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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정상으로 가는 계단이 보인다. 겨울 정취가 한껏 묻어난다.
 불암산 정상으로 가는 계단이 보인다. 겨울 정취가 한껏 묻어난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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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에 얽힌 전설부터 이야기하고 둘레길을 걸은 이야기를 풀어나가는 게 순서일 것 같다. 그렇다고 아주 특별한 전설이라는 건 아니고, 그저 여담으로 즐기자는 것일 뿐.

불암산은 원래 금강산에 있던 산이었더란다. 금강산, 하면 빼어나기로 아름다운 산이 아니던가. 그런 곳에 있던 불암산은 아무리 생각해도 욕심이 많았던 것 같다. 나 같으면 가라고 등 떠밀어도 그냥 눌러 있겠구만. 조선왕조가 들어서 도읍을 정하는데 한양에 남산이 없어서 못 정한다는 소문을 듣고는 자기가 한양의 남산이 되고 싶어진 것이다.

사람이나 산이나 출세를 하려면 서울(한양)으로 가야해, 하면서 금강산을 떠나 한양으로 온 불암산. 그런데 이런, 한 발 늦었다. 한양에는 이미 남산이 떡하니 자리를 잡고 있는 것이 아닌가. 확실히 소문이란 믿을 게 못 되는 법, 하면서 돌아가면 좋았으련만 불암산은 그냥 한양 언저리에 주저앉고 말았다. 아무래도 출세(?)를 하겠다고 떠나온 고향에 빈손으로 돌아가기가 싫었던 게지. 불암산은 헛소문을 퍼뜨린 한양이 영 못마땅해 돌아앉은 형국으로 자리를 잡았다고 한다.

이 불암산에 걷기 좋은 둘레길이 조성된 것은 지난 가을. 불암산 둘레길은 하루 길과 나절 길로 나누어진다. 하루길은 전체 길이가 10㎞로 불암산 덕릉고개에서 시작돼 넓은 마당과 넓적바위를 거쳐 불암산 정상을 지나 다시 덕릉고개로 이어지는 구간이며, 나루길은 전체 길이가 8㎞로 104마을갈림길에서 시작돼 공릉산 백세문을 거쳐 삼육대 갈림길까지 이어지는 구간이다.

이정표는 길친구가 되어준다.
 이정표는 길친구가 되어준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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두 구간을 합한 길이가 18km니 조금 걸음을 빨리하면 하루에 다 걸을 수도 있지만, 굳이 무리할 필요는 없다. 도보여행은 무리하지 않고 주변 경관을 감상하면서 천천히 즐기면서 걸을 때 제맛이 나는 법이니까. 걸은 소감은, 불암산아 고향으로 안 돌아가고 눌러 앉아줘서 정말 고맙다. 오래오래 그 자리를 지키고 있어다오.

지난 19일, 불암산둘레길을 걸었다. 정해진 코스대로 걸은 것은 아니고, 6호선 전철 화랑대역에서 출발해 하루길의 일부와 나절길의 일부를 섞어서 걸은 뒤 다시 화랑대역까지 걸어갔다.

불암산둘레길 지도를 보면 알겠지만 정해진 출발점부터 걷는 건 애초부터 불가능하다. 하루길은 덕릉고개가 출발점인데 거기까지 축지법을 써서 단숨에 갈 수 있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헬리콥터를 타고 그 지점으로 낙하할 수도 없는 노릇 아닌가. 그건 나절길도 마찬가지. 길의 출발점은 그래서 늘 역이나 버스정류장이 될 수밖에 없다.

이번 도보여행은 도보모임 '숲길 도보여행' 회원들과 함께 했다. 같이 걸을 수 있는 길 친구가 있으면 발길이 저절로 가벼워지는 법. 가끔은 여럿이 함께 길을 떠나는 재미를 누리는 것도 생활에 활력소가 된다.

겨울의 황량함이 한껏 깃들어 있는 길은 걷고 싶은 열망을 흔들어 깨운다.
 겨울의 황량함이 한껏 깃들어 있는 길은 걷고 싶은 열망을 흔들어 깨운다.
ⓒ 유혜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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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보여행을 하려고 굳이 먼 길을 떠날 필요가 없다는 생각을 하게 만드는 길이 바로 불암산둘레길이다. 이 길은 산길과 숲길로 적당하게 이어져 흙을 밟으면서 바위를 타 넘으면서 걸을 수 있는 장점이 있다. 대신 난이도가 조금 높은 편이다. 오르막길을 여러 차례 숨을 헐떡이면서 올라야 하기 때문이다. 오르막길이 있으면 그에 버금 가는 내리막길도 있다. 하지만 쉬엄쉬엄 서두르지 않고 걷는다면 그리 어렵지 않게 걸을 수 있으리라.

화랑대역에서 출발해 가장 먼저 도착한 곳은 공릉산 백세문. 이곳부터 본격적으로 길이 펼쳐진다. 도심에서 벗어나는 느낌인 건 이곳이 산으로 들어가는 입구이기 때문일 것이다.

겨울산은 황량하기 그지없다. 그건 어디든 마찬가지로 불암산도 다를 바가 없었다. 한 사람이 걷기 딱 좋은 폭의 길 언저리에는 엊그제 내린 눈이 채 녹지 않고 남아 있었다. 바싹 마른 채 산을 뒤덮은 낙엽은 겨울 정취를 한껏 자아낸다.

이 길에서 탤런트 최불암씨가 세웠다는 비석 하나를 만났다. 최불암씨가 불암산 명예산주란다. 비석에는 불암, 이라는 예명을 불암산에서 빌렸다는 고백이 들어간 시를 새겨놓았다. 그 불암(佛岩)이 이 불암이었구나.

가끔 길은 실금을 그어놓은 것처럼 이어질 때가 있다.
 가끔 길은 실금을 그어놓은 것처럼 이어질 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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길은 산을 따라 혹은 숲을 따라 이어지고 또 이어진다. 걷기 좋은 숲길이라고 해야 하나. 아무리 걷기 좋은 길이라고 해도 거저 걷는 것은 아니다. 한 걸음씩 내딛어야 앞으로 나갈 수 있고, 목표한 지점에 다다를 수 있다. 그래서 길을 걸을 때 가장 필요한 것은 인내심일 지도 모르겠다.

오르막을 걸었더니 땀이 배기 시작한다. 날씨가 많이 풀린 탓이기도 하다. 영하 십도 아래로 뚝 떨어졌던 수은주는 언제 그랬냐 싶게 영상권에 머물고 있는 중이다. 한동안 실종되었다던 삼한사온이 찾아오는 건가 싶지만, 겨울을 더 지켜봐야 정체를 알 수 있을 것 같다.

산은 평지보다 혹은 도심보다 기온이 낮기 때문에 중무장을 했더니 괜한 짓을 했다는 후회가 슬슬 밀려든다. 이마에서 겨드랑이에서 솟구치는 땀은 온몸을 흠뻑 적시기 시작했다. 겉옷을 벗고 걸어도 땀은 쉬이 그치지 않는다. 한겨울에 땀을 흘리면서 걷는 느낌 나쁘지 않다. 대신 쉴 때 땀이 식으면서 선뜩한 한기가 느껴지므로 보온에 신경을 써야 한다. 자칫하다가는 감기에 걸릴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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돌탑을 보면 소망을 비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내 소망은 무엇인가?
 돌탑을 보면 소망을 비는 사람들이 생각난다. 내 소망은 무엇인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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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락산으로 넘어가는 길을 지나고, 덕릉고개까지 지나니 불암산 정상이 보인다. 온통 바위로 이루어진 봉우리 하나가 폼 잡고 선 거인처럼 우뚝 솟아 있다. 소나무들이 바위의 아랫부분을 감싼 듯이 서 있는 사이로 가파른 철 계단이 모습을 드러낸다. 바위 꼭대기에서는 깃대에 매달린 태극기가 사정없이 휘날리고 있었다.

철 계단을 보니 왜 그리 까마득하게 보이는지, 겁이 덜컥 나는 게 올라가기 싫어진다. 막상 올라가면 별 거 아닌데 바로 아래서 보면 저길 우찌 올라가나, 싶어지는 것이다. 길이 어디 저기로만 통하겠나 샛길이 있을 터 그 길로 새자, 고 했지만 이런 경우 꼭 나오는 말이 있다. 못 먹어도 고~~. 고스톱판도 아니구만, 도박전문용어가 이럴 때 등장하는 이유를 알다가도 모르겠다.

불암산 정상. 그냥 사진만 봐서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불암산 정상. 그냥 사진만 봐서는 에베레스트를 정복한 사람들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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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산에는 소나무가 있어야 제격이다. 바위가 있는 곳에 소나무가 없으면 삭막하고, 소나무가 있는 곳에 바위가 없으면 품격이 갖춰지지 않는다. 불암산도 마찬가지가 아닌가 싶다. 그런 곳에서 내려다보는 도시는, 아파트가 꽉 들어찬 성냥갑 같은 도시는 안개 같은 매연에 뒤덮여 있었다. 하산하기 싫구만. 저절로 드는 생각이다.

태극기 펄럭이는 불암산 정상에서 에베레스트 정상이라도 밟은 듯이 힘차게 손을 흔드는 길 친구들에게 손을 흔들어주고, 깔딱고개 계단을 내려간다. 계단 길, 이거 반갑지 않다. 오를 때는 숨이 넘어갈 듯 깔딱거리고 내려가는 길은 무릎에 무리가 가기 때문이다. 오래 건강하게 잘 걸으려면 무릎 보호는 필수. 이럴 때 축지법이 필요한 것인데, 아직 배우지 못했다.

"저기가 말이여, 귀곡 산장이여."

누군가 말했다. 깔딱고개를 지나 삼육대 갈림길로 가는 길에 소복을 입고 머리를 풀어헤친 귀신이 나올 것처럼 을씨년스럽게 생긴 단층 건물 하나가 모습을 드러낸 것이다. 멀리서 봐도 가까이서 봐도 솔직히 심란한 모양새다. 한밤중에 숲길을 걷다가 이런 건물과 맞닥뜨리면 삼십육계 줄행랑을 치고도 남을 것 같다.

하필이면 날씨는 자꾸 흐려져 음산하기까지 하다. 그럴 때, 귀곡 산장을 만나면 마음을 단단히 다잡아야겠지만, 불암산의 귀곡 산장은 그럴 필요는 없다. 마음씨 좋아 뵈는 아저씨가 쥔장이므로.

귀신이 나올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여기가 귀곡 산장... 이라고 부르고 싶은 곳.
 귀신이 나올 것처럼 보이기는 한다. 여기가 귀곡 산장... 이라고 부르고 싶은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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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암산 맨발길
 불암산 맨발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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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산장에서 잠시 걸음을 멈추었다. 김치 빈대떡에 마른 멸치를 안주 삼아 막걸리를 마시느라고. 그다지 출출한 것도 아닌데 김치 빈대떡이 입맛을 당기는 건 대체 무슨 까닭일까? 비법이 있느냐고 묻는 말에 산장 쥔장 왈, 부침가루를 사용했시유.

늘 그렇듯이 먹느라고 정신이 아득해지는 바람에 사진은 통과.

불암산 맨발길은 맨발로 걷기 딱 좋은 길이다. 그 길과 만났다. 한 겨울이 아니라면 맨발로 걸어도 좋을 텐데, 하는 생각을 하는 순간 맨발로 걷는 사람과 마주쳤다. 맨발길은 계절을 가릴 필요가 없다, 는 교훈(?) 하나를 얻었다. 맨발로 걷는 이의 뒷모습을 지켜보고 있노라니 흙이 잔뜩 묻은 발뒤꿈치가 눈길을 끈다. 발 시리겠다, 싶어서.

삼육대 갈림길에서 제명호수가 나타났다. 삼육대학교의 부지를 마련하고, 삼육신학원 원장을 역임한 이제명씨의 이름을 붙인 인공호수다. 제명호, 겨울이라 한적하고 쓸쓸해 뵈지만 녹음이 우거진 계절에는 제법 운치가 있는 곳이다. 한 남자가 긴 나무 의자에 홀로 앉아 있는 뒷모습이 호수와 어우러져 겨울의 정취를 한껏 풍긴다. 호수 수면은 살얼음이 덮여 있다. 호수가 꽝꽝 얼지 않은 것을 보니 겨울은 아직 제대로 깊어지지 않은 모양이다.

삼육대 안에 있는 제명호.
 삼육대 안에 있는 제명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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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날 도보여행은 제명호에서 삼육대 정문까지 걷는 것으로 마무리되었다. 걸으면서 내내 이 길, 참으로 걷기 좋고 운치 있는 길이라는 생각을 했다. 한 겨울, 함박눈이 펄펄 쏟아지는 날 걸으면 끝내 줄 것 같다. 아마도 눈이 내리는 날이면 불암산 둘레길을 걸으러가야 할 것 같은 의무감에 시달릴 것 같은 그런 길이다.

[걸은 길] 화랑대역 - 공릉산 백세문 - 넓적 바위 - 넓은 마당 - 덕릉고개 - 불암산 정상 - 깔딱고개 - 헬기장 - 하루길 사거리 - 삼육대 갈림길 - 삼육대 정문

불암산둘레길 안내도
 불암산둘레길 안내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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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도보여행, #불암산, #불암산둘레길, #OBC1595@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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