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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풍세 효자비'의 비각 앞 안내판
 '성풍세 효자비'의 비각 앞 안내판
ⓒ 정만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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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상북도 문화재자료 112호인 '성풍세 효자비(成豊世 孝子碑)'는 고령군 다산면 나정동 127번지에 있다. 이렇게 말하는 것은 첫째, 이 효자비를 답사할 분들에게 친절을 베풀고 싶어서이다. 둘째, 효자비를 보호하고 있는 비각(碑閣) 앞의 안내판에 주소가 빠져 있기 때문이다. 본래 문화재의 현지 안내판은 그것의 공식 이름('포석정'이 아니라 '경주 포석정지(鮑石亭址)' 식), 등급(국보, 보물 등), 소재지(주소)부터 밝힌 후 그 아래에 해설을 붙여 둔다.

문화재청 누리집의 해설과 내용이 대동소이한 이곳 안내판의 본문을 읽어본다. 주소는 빠져 있지만 핵심을 잘 정리한 문장이어서 읽기에 아주 좋다. 먼저 안내판은 이 비를 '이름난 효자였던 성풍세(1572~1649)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영조 44년(1768)에 건립된 효자비'라고 정의한다. 안내판은 답사자에게 네 가지 사실을 알려주고 있는 것이다.

성풍세가 얼마나 이름난 효자였는지 말해주는 안내판 

안내판은 기림의 대상이 된 인물(성풍세), 그가 기림을 받게 덕목(효행), 비석 건립 시기(1768년)를 드러나게 밝히고 있다. 그런데 좀 더 세심한 독자는 겉으로 강조된 이 세 가지만이 아니라 한 가지 더 중요한 사실을 파악하게 된다. 안내판의 본문은 성풍세가 얼마나 '이름난 효자'였던가를 글 속에 품고 있기 때문이다. 성풍세는 본인이 죽고 나서 무려 119년이나 지난 뒤에 효자비가 세워졌다. 이는 그가 잠깐 동안만 기억되는 데 머물지 않고 1세기 이상이 지난 후세에도 변함없이 회자되었던 대단한 효자였음을 증언한다.

성풍세 효자비(아래 효자비)는 '거북 모양의 받침대 위에 높이 0.86m(폭 0.45m)의 비신(碑身, 빗돌)을 세우고 반원형의 연꽃 문양을 조각한 비 머리를 얹어 놓았다.' 이 효자비는 '임진왜란 때 (경북) 성주 노곡에 피난갔던 성풍세가 난세로 세상이 어려웠음에도 낮에는 의병에 가담하고 밤에는 노모를 극진하게 봉양함으로써 다른 사람들에게 큰 감동을 주었'으므로 조정과 마을사람들이 앞다투어 세운 기념물이다.

성풍세 효자비와 비각으로 들어가는 문
 성풍세 효자비와 비각으로 들어가는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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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정에서는 (성풍세) 효자를 표창하는 정문을 내려 충효의 근본으로 삼고자 하였다. 마을사람들도 성풍세의 효행을 기리기 위해 1764년 성만징(成晩徵)이 효행에 대한 기록을 쓰고, 1768년 비 앞면에 '효자성공휘풍세지비(孝子成公諱豊世之碑)'를 새겼다. 비각 내에 숙종 38년(1712) 조정에서 내린 '효자성풍세지려(孝子成豊世之閭)'의 정문이 세워져 있다.'

답사자들은 흔히 문화재 앞에서 생소한 한자어와 어색한 대화를 나누게 된다. 지금도 예외가 아니다. '조정, 정문, 성공(公: 존칭)휘(諱: 이름)풍세, 지려(之閭: ~의 집, ~의 마을)' 등은 여전히 그 뜻을 정확하게 가늠하기 어렵다.

조정(朝廷)은 아침(朝)과 관청(廷)의 결합 정도로 이해하면 된다. 아침마다 임금은 나라의 중요 정책을 결정하기 위해 고위 관리들과 회의를 했다. 그러므로 안내판의 '조정에서는 (성풍세) 효자를 표창하는 정문을 내려 충효의 근본으로 삼고자 하였다'라는 표현은 임금과 고위 신하들이 아침 회의를 통해 그런 결정을 내렸다는 뜻이다. 비유적으로 말하면, 임금과 고관들은 아침 회의를 통해 '나라의 아침'을 열고자 했다.

안내판은 효자 성풍세에게 조정의 '정문'이 내려졌다고 설명한다. 정문(旌門)은 충신, 효자, 열녀들을 표창하기 위해 나라에서 그의 집이나 마을 앞에 세워준 붉은 문을 말한다. 사찰 일주문(一柱門)처럼 기둥(柱)이 좌우로 각각 하나(一)뿐인 정문을 민간에서는 흔히 홍살문이라 부른다.

그렇다면 숙종 38년(1712) 조정에서 내린 '효자성풍세지려의 정문이 비각 내에 세워져 있다'라는 표현은 언뜻 이해가 안 된다. 거대한 홍살문이 이 작은 비각 안에 세워져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아니고, 비각 안에 '효자 성풍세의 집, 효자 성풍세의 마을'을 의미하는 '효자성풍세지려(孝子成豊世之閭)' 일곱 글자가 편액에 새겨져 걸려 있다는 뜻이다. 앞에서 이곳 안내판이 문화재청의 해설과 대동소이하다고 했는데, 문화재청의 표현은 '효자성풍세지려의 정문이 새겨져 있다'로 되어 있다.

성풍세 효자비의 비각이 담장 너머로 보이는 모습
 성풍세 효자비의 비각이 담장 너머로 보이는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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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까지 읽은 내용은 비각 담장 바로앞에 있는 안내판의 것이다. 그런데 현지에 가 보면 도로변에 더 큰 안내판이 하나 더 세워져 있다. 물론 크기만큼 내용이 더 풍부하고 상세하다. '성효자 효행지(成孝子孝行誌)'라는 제목의 안내판 내용을 문장을 가다듬어가며 읽어본다.

'공께서는 임진왜란이 일어났을 때 노모를 성주 성산 고곡으로 모셨다. 모자는 서로를 의지하며 피란살이를 했다. 하지만 지성으로 노모를 봉양하고 직접 취사를 보살피던 공에게 입대하라는 나라의 부름이 왔다. 노모 봉양의 큰 걱정을 뒤로 한 채 공은 상주진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공은 낮이면 충성스런 군인으로 활동했다. 그러나 밤이면 백팔십 리 길을 달려 모친의 식사를 돌본 뒤 새벽녘에 다시 군대로 돌아갔다. 저녁마다 사라지는 공을 이상하게 여긴 부대장이 장교 2인에게 미행해 보라고 시켰다. 그런데 병영 문에는 큰 호랑이가 미리 와서 기다리고 있고, 공은 마치 자기 말을 타듯 호랑이 등에 올라 노모에게 달려가는 것이 아닌가! 두 장교가 본 대로 전하니 부대장과 모든 군사들은 놀라지 않을 수 없었고, 공의 효심에 크게 감동하였다.'

낙동강 잉어도 알아본 성풍세의 효심

성풍세 효자비 비각
 성풍세 효자비 비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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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번은 공의 일행이 경남 창녕에 성묘를 다녀오던 중 큰 비를 만나 낙동강을 건너지 못한 일이 있었다. 그때 갑자기 빈 배 한 척이 나타났다. 하지만 수심이 깊고 물살이 세어 아무도 감히 배에 탈 엄두를 내지 못했다. 공이 주위를 물리치고 앞서 승선하니 배가 저절로 물길을 거슬러 강을 건너갔다.

노모께서 연세가 83세에 이르러 노환을 앓으시면서 한겨울에 잉어가 필요해졌다. 공께서 도끼로 강의 두꺼운 얼음을 깨니 잉어가 솟구쳐 올라왔다. 대구로 약을 구하러 가는 길에 (대구 화원) 사문진나루를 건널 때에도 잉어가 배 위로 올라왔다.

사공이 잉어를 자기 것이라고 고집했다. 값을 치르고 난 공이 잉어의 꼬리를 끊고는 강물에 다시 넣으며 "돌아올 때 가져가겠다" 하고 말했다. 지켜보고 있던 사람들은 한결같이 공을 비웃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뱃길에 과연 꼬리 잘린 잉어가 배 안으로 뛰어 올라왔다. 모두가 감복하여 공의 발 아래 엎드리지 않는 이가 없었다.'

성풍세의 잉어 전설이 서려 있는 사문진의 겨울
 성풍세의 잉어 전설이 서려 있는 사문진의 겨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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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모의 병환에 싱싱한 대추가 필요했다. 한겨울에 어찌 그것을 구할 수 있다는 말인가. 그런데도 공은 눈보라 속을 헤매며 생대추를 구해 방황했다. 그때 얼기설기 엉킨 산속 거미줄에 싱싱한 대추가 걸려 있는 것이었다.

모친이 83세로 타계하셨다. 공의 슬픔은 하늘에 닿는 듯하였다. 노모를 잘 모시지 못했다는 죄책감으로 공은 고기를 먹지 않았다. 하지만 모친의 묘소를 3년 동안 지키기 위해 설치해둔 상막(喪幕)에는 귀한 음식이 끊이지 않게 했다.

그래도 하루는 상막에 올릴 반찬이 마땅찮아 걱정하고 있었다. 그때 산꿩이 스스로 날아와 죽음으로써 공의 걱정을 풀어주기도 했다. 꿈에, 모친 상막을 같이 지켜주던 호랑이가 죽었다. 공이 모친의 산소로 올라가보니 그곳에 호랑이가 죽어 있었다. 공은 눈물을 흘리며 호랑이를 장사지내 주었다. 공은 이와 같이 효성이 지극하였으므로 조정의 표창을 받아 정려되었다.'

안내판은 추가 설명이 더 필요 없을 만큼 소상하다. 구체적이고 세세하게 쓰면 설득력이 올라간다는 글쓰기의 원칙을 잘 지키고 있다. 그래도 '이 이야기가 사실인가?' 하고 의아심을 가질 일부 독자들을 위해 한 가지만 덧붙이고자 한다.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성효자 효행지> 안내판
 도로변에 세워져 있는 <성효자 효행지> 안내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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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에서 내려온 아버지 환웅과 곰에서 사람으로 변한 어머니 웅녀 사이에서 태어난 단군의 신화는 사실인가? 일연은 <삼국유사>의 첫머리를 단군신화로 장식했다. 일연은 의심하지 말라고 말하고 있는 것이다.  

역사와 설화는 표현 기법이 다르다. 역사는 고증을 바탕으로 서술되어야 하지만 설화는 비유와 상징을 형상화의 주된 기법으로 활용하는 문학으로 읽어야 한다. 독자는 신화, 전설, 민담이 무엇을 말하려고 하는지, 그 주제에 주목해야 한다는 말이다.

임진왜란 당시와 그 이후 사람들은 성풍세가 실제로 호랑이의 등을 타고 다녔는지 여부에 주안점을 두지 않았다. 실제로 그랬을 수도 있고, 설혹 그렇지 않았다고 한들 그게 무슨 대수인가. 성풍세는 마음과 몸에 최선의 진정을 담아 노모를 봉양했다. 그것이 중요하다. 사람들은 그래서, 그가 호랑이의 등을 타고 다녔고, 또는 그토록 빨리 상주와 성주 사이 백팔십 리를 밤마다 왕복할 수 있었다고 믿었다.

무슨 일을 하든 진심으로 하라. 성풍세는 우리에게 그것을 가르쳐 주고 있다.


태그:#성풍세, #임진왜란, #의병, #다산, #효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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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편소설 <한인애국단><의열단><대한광복회><딸아, 울지 마라><백령도> 등과 역사기행서 <전국 임진왜란 유적 답사여행 총서(전 10권)>, <대구 독립운동유적 100곳 답사여행(2019 대구시 선정 '올해의 책')>, <삼국사기로 떠나는 경주여행>,<김유신과 떠나는 삼국여행> 등을 저술했고, 대구시 교육위원, 중고교 교사와 대학강사로 일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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