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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생 물수건으로 얼굴을 깨끗이 닦고 있는 형님
▲ 아버지 얼굴 닦아 주기 위생 물수건으로 얼굴을 깨끗이 닦고 있는 형님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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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 7일 토요일 오후 시간이 남아 돌았습니다. 별로 할 일도 없고 해서 제나름 절친한 형으로 여기는 이영도 형님과 간만에 동네 산이나 한번 탈까 했습니다. 그래서 '영도형 간만에 산 함 탈까?' 하고 문자를 보냈더니 잠시후 답신이 오기를 '오늘 아버지 병문안 가봐야 한다' 했습니다. 그러면 나도 같이 한번 따라 가보고 싶다고 했더니 그러자 해서 토요일 오후 영도 형님 아버님이 계시는 병원에 함께 가보기로 했습니다.

영도 형님 아버지는 오래전부터 병원에 입원해 있다는 소식만 들었습니다. 먹고 사느라 바빠 그동안 병문안 한번 못 가보아서 미안하기도 하고 해서 오늘 오후 마침 시간이 남아 돌아 영도 형님을 따라 나선 것입니다. 울산 남목에서 다운동 근처에서 만나 승용차로 이동 했습니다. 영도 형님 아버님이 계시는 병원은 덕신이라는 동네에 있었습니다. 울산에서 승용차로 10분 정도 걸리는 거리에 있습니다. 저는 궁금해서 승용차로 병원으로 이동하면서 아버지가 왜 병원에 입원해 있는지 물어 보았습니다. 영도 형님이 대답 해주었습니다.

"10년 전 일이지. 강원도에 계시는 어머니에게 전화가 온거야. 아버지가 이상한 말을 하고 집을 나가면 못 찾아 온다는 거야. 그날도 아버지가 집을 나가 안 온다고 해서 갔었지. 경찰과 함께 온 마을을 뒤졌어. 며칠을 뒤진 뒤에야 찾을 수 있었지. 아버지 찾아 병원에 모시고 가서 진찰 해 보니까 치매라 하더라고. 그 때 알게 된 거지"

그때부터 영도 형님 어머니가 병간호를 했다고 합니다. 그러다 2년 후 갑자기 어머니가 뇌졸중으로 쓰러져 병원으로 실려갔고 뇌사상태로 계시다 돌아가셨다 합니다. 그 후 아버님의 치매 증세는 차츰 심해지기 시작했고 가족이 모여 논의한 결과 강원도 집을 정리하고 울산으로 아버지를 모셔오자고 의견을 모았다 합니다.

아버지가 먹기 좋게 잘게 잘라 왔습니다.
▲ 아버지에게 냉면 드시기 좋게 준비 아버지가 먹기 좋게 잘게 잘라 왔습니다.
ⓒ 변창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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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음엔 얼마간 큰 형님이 아버지를 모셨지. 그런데 생활이 힘들어 지는거야. 생계를 위해 직장 생활도 해야 하잖아. 치매 걸린 노인네가 자꾸만 어딜 나가시려 하니까 형수님도 힘드시고 형님도 힘드셨지. 그래서 다시 가족이 모여 의논을 했지. 병원으로 모시자 했어. 그수밖에 없잖아. 우리 형제가 잘사는 것도 아니고 다 고만고만 사는데 어쩌겠어. 할수 없지"

처음엔 나라에서 운영하는 치매전문 요양병원에 입원시켰다 합니다.

"처음에 치매병원에 대해 잘 몰랐어. 그래서 나라에서 운영하는 병원에 간거야. 시립요양병원이었지. 그런데 지내다 보니 이거 병원비가 장난 아니게 나오더라고. 다 먹고살기 빠듯한데 아버지 병원비 때문에 가정 생활이 많이 힘들어 지기 시작했어. 이거 안되겠다 싶더라고. 그래서 다시 의논 끝에 좀 더 비용이 덜 드는 병원으로 옮기게 되었어"

그래서 옮긴게 지금의 요양병원. 2009년 8월 초 경 일이라 합니다.

"2009년 설연휴 후 내가 미포조선 굴뚝에 올랐다가 구속되었었잖아. 아버지가 그나마 내가 구속 전에는 걷기도 하고 말도 잘하고 했는데 출소하고 아버지 만나보니 걷지도 못하고 말도 못하게 되었더라고. 병원이란 곳이 그렇잖아. 울타리 안에서만 지내야 하고 간호사는 대부분 박봉에다 피곤하니 일일이 세심하게 신경 쓸 겨를이 없잖아. 노인들 치매요양원 같은 경우 국가 차원에서 지원을 많이해서 우리같은 서민들 저렴하게 요양병원에 입원할 수 있어야 하는데 그게 안되고 있잖아. 지금 병원비도 한달 90만 원 정도 나오는데 3형제가 한달 30만원씩 부담하여 병원비를 충당하고 있어. 30만 원도 부담인데 만약 나혼자 요양비 90만 원 내야 한다면 어떻게 되겠어. 그래서 그런 말이 생긴 거 같아. (부모의) 긴 병에 효자 없다는 말 말이야. 그 말을 처음엔 이해 못했는데 아버지가 10년째 치매를 앓고 계시니까 이해 할 것 같더라고. 그렇다고 아버지를 외면하고 방치 할 순 없는 문제잖아. 가족 생계도 책임져야 하고 아버지도 돌보아야 하니 솔직히 많이 힘들어."

안타까웠습니다. 치매일 경우 산책도 자주하고 대화도 자주해야 하는데 자식들은 모두 먹고살기 바빠서 시간을 쪼개 병원 한번 왔다 가기도 어려운 실정이니...

잘게 자른 냉면을 입에 넣어 드리는 영도 형님
▲ 맛있게 드시는 영도형 아버지 잘게 자른 냉면을 입에 넣어 드리는 영도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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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는 병원에 도착 했습니다. 그 병원은 노인성 질병 전문 병원인지 모든 병실에 많이 나이드신 분들 뿐이었습니다. 영도 형님 아버님이 계신 병실에 들어가 보니 모두 세 분의 노인이 누워 계셨습니다. 내일이 어버이 날이라 그런지 병실마다 카네이션 꽃송이가 많이 보였습니다. 영도 형님 아버님 가슴에도 누가 다녀 갔는지 가슴 한켠에 카네이션 꽃송이가 달려 있었습니다. 아버님은 그 사실을 아시는지 모르시는지 그냥 가만히 계셨습니다. 무슨 이유인지 오른손과 고개를 계속해서 흔들고 있었습니다.

"아버지 저 왔어요. 영도가 왔어요."

영도 형님은 아버님 귀에다 대고 큰 소리로 그렇게 말했으나 잠이 드신건지 그냥 멍하니 계실 뿐이었습니다. 영도 형님은 어디선가 위생 물수건을 구해다 아버님 얼굴을 닦기 시작했습니다.

"아버지 제가 왔어요. 불효자식 영도가 왔어요. 제 목소리 들리세요? 우리 아버지가 저번 주 한 주 안 왔더니 기력이 더 쇠약해 지셨네. 눈도 많이 흐려 지시고..."

영도 형님
 영도 형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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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도 형님은 아버님 몸을 닦아 드리면서 말끝을 흐렸습니다. 눈도 어느새 곧 눈물이 쏟아질 것만 같아 보였습니다. 찡한 가슴을 숨기고 저는 그저 영도 형님을 지켜 보고만 있었습니다. 아버님을 다 닦아 드리고 나서 미리 식당에 들러 사온 냉면을 꺼내 병자용 식탁에 올려 놓았습니다.

"우리 아버지는 막국수하고 냉면을 참 좋아 하셨어. 아버지 냉면 드세요."

영도 형님이 나무 젓가락으로 조금 떠서 입에 갔다 대자 잠자는 듯 있던 아버님이 입을 크게 벌렸습니다. 영도 형님이 드린 냉면을 입에 넣고 오물오물 잘 씹어 드셨습니다.

"봐, 아버지가 냉면을 참 좋아 하시잖아. 병원에서 주는 죽을 주면 잘 안드시는데 냉면은 이렇게 잘 드시잖아."

아버님은 영도 형님이 입에 넣어 주는 대로 입을 벌려 잘 받아 드셨습니다.  올해 한국 나이로 83살이 되신 영도 형님 아버님. 이제 생명의 기력이 얼마 남지 않으신 듯 맥없이 그렇게 냉면을 받아 드셨습니다. 손발은 뼈에 가죽을 덮어 놓은 듯 말라 있었습니다. 숨만 쉬고 있을 뿐이었습니다. 간혹 뭐라 중얼거렸지만 아들인 영도 형님도 못 알아 들었습니다.

"저번에 올 때는 그래도 말은 알아 듣게 하셨는데 이제 말도 제대로 못가누시네."

영도 형님은 아버님이 안타까우신지 계속 아버지 아버지 하며 말을 걸었습니다. 하지만 아버님은 영도 형님의 애타는 부름에 아무 대답이 없었습니다. 그냥 주는 냉면만 오물오물 씹고 계실 뿐이었습니다.

"돌아 가실 때라도 좀 편안하게 돌아 가셔야 할텐데... 건강 할 때 잘 해 드려야지. 지금 이게 무슨 소용 있겠노."

영도 형님은 냉면을 떠 드리며 그렇게 안타까운 심정을 말했습니다.

8일이 어버이 날이라 병원에 또 오래 머물 수 없나 봅니다. 형수님에게 전화가 왔습니다. 저녁엔 가족이 함께 장모님을 또 뵈러 가기로 했나 봅니다.

"아버지 다음주 토요일 또 올게요. 그 때까지 건강히 잘 계세요"

영도 형님은 이번에 병원 가서 아버님께 냉면 한그릇 대접했습니다. 영도 형님은 다시 시내로 접어 들면서 말했습니다.

"몇 년 전에 우리 아들에게 살아 생전 할머니 할아버지께 잘 해 드리라며 불효자는 웁니다를 불러 줬더니 막 울더구만"

그렇게 말한 후 영도 형님은 운전 하면서 갑자기 노래를 불렀습니다.

"불러봐도~ 울어봐도~ 못오실 어머님을~ 원통해 불러보오오고~ 땅을 치며 통곡해도 다시 못 올~ 오머니여~ 불초한 이자식은 생전에 지은 죄를 엎드려~ 빕~니~다~"

"이 노래 부르니 갑자기 눈물이 나네."

우리는 그 노래를 합창 했습니다. 승용차 안이 떠나가라 큰 소리로 목놓아 불렀습니다. 노래를 부른 후 영도 형님은 눈물을 훔쳤습니다. 저도 제 볼을 타고 흐르는 눈물을 옷소매로 닦아 냈습니다.

아버지는 지금의 병원으로 오신지 2년이 다되어 갑니다.
▲ 아버지 진찰표 아버지는 지금의 병원으로 오신지 2년이 다되어 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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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효자, #이영도, #어버이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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