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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프리카 속담 중에 '한 아이가 제대로 자라려면 온 마을이 필요하다'는 말이 있다고 한다. 생각해 보면 우리 역시 오래지 않은 과거에 그렇게 아이들을 키웠다. 니네 내네 없이 동네 아이들을 모두 내 자식 같이 보살폈고, 잘못한 일이 있을 때는 내 자식에게 하듯 거침 없이 꾸짖었다.

아이들도 그런 문화를 당연시해 밖에서 아무리 거칠게 놀아도 마을 어귀에 들어설 때면 흐트러진 매무새를 바로잡곤 했다. 마을은 아이들에게 공동체의식과 예절, 사회적 가치를 가르쳤다. 인성교육이 따로 필요 없던 시절이었다. 그것이 우리의 큰 자산이고, 미덕인줄도 모르는 채 거대한 변화흐름 속에 '마을'의 교육기능은 빠르게 사라져 갔다. 가정도 학교도 그 역할을 대신하지 못해 아이들의 정서는 날로 궁핍해지고, 이를 보듬기 위한 제도들은 생각만큼 성과를 거두지 못하고 있다. 사회적 가치와 삶의 철학에 대한 성찰 없이는 해결책이 없어보이는 이 큰 숙제, 잠시 숨을 고르고 한 사람을 본다. 지금 딛고 선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실천이 사회를 바꾸는 첫 걸음이 될 것이라는 믿음으로. [편집자말]
"학부모 아닌 부모가 되고싶다"

김혜경씨.
 김혜경씨.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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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혜경(50)씨는 딸 윤정(예산여중3)이의 초등학교, 중학교 34년 선배다. 오는 3월 윤정이가 예산여고에 입학하면 고등학교까지 동문이 된다. 34살에 낳은 딸은 꼭 그 숫자만큼 그가 걸어온 길을 따라 걷고 있다. 그도 온 길을 딸과 함께 다시 걷는다.

김씨는 행여 자신의 욕심이 딸의 꿈을 방해할까 늘 경계한다. 덕분에 모녀는 지금까지 친구같은 관계를 유지하고 있다.

재작년, 딸의 사춘기가 시작되자 주방에 TV를 옮겨놓고 요리를 하면서 아이돌 그룹 멤버의 이름을 다 외우고, 노래를 따라 배웠다는 김씨. 자신만의 방을 만드는 아이에게 "왜 대답하지 않느냐", "왜 방문 닫냐"고 묻지 않고, 그저 이해하고 소통하기 위한 노력이었다.

"처음엔 낯설었는데 자꾸 보고 들으니까, 요즘 아이돌 노래가 좋아지더라구요. 딸아이도, 저도 엑소(EXO) 백현 팬이예요. TV를 보다가 백현이 나오면 소리를 지르며 딸아이를 부르죠. 어쩜 백현은 손도 예쁘냐하면서 수다도 떨고…"

덕분에 딸의 사춘기는 아주 짧은 시간에 끝이 났다. 더 나은 대학에 보내기 위해 공부하라고 다그치는 '학부모'가 아니라, 마음을 보듬어 주는 '부모'로 남고 싶다는 김씨는 딸에게 가끔씩 확인을 한단다.

"엄마는 학부모니, 부모니?", "엄마? 부모에 가깝지~"

떴다, 예산여중 등굣길 지킴이

한겨울 강추위에도 김혜경씨의 손짓은 쉴새가 없다. 질주하는 차들에 행여 학생들이 다칠까 차도 가운데선 김씨가 차량들을 통제하고 있다. 차량이 뜸할 때는 등교하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 무한정보신문
 한겨울 강추위에도 김혜경씨의 손짓은 쉴새가 없다. 질주하는 차들에 행여 학생들이 다칠까 차도 가운데선 김씨가 차량들을 통제하고 있다. 차량이 뜸할 때는 등교하는 아이들과 이야기를 나누기도 한다. ⓒ 무한정보신문
ⓒ 장선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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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전 8시를 전후해 예산읍 발연리 휴먼시아아파트 삼거리를 지나는 이들 사이에서 김씨는 유명인사다. 방학을 제외한 학기 중에는 하루도 빠짐없이 이 곳을 지키는 사람, 눈보라나 비바람이 칠 때도 늘 정갈한 제복에 야광봉을 들고 수신호하는 사람, 그는 예산여중 교통안전지킴이다.

김씨가 지키는 삼거리는 4차선 도로로 횡단보도가 3개나 몰려 있다. 등교시간에는 신호등이 운영되지만 정지신호를 무시하는 차량들 때문에 사고위험이 도사리는 곳이다. 지각을 안하려고 신호가 바뀌기 무섭게 달려 건너거나, 급한 마음에 보행자 신호를 무시하고 건너는 학생들도 있다.

차량의 흐름을 해치지 않으면서 아이들의 안전을 살피는 일은 늘 긴장의 연속이다. 호루라기로도 안될 때는 "얘들아, 뛰지마. 넘어져", "신호 바뀌었다. 건너" 같이 생목소리로 연신 신호를 보낸다.

정작 그의 딸은 이길로 등교하지 않는데 김씨는 3년내 이곳을 지켰다.

"제 딸만 딸인가요. 학교에 가면 모두에게 '딸!' 이라고 불러요. 가끔 우리애가 '엄만 다 딸이야'라고 뾰로통하지만, 어쩌겠어요? 전부 내 자식 같이 이쁘기만 한데…"

아이들은 등굣길 수신호를 하다가도 틈만 나면 '엄마 잔소리'를 해대는 김씨와 웃으며 소통을 한다. 내 엄마였다면 짜증부터 났겠지만, 친구 엄마이기에 날 세우지 않고 듣는, 그런게 바로 동네어른의 순기능이다.

딸이 초등학교에 입학하면서부터 시작했으니, 벌써 9년을 꽉 채운 시간이다. 이 일 때문에 새벽 6시 전에는 일어나야 하고, 오전 7시 40분께부터 1시간은 길에 서있어야 하니 꾀가 날 법도 한데 그는 "매일 아침 아이들 만나 인사하고 안전하게 길을 건네주다보면 힘이 나고 힐링이 된다. 전혀 어렵지 않다"고 한다.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일부터

지난 6월에는 이 곳에서 교통지도를 하다 사고를 당해 무릎에 금이 가고 어깨가 파열되는 중상을 입었지만, 퇴원하고 어느정도 회복이 되자, 바로 복귀한 김씨다.

"아이들을 못보니까 병이 날 것 같더라구요. 이 일이 어느새 삶의 목표가 된 것 같아요."

인도가 아닌, 차도 가운데에서 수신호를 하는 방식이기 때문에 사고 뒤 두려움이 생길법도 하건만 "사고가 났을 때도 차라리 제가 다쳐서 다행이다 싶었어요. 안그랬으면 횡단보도에서 기다리던 아이들 예닐곱 명이 다 다칠뻔 했거든요"라면서 웃는다.

올 겨울처럼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면 김씨는 더 바빠진다. 그의 차에는 늘 밀대와 대빗자루가 실려있다. 동네에서부터 가져온 연탄재도 종종 등장한다. 덕분에 등교하는 아이들은 미끄러지기 쉬운 횡단보도 턱을 무사통과할 수 있다. 그렇게 살뜰한 그가 딸과 함께 졸업을 하고 새학기에는 예산여고로 간다니, 학교(예산여중)에서는 여간 섭섭해 하는 것이 아니다.

"저도 서운하죠. 하지만 어쩌겠어요? 우리 딸이 졸업하면 저도 졸업, 입학하면 저도 입학인데…"

그런 마음을 담아 김씨는 지난 12월 초 예산여중에 옥외대형시계 설치와 급식실 바닥공사비용으로 350만 원을 기탁했다. 학교 구성원들이 가장 불편해하는 것이 무엇인지 평소 관심을 갖고 살펴본 덕분에 꼭 필요한 시설을 갖출 수 있도록 지정 기탁한 것이다.

"사실 오래전부터 생각했던 일이예요. 요즘은 다들 시계를 안차고 다니니까 체육시간이나 야외활동을 할 때 핸드폰을 항상 들여다볼 수도 없고 불편하겠더라구요. 급식실은 일하시는 분들 작업하기가 힘든 곳이 한군데 있어서 계속 마음이 쓰였어요."

하지만 김씨는 딸이 재학 중에는 자칫 오해를 살까 시기를 늦출 수밖에 없었다고 한다. 그가 딸의 중3 생활기록부 기재가 끝난 뒤에야 기탁을 한 이유다.

"학부모로서가 아니라, 졸업생으로서 후배들을 위해 하고 싶었던 일이예요."

알고 보니 김씨는 윤정이가 중앙초를 졸업할 때도 교통안전지킴이를 마치면서 도서실 의자교체비용 70만 원을 전달했다고 한다.

오로지 내 아이만 생각하고, 아이에게 경쟁에서 이겨야 한다고 가르치는 부모들이 더 많은 세상에 "내 아이의 친구가 행복하지 않은데, 같은 시대를 사는 또래 아이들이 행복하지 않은데, 내 아이만 행복할 수 있겠느냐"며 자신의 자리에서 할 수 있는 일부터 실천하는 김혜경씨.

이변이 없는 한 3월부터는 아침마다 예산여고 근처 어느 도로에서 그를 만나게 될 것이다. 트레이드마크인 자연산 흰머리를 멋지게 휘날리며 수신호를 하고 있는.

덧붙이는 글 | 충남 예산에서 발행되는 지역신문 <무한정보신문>과 인터넷신문 <예스무한>에도 실렸습니다.



태그:#행복한삶, #김혜경, #예산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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