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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4월 5일) 아침 아내와 말다툼을 했습니다. 아무것도 아닌 일로 언성을 높였습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식목일은 휴일이었습니다. 나무를 심고 무성한 잎을 연상하며 미래를 꿈꾸어도 좋을 식목일 아침에 말다툼을 한 것입니다. 알콩달콩 부부 생활에 평화만 있는 것은 아닌 줄 알면서도 이럴 땐 속이 상합니다.

더욱더 화가 나는 것은 다툴 때 아내가 빼놓지 않고 하는 말이 있습니다. 자기를 공짜로 데려왔다는 것입니다. 그럼 '돈 주고 사오련?'이라고 항변 아닌 항변을 하고 싶지만 아내의 말뜻이 다른 데 있다는 것을 알고 참습니다. 제가 늦장가를 갔지만 벌써 20년이 흘렀습니다. 저는 그때 꿈을 먹고 사는 사람이었습니다. 저 개인의 삶뿐만 아니라 사회와 국가론 나아가 신앙관까지 온통 이상(理想)을 추구하며 살았습니다. 결혼을 늦게 할 수밖에 없었던 것도 이런 데 연유하는 측면이 없지 않습니다.

맘에 드는 아가씨를 만나도 제가 먼저 프로포즈를 하지 않았습니다. 먼저 그렇게 해 오기를 바랐습니다. 그런데 어느 골빈 아가씨가 저에게 먼저 청혼을 하겠습니까? 가진 게 아무 것도 없을 뿐더러 몸의 장애까지 갖고 있는 사람을요. 그럼에도 저는 그런데 아랑곳하지 않고 마음이 도도했습니다. 대학 때 처음이자 마지막인 미팅이란 델 따라갔던 적이 있습니다. 심지를 뽑아 상대를 정했는데, 제게 걸린 여학생이 공교롭게도 당시 힘 있는 국회의원의 딸이었습니다. 잘 되었다싶어 고상한 대화(?)를 하다가 딱지 맞기 전에 제가 선수를 쳤습니다.

그러고 나서 한참 뒤, 걸려든 사람(?)이 지금의 아내입니다. 저는 그때 사회운동을 하고 있었습니다. 아니, 좋게 말해서 사회운동가이지 나쁘게 말하는 사람들은 저를 '건달'이라고 했습니다. 물론 제가 듣지 않는 곳에서요. 아내는 튼실한 직장을 다니고 있었습니다. 데이트라는 걸 할 때면 돈을 쓰는 사람은 아내 쪽이었습니다. 저는 그것을 지극히 당연하다고 생각했습니다. 고정적인 수입을 갖고 있는 직장인이 사회를 위해 활동하는 사람을 대접하는 것은 지극히 순리라고 여겼습니다. 아내도 순순히 그렇게 해 주었습니다.

우리는 서둘러 결혼식을 올렸습니다. '혼례 예식'이라는 인쇄물이 배포되지 않았다면 결혼식으로 수용하는 데는 약간의 시간이 필요했을 것입니다. 풀물패의 길놀이가 있었고, 당시로서는 파격적인 신랑신부가 손을 맞잡고 '상록수' 노래에 맞춰 입장했고, 주례 선생은 100년 만에 한 명 나올똥말똥한 선동가로 이름 높던 백기완 선생이 맡았으며 사회도 운동권에선 알아주는 친구가 맡아주었으니까요. 백 선생의 주례사는 신랑신부의 앞날을 축복해 주는 말이 아니라 투쟁의 선봉에 서서 열심히 싸우는 부부가 되라는 선동이었습니다.

이렇게 되기까지 아내가 많은 애를 썼습니다. 지금은 가끔 후회 아닌 후회를 합니다만 우린 결혼식에서 물질은 철저히 배격하되 정신은 한껏 고양하기로 무언의 약속을 했습니다. 그리고 그것을 지켜 냈습니다. 결혼 예물 생략, 식장도 무료로 사용할 수 있는 곳(식장이었던 향린교회엔 대단히 미안한 일이지만), 주례의 사례비도 지급하지 않아도 될 분으로 모시고, 뒤풀이도 최소한의 경비로 치르기로 했습니다. 더군다나 신혼여행은 대중교통을 이용해서 신랑 신부의 고향과 민주화의 성지 광주 망월동 묘지를 참배하는 것으로 대신하기로 했습니다.

그러니까 결혼식에 돈이 그렇게 많이 소요된 것이 아니었습니다. 아내는 남편 될 제게 식장에서 입을 한 복 한 벌을 결혼 선물로 해 주었습니다. 그리고 우리는 지하 단칸방에서 신혼살림을 시작했습니다. 결혼은 서로 다른 생활 배경을 가진 남녀가 만나 한 가정을 이루는 의례입니다. 그러니 서로 양보하고 이해하며 자신을 비우는 마음으로 생활해야 한다는 것은 당연한 이론입니다. 문제는 살다보면 그렇게 되지 않을 때가 많다는 것이지요. 아내와 저와의 관계에서 주로 이해하고 양보하는 편은 아내 쪽이었습니다.

그런데 그것도 변하더군요. 정확이 언제부턴지 기억나지 않습니다만 아이들이 크고 난 뒤가 아닌가 싶습니다. 막내가 중학교에 들어가고 자기들 세계를 구축하고 난 뒤부터 아내가 그답지 않게 생활의 주도권을 행사하려 하더군요. 가끔 고성이 오갔습니다. 저도 남자의 자존심 운운하며 물러서지 않았습니다. 그때마다 아내가 한 말이 자기를 공짜로 데려 왔으면서 무슨 할 말이 그렇게 많냐는 것입니다. 아니 이심전심 통하는 마음은 합의와 같은 의미가 있는데, 아내는 지금 와서 그것을 부정하고 있는 것입니다. 마음에 없는 아녀자를 제 맘대로 '보쌈'을 해온 것도 아니고 정상적인 판단 아래 스스로 결정한 일을 가지고 공짜로 데려왔다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까?

아내는 한 술 더 뜹니다. 자기는 속아서 아무것도 받지 않고 왔지만 아이들은 절대 그렇게 만들지 않겠다는 것입니다. 결혼 예물도 받고, 면사포도 쓰고, 번듯한 곳에서 만인의 축복을 받는 결혼을 시키겠다는 것입니다. 아내는 면사포도 쓰지 않고 한복만 입고 운동권 집회식으로 한 결혼식이 마음에 걸렸던 모양입니다. 결혼할 땐 좋다고 했으면서 말입니다. 저는 지금도 결혼할 당시 갖고 있던 마음엔 변함이 없습니다. 결혼은 사랑의 결정(結晶)이고 사랑엔 마음 외의 것이 개입될 때, 그것은 사치 아니면 군더더기가 되기 쉽다는 지론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저는 그런 점에서 공짜로 아내를 데리고 온 것이 아닙니다. 값비싼 대가를 치르고 아내를 데리고 온 것입니다. 진실한 마음을 주고 데리고 왔으니까요. 이것은 아내가 공짜 운운할 때마다 제가 반복해서 들려주는 반론의 말이기도 합니다. 사실이 그렇지 않습니까? 저는 요즘 결혼하고 쉽게 헤어지는 많은 커플들을 생각합니다. 이들의 갈라섬에는 마음 이외의 것들이 너무 크게 자리하고 있기 때문에 그렇다고 확신합니다. 성격이 맞지 않아서? 이것도 진정한 사랑의 마음이 결핍되어 있기 때문에 하는 말입니다.

순수한 사랑은 성격 차이도 극복하게 해 줍니다. 자라온 배경이 다르기 때문에? 성장 배경이 똑 같은 사람이 어디 있습니까? 없습니다. 상대를 헤아려주는 진실한 마음은 다른 성장 배경도 느끈하게 이기게 만들어 줍니다. 그 외의 요소로 물질이 많이 작용하는 것 같습니다. 혼수품이 생각에 미치지 못한 것이 빌미가 되어 파혼까지 이르는 사람들을 볼 때면 이런 사람은 아예 처음부터 쌍으로 맺어지지 않는 것이 좋았을 것이라고 단언합니다.

저는 결혼을 하고, 사람들에게 재미가 어떠냐고 물어 올 때 '알콩달콩 살고 있다'고 대답하곤 했습니다. '알콩달콩'의 사전적 의미는 '아기자기 사이좋게 사는 모양'을 뜻하는 말입니다. 부사인 이 말을 좀 더 깊이 생각하면 재미있는 이야기들이 펼쳐질 수 있을 것입니다. 어원학적으로 검증된 것은 아닙니다만 저는 이렇게 해석해 봅니다. '알콩'은 알짜 콩을 가리킵니다. '알짜'는 '조금도 모자람이 없이 표본이 되는 것'을 뜻하지 않습니까? '달콩'은 달달한 콩, 즉 맛있는 콩을 의미합니다.

이 두 단어가 조합되어 만들어진 '알콩달콩'은 그러니까 한 가정의 이상적(理想的) 분위기를 드러내 주는 말입니다. 이것은 결혼하여 한 가정을 이룬 사람들이 추구하는 가정의 이상향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입니다. '알콩달콩 살아간다'는 말 속에는 인내하며 양보하며 사랑하며 고난을 함께 헤쳐 나가는 부부의 소원이 함축되어 있는 말입니다.

5월 둘 째 주 토요일에 한 쌍이 결혼을 합니다. 지인의 자녀 결혼식입니다. 제가 주례를 맡기로 했습니다. 많은 사람들 중에 부족한 저에게 주례를 부탁한 것은 이런 일련의 제 삶을 지켜보고 의미를 부여한 결과가 아닌가 싶습니다. 결혼은 빈 것을 채워 나가는 과정입니다. 내 것으로 채우기보다 상대의 것으로 즐겁게 채워나가는 일입니다. 아내가 늘 자기를 공짜로 데려왔으니 더 잘 하라고 일갈하는 것도 내 것을 버리고 아내의 것으로 채워달라는 부탁일 것입니다. 나 외의 상대방에는 아내뿐만 아니라 가족 나아가 넓게는 이웃과 사회가 해당될 것입니다. 저는 5월 중순 있을 결혼식 주례사에 이런 뜻을 꼭 포함시켜 신랑 신부에게 축복의 말을 전할 예정입니다.


태그:#알콩달콩, #결혼식, #주례, #사회운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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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도 향기 그윽한 김천 외곽 봉산면에서 농촌 목회를 하고 있습니다. 세상과 분리된 교회가 아닌 아웃과 아픔 기쁨을 함께 하는 목회를 하려고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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