경씨.'
'골프 치지 마, 희경씨, 대중목욕탕에 가, 희경씨.'
'우리 자주 보지 말자, 그냥 열심히 살자, 희경씨.'
'대본 제 때 주는 작가가 돼, 희경씨.'
-책 중에서, 배우 나문희가 노희경에게.

노희경 역시, 주변 사람들로 인해 지금의 노희경이 될 수 있었노라고 이야기한다. 배우 나문희로부터 받은 오천 원짜리 몸빼 바지 덕분에 작가 된 기분을 흠뻑 느끼며 글을 쓴다고, 꽃보다 아름다운 동반자 PD 표민수 덕에 일하는 기쁨이 더욱 커졌으며, 사랑스런 독설가 배우 윤여정이 있어 위안 받는 느낌으로 글을 쓴다고 감사의 인사를 전한다.

이외에도, 책에는 영화에 관한 글들과 더불어 드라마 <그들이 사는 세상> 속 주인공 지오와 준영이의 내레이션, 그리고 노희경이 어머니 아버지께 드리는 편지 등이 실려 있다. <봄날은 간다>와 <화양연화>를 보고 적은 글에서는 인간에 대한 통찰력이 엿보이고, 지오와 준영이의 내레이션은 꼭 내 마음만 같아 몇 번을 읽어도 좋다. 부모님께 쓴 편지는 눈물 없이 읽을 수 없다. 자식은 부모 앞에서 늘 죄인이 되고 마는구나, 이왕이면 모범수가 되어야지, 다짐하게 된다.

작가 노희경의 따뜻한 위로와 눈물 없이는 읽을 수 없는 글들

나 역시 글밥을 먹고 사는-아직은 병아리-작가이지만, 노희경 작가의 인간에 대한 이해와 깊이를 따라가는 것은 도통 버거운 일이라 느껴진다. 글쟁이이기 이전에, 나는 제대로 된 인간이었던가. 늘 내 주장만을, 내 편안함만을 최우선으로 내세우며 주변 사람들을 피곤하게 만들지는 않았나. 반성하고, 또 반성하게 된다.

마지막 페이지를 덮은 후,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라는 제목을 다시금 들여다본다. 나는 누구에게 진실된 사랑을 제대로 준 적이 있었나. 받으려고만 하지 않았나 곰곰이 생각해보며 따뜻한 메시지를 전해준 노희경 작가에게 감사하는 마음을 보낸다. 평생, 무죄로 살고 싶다는 개인적인 소망도 품어본다.


지금 사랑하지 않는 자, 모두 유죄

노희경 지음, 김영사on(2008)


태그:#변지혜, #노희경, #드라마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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