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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 떠남

일 년에 대 여섯 차례쯤 아들과 서울여행을 한다. 각자의 목적과 기대감은 다르지만 우리의 서울행은 엇박자를 낸 적이 없다. 지난 토요일(18일) 갑자기 서울행을 하게 되었다. 고향 친구가 중병에 걸려 입원했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올라갔다. 마침 3일 간의 연휴기간이라 아들에게 동행을 제의했다.

아들은 나의 제의에 흔쾌히 뜻을 같이했다. 아침에 일어나 대충 아침을 챙겨먹고 집을 나섰다. 늦은 봄볕을 혼자 즐겨야하는 아내에게 미안했지만 우리의 발걸음은 가벼웠다. 고속버스터미널에서 뇌 속 데이터에 잠시 혼선이 오는 바람에 강남고속버스터미널로 간다는 것이 그만 동서울행을 타게 되었다. 여행의 기본원칙은 설령 실수를 했다고 할지라도 그대로 즐기는 것. 아들과 터미널 의자에 20분쯤 걸터앉아 지나가는 행인들을 구경하다보니 버스시간이 다 되었다.

둘. 허탕

아들과 서울로 향하면서 점심밥을 먼저 먹은 뒤 움직이자고 약속했다. 설렁탕을 좋아하는 아들은 지난번에 먹어 보지 못한 '하동관' 곰탕을 먹어보고 싶어 했다. "그러마" 약속을 했지만 내 발걸음은 어찌어찌하여 친구가 입원해 있는 경희대학교 의료원으로 향하고 있었다. 휘경동에 있는 경희대 의료원은 전철을 두 번 갈아타고도 또 다시 마을버스를 타야 하는 번거로움이 있었다.

휘적휘적 마을버스에서 내려 안내데스크에서 환자의 이름으로 문의하는데 그런 환자가 없다고 한다. 어찌된 영문인가 싶어 당혹스런 표정으로 서 있자 뒤쪽에 있던 직원이 쪽지 하나를 내밀며 강동구에도 병원이 있다고 알려준다. 친구는 강동구 고덕동의 경희의료원에 입원 중이었다. 휘경동에서 강동구 고덕동이라! 오가는 시간과 거리조절이 안돼서 또 다시 멍한 표정으로 바닥을 내려다보다가 우선 점심부터 먹고 보자고 마음먹었다.

셋. 하동관

또 다시 지하철 4호선을 갈아타고 명동에서 내렸다. 연휴가 겹치는 토요일이라서 붐빌 줄만 알았던 명동은 예상외로 한산했다. 그토록 많았던 일본인 관광객도 많지 않았다. 명동역에서 사람들을 뚫고 명동 입구까지 내려갔다. 헌데 하동관이 없다.

분명 지난번에는 입구 쪽 골목 안에 있었는데, 처마에 기와를 얹은 인테리어도 기억나는데 도통 생각이 나질 않는다. 두 세 골목을 헤매다가 노점상 아저씨에게 물어 하동관에 입성했다. 토요일 오후의 하동관도 생각보다는 한산했다. 테이블도 한두 개가 비어 있어 오래 전 줄서서 먹었던 기억을 희석시켰다.

자리에 앉자마자 곰탕 두 그릇을 시켰다. 진헌이 것은 특, 내 것은 보통. 특은 1만 2천 원이고 보통은 1만 원이었다. 음식값이 선불이라 호주머니를 뒤적이는데 아들놈이 재빨리 2천 원은 자기가 내겠다며 지갑을 꺼내든다. 햐, 누구 아들놈인지 싸가지가 있네!

혼자 흐뭇한 미소를 짓고 있는데 주인아주머니가 큰 소리로 '요즘 세상에 보기 드문 아이라'며 칭찬 덤터기를 씌운다. 하동관의 곰탕은 을지로 옛 집에 있을 때보다 값이 많이 올랐지만 맛은 여전했다. 나는 솔직히 120년 역사의 이문설렁탕보다 뒷맛이 고소한 하동관 곰탕을 좋아한다. 김치와 깍두기도 양념을 적게 해서 시원하고 담백한 하동관 것이 좋다. 아들도 나와 같은 취향이었다. 맛있게 한 그릇씩 비우고 문을 나서는데 서울 볼일 다 본 것처럼 뿌듯하다.

넷. 연극 '일곱집매'를 보다

대안중고등학교에서 역사를 가르치는 제자를 통해 이양구라는 작가를 알게 되었다. 안정리 햇살복지회를 오가며 기지촌여성들에 대하여 관심을 갖기에 도움이 될까 해서 내가 쓴 글 몇 편을 주고받으며 제법 가까운 사이가 되었다. 이양구 작가가 기지촌 여성의 문제를 '일곱집매'라는 연극으로 만들어 무대에 올린다는 소식을 전해왔다.

꼭 모시고 싶으니 관람하시라는 메시지였지만 빠듯한 시간이 서울행을 어렵게 만들었다.
그러던 차에 부득이 서울행을 하게 되었고, 점심을 먹은 뒤 두 서너 시간이 남는 호재를 만났다. 전화를 걸어 공연을 문의하고 아들과 함께 혜화동행 4호선 전철을 탔다. 혜화동에서 내린 뒤 오래 전 기억을 더듬으며 연무소극장을 찾았다.

혜화동로터리에서 파출소를 끼고 언덕빼기를 오르니 붉은 벽돌로 지은 교회건물 지하에 연우소극장이 보였다. 무대는 50여 명이 앉을 만한 작은 규모였지만 관객과의 소통을 염두에 둔 좌석배치가 맘에 들었다.

막이 오르고 연극이 시작되었다. 사회고발 다큐를 보는듯한 연극이었지만 작품은 배우들의 뛰어난 연기와 기지촌문제라는 사회적 이슈가 어우러져 전혀 지루하지 않았다. 하지만 그것은 나만의 느낌. 30분쯤 지났을까, 사정없이 졸아대는 아들의 모습이 보였다. 극장의 등받이가 낮은 것이 맘에 걸려 자리를 바꿔주자 편안한 자세로 벽에 기대어 잠이 든다.

아들은 졸멍쉬멍 연극을 관람하고, 기지촌의 사정을 조금이나마 알고 있는 나는 탐독하듯 열심히 공감하며 관람을 하였다. 2시간 30분이라는 긴 공연이 끝난 뒤 한홍구 교수의 짧은 강연과 관객과의 대화 시간이 있었다. 강연 뒤 이양구 작가의 소개로 나도 관객들에게 소개되었다. 공연 뒤 아들에게 물었다.

"너 연극이 처음이지. 어땠어?"
호기심 어린 나의 물음에 아들은 '그냥, 좋은 것 같기도 하고...'라며 뒷말을 흐린다. 아들의 못다 한 말이 납득이 되어서 고개만 끄덕이고 극장을 나왔다.

다섯. 벗

같은 사회적 처지에서 자주 만나 어울리는 사람을 벗이라고 한다. 그래서 벗은 친구, 동무와 같은 의미로 쓰인다. 50평생을 살면서 많은 벗들과 함께 하였다. 그 가운데는 고향친구도 있고,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대학교 그리고 사회에서 만난 친구도 있다. 여러 벗들 가운데 고향친구는 특별한 의미다.

고향친구는 고향산천을 함께 공유했고, 마을공동체를 공유했으며, 서로의 사정과 처지를 속속들이 알고 있는 사이다. 그래서인지 일 년에 두세 번 만날 뿐이지만 매일 만난 것처럼 친근하다. 고향친구 가운데 선이가 있다. 초등학교 시절에는 절친으로 지냈고 그 뒤로도 서로에 대한 기대와 신뢰를 버리지 않았던 친구다.

그 친구가 말기암에 걸렸다. 평소 담배를 3갑이나 피웠고, 술도 즐겼던 친구라 한두 번 잔병치례쯤은 납득이 되지만 말기암이라는 사실은 납득할 수도, 납득하고 싶지도 않았다.
이번 서울행의 가장 큰 목적은 친구 병문안이었다. 잘못된 정보를 믿다가 휘경동까지 가서 헤매었고, 연극이 끝난 뒤 잠시 지체하는 바람에 시간은 7시가 다 되어갔다. 서둘러 5호선을 타고 강동구 고덕동에 내려서 친구에게 가져다 줄 과일 몇 가지를 샀다. 친구 아내가 지키는 병실에 들어서서 나는 한동안 말을 잊었다.

아직도 멀쩡한데, 쌩쌩한데, 앞날을 예측할 수 없다니... 병문안을 마치고 아들과 늦은 저녁을 먹었다. 식도를 타고 밥이 넘어간다. 나는 살아 있다. 나의 벗 선이도 병마를 잘 이겨내서 늘 밥상을 함께 나눴으면 좋겠다.


태그:#여행, #벗, #아들과 함께, #서울, #병문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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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연구를 하고 있으며 평택인문연구소장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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