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마침내 11월 12일의 아침이 밝았다. 나는 꾸물대던 통에 전날 미리 서울행 교통편 예약도 해놓지 않은 채 집으로 왔다. 갑자기 지방(대구)에서 서울로 간다는 것이 쉬운 일처럼 여겨지지는 않았으나 무엇보다 역사의 현장에 달려가고 싶은 욕구를 강하게 느꼈다. 이에 나는 동대구역에서 10시 54분에 출발하는 무궁화호 입석표를 구입했다.

이미 고속버스, 고속열차 등 다른 교통편은 매진상태였다. 비록 주말이기는 했으나 민중총궐기로 달려가는 지역민이 많기 때문이리라. 실제 열차에 탑승하자 출입구는 물론이고, 열차카페 차량에도 사람들로 가득 차 있었다. 나는 자리가 난 가장자리 한 켠의 열차 바닥에 앉았다. 그런 한편으로 내심 이 많은 승객들 중 과연 몇 명이 민중총궐기로 달려가는 사람들일까 궁금했다. 한참 시간이 흘러 대전역을 지나자 내 주위에서 철도노조 복장을 한 사람, 또 박근혜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나누는 부부 등 민중총궐기 현장으로 가는 것으로 보이는 몇몇 승객들이 눈에 띄었다.

오후 3시쯤이 다되어 서울역에서 내렸다. 서울역 앞마당에선 어디서 주최했는지는 알 수 없으나 이미 소규모의 집회가 열리고 있었다. 역 앞에서 길을 건너자 '대한당'이라는 유령 정당이 내건 현수막이 보였다. 그 내용은 "박근혜 하야반대"였고, 박근혜 하야 주장을 종북으로 모는 것이었다. 이 와중에도 수구세력의 공작은 여전하구나 싶었다. 그러나 이제 이 따위 저열한 공작도 오늘 우리 역사의 대세, 시대의 조류를 꺾을 수는 없으리라.

나는 서울시청 광장까지 걷기로 마음먹었다. 남대문 교차로에 이르러 국민은행 쪽으로 돌아보자 수 없이 많은 각 지역군 '농민회' 깃발과 인파가 왕복 12차선 도로를 모두 점령하고 있었다. 그 깃발들에는 하동, 함평, 영광, 나주 등등 전국 각지의 지명이 다 보였다. 전국에서 상경한 농민들이 집결한 것이었다.

민중총궐기 공식 행사 시작은 오후 4시로 예정되어 있었지만, 이미 여기서부터 해방구였다. 경찰은 자취도 보이지 않았다. 청와대 방면에만 집중 배치되었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인도를 지나다가 앞면에는 "박근혜 퇴진", 뒷면에는 "쌀값인상"이라 적힌 피켓을 얻었다. 그런 뒤 서울시청 광장 쪽을 향해 걸었다. 더 이상 도로와 인도의 구분은 무의미했다. 3시 40분쯤, 농민 집회 현장을 지나 덕수궁 대한문 앞에 이르러 멈추어 섰다. 저 앞쪽으로 광화문 광장과 청와대가 어렴풋이 보였다.

서울광장은 이날 집회를 주관한 민주노총의 노동자들로 빼곡했다. 내 곁에는 광주에서 상경한 60, 70대로 보이는 여성노동자들이 한 무리를 이루고 있었고, 또 노점상연합회가 적힌 깃발이 보였다. 이때까지만 해도 농민 집회현장과 민주노총 집회현장 사이의 도로가 인파로 꽉 찬 것은 아니었다. 노동자, 빈민 등 주도적 참가자들이 집회의 주축이었다. 하지만 도로 양쪽에서 시민들이 가족 단위나 연인, 혹은 개인별로 촛불이나 피켓을 들고 삼삼오오 계속 합류했다. 공식행사가 시작되고 오후 4시 25분쯤이 되자 도로건, 인도건 인파로 인해 발 디딜 틈이 없었다. 그럼에도 집회에 합류하는 행렬은 공식 행사가 끝나고 행진이 시작될 무렵까지 끊이지 않았다.

감격스러웠다. 2013년 국가기관 대선개입 진상이 조금씩 드러나며 촛불이 시작됐을 때, 그리고 2014년 세월호 참사 당시 촛불이 켜졌을 때만 해도 왜 촛불이 이 이상 커지지 않는지 안타깝고 답답했지만, 노동자, 농민, 빈민 등 소외받고 탄압받던 기층 민중들뿐만 아니라 세월호, 사드, 강정 등 전국에서 그동안 이명박·박근혜 정권에 의해 '당하던 사람들'이 한 자리에 총집결하면서 이제 더 이상 경찰도 포위할 수 없을 만큼,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촛불은 활화산이 된 것이다. 이처럼 이날의 현장은, '용삼참사·쌍용차·세월호·백남기로 상징되는 죽음의 시대'를 거치며 살아남은 사람들이 억울하게 희생된 영혼들에 대해 '산 자의 몫'을 다하고 있는 현장이기도 했다. 나 역시 산 자의 몫을 다해야겠다고 다짐했다.

나는 이날 집회에서 "민중"이 언급될 때마다 민중 담론의 끈질긴 생명력과 사상의 힘을 절감하며 '민중직접혁명'을 주창한 단재 신채호를 떠올렸다. 그렇다. 민중사상과 민중직접혁명이야말로 지배자에 맞설 수 있는 사상과 실천의 동력이자 힘인 것이다. 민중담론이 죽지 않는 한, 한국 민중의 저항 전통 역시 지속될 것이다! 다만 적어도 내 주위에선, 공식 행사 도중 "한상균 석방하라!" 구호보다 "박근혜 퇴진하라" 구호에 일반시민들의 호응이 더 높았다. 그래서일까?

행사의 사회자는 "한상균 석방하라"를 다시 "양심수 석방하라"로 바꾸어 외치기도 했다. 이 괴리를 어떻게 풀어야 할까. 순간 고민스러웠다. 총집결에 더해 혁명적 열기를 기대할 수는 없는 것일까? 물론 이날 민주노총과 시민들은 "박근혜 퇴진"을 공유하였고, 민주노총이 주관한 집회에 시민들이 대규모로 참가했으니 형식적 연대는 이루어졌다고 볼 수도 있겠지만, '노동자가 곧 시민이며 시민이 곧 노동자'라는 의식에 토대를 둔 勞-民연대, 즉 '의식적 연대'까지 이루어져야 혁명을 향한 민중적 연대라 할 수 있지 않을까? 이는 그만큼 우리 사회가 아직 지배세력이 짜놓은 프레임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다는 의미이기도 할 것이다.

오후 5시가 넘어 마침내 행진을 시작했다. 대규모 인원이 집결한 만큼, 행진을 시작하는 데도 꽤 시간이 걸렸다. 더욱이 광화문광장 쪽까지 꽉 들어찬 인파 탓에 내가 서 있던 대한문 앞에서 광화문까지 직선으로 행진하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하였다. 또 수 없이 많은 인파가 일사불란하게 예정된 코스를 따라 행진하는 것 역시 불가능한 일이었다. 어찌됐건 인원을 도심 각지로 나누어 확산시키며 위력을 과시하는 일이 중요한 것이다.

그런데 행진을 시작하려는 찰나, 내 앞에서 어떤 중년의 남성이 갑자기 어느 여성 집회참가자를 향해 난데없이 일부러 기침을 해댔다. 그녀가 황당한 표정으로 남성을 바라보자 "감기가 걸려서"라는 변명을 하며 기침을 멈추지 않았다. 집회 참가자들에게 일부러 싸움을 걸어보려는 이른바 '작전세력'이었을까.

의심스러웠지만 우리는 무시한 채 행진에 나섰다. 나는 행진을 하지 않으면 무슨 의미가 있을까 싶어 서울광장 쪽으로 빠지는 행렬을 따라 행진했다. 서울 지리에 어두운데다 어둠이 깔린 탓에 어디를 가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었지만(종종 어디로 가야 할지 헷갈려하는 사람들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처음에는 '녹색당' 깃발을 따라갔다. 대체로 서울광장을 통과해 태평로파출소-청계천-종로구청-종로구청어린이집을 지나 광화문으로 나왔다.

청계천을 지난 지점에서는 '국민의당' 깃발이 보였다. 그러자 내 뒤에서 "나는 저 당이 싫어", "그래도 요새 그나마 낫지 않아"라는 청년들의 대화 소리가 들렸다. 아쉽게도 내가 보지 못한 것일 수도 있지만 '더불어민주당'은 보이지 않았다. 한 가지 덧붙여둘 점은 비록 행진대오가 중구난방 식이었을지라도 광화문 주변 소방도로는 모조리 촛불 인파로 뒤덮였다는 점이다. 시민들이 외친 주된 구호는 "박근혜는 퇴진하라", "새누리당 해체하라", "재벌도 공범이다. 해체하라"였다.

광화문으로 나온 나는, 아직 촛불문화제가 시작될 7시 30분까지 시간이 남아있었을 뿐만 아니라 또 청와대 쪽으로의 행진 여부가 궁금해 광화문을 지나 경복궁역 쪽으로 행렬을 따라갔다. 그런데 오랜만에 온 서울인데다 청와대 가는 길이 어디인지도 모르는 참이라 헷갈려하다 서울지방경찰청 옆 길로 다시 행렬을 따라 광화문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정확히 어느 길로 왔는지 기억이 정확하지 않은데, 정부서울청사 별관을 본 게 기억난다. 그렇게 해서 다시 광화문 세종대왕상 근처로 나오자 이미 문화제가 시작되어 도올 선생이 발언하고 그 직후 김제동씨가 단상에 올라왔다. 좀 더 가까이서 보기 위해 인파를 헤치며 억지로 세종대왕상 앞으로 갔다. 또 다음으로 가수 공연이 시작됐다. 축제 분위기였다. 이를 보며 나는 80년대적 방식과 21세기적 방식의 공존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민주노총이 주관한 공식행사가 전자라면 광화문 촛불문화제는 후자였다.

하지만 오늘, 싸우는 것이 목표라면 당연히 청와대로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다시 빠져나오는 동안 정말 애를 먹었다. 뒤에서는 밀고 앞에서는 밀리고, 오고 가는 사람들이 착종되어 숨 쉬기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어찌어찌해서 세종문화회관의 건물 안 통로를 통해 광화문광장을 빠져나와 다시 경복궁역 쪽으로 향했다. 그 건물 안 통로에도 곳곳에 촛불과 피켓을 든 사람들이 앉아 있었다. 서울지방경찰청 앞쯤에 이르자 다시 앞으로 나아가기 어려울 정도가 되었다. 경찰이 청와대 진입로 쪽을 봉쇄한 탓이었다. 나는 빼곡한 인파 속에 힘들지만 조금씩 앞으로, 앞으로 나아갔다. 되돌아오는 사람들과 앞으로 나아가는 사람들이 엇갈리며 앞뒤로 밀리고 밀렸다.

사실 현장에 있으니 전체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알기가 쉽지 않았다. 더구나 나는 스마트폰을 사용하지 않으니 실시간 상황을 알 수 없었던 것이다. "경찰이 막고 있어 갈 수 없다"는 얘기를 주위에서 들었지만 경찰이 어디서 막고 있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어느 순간에서야 경찰 차벽이 내 눈에 보였다.

경찰이 떡 하니 차벽으로 막은 탓에 집회 참가자들끼리 밀리고 밀려서 큰 일 날 수 있는 상황이었고, 몹시 비좁은 상황이었지만 견디고 있었다. 나는 조금씩 앞으로 갔다. 맨 앞 선두에는 한신대 깃발이 보였다. 학생들이 선두에 있었던 것이다. 잠시 뒤 주최 측에서 공간을 좀 더 트기 위해 농민들이 마련해온 상여를 뒤로 물렸지만, 그래도 별 소용이 없었다. 어쨌거나 이 현장이야말로 진정으로 '싸우는 현장'이었다. 그렇게 대치하고 있던 와중 갑자기 선두에서 환자가 발생해 구급차가 들어와야 하니 길을 터달라고 했다. 또 9시 무렵 어느 참가자가 경찰 버스 위로 올라간 게 보였다. 조마조마했고, 일부 시민들은 "내려와"를 외쳤다.

또 선두에서 경찰 방패를 여러 차례 빼앗아 뒤로 넘겼다. 그러자 의견이 갈렸다. "방패를 왜 뺏어, 다시 돌려줘요"라고 하는 사람들이 있는 반면, 일부에선 "아니, 방패를 왜 돌려줘"라고 했다. 이어서 의경들이 선두에 선 시민들의 완력에 밀린 탓인지(?) 아니면 무슨 까닭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 시위대 인파 사이로 낙오되어 나왔다. 그러자 시민들은 "때리지 마"를 외치며 길을 터주고 "고생했어", "빨리 제대하세요"라며 어깨를 두드리며 위로해주었다.

나는 판단하기가 쉽지 않았다. 어떻게 하는 게 좋은 방법일까. 언뜻 강경과 온건, 폭력집회와 평화집회, 합법과 불법의 갈림길 혹은 경계로 보일 수 있겠지만, 실상은 그렇게 볼 수 없을 것이다. 오히려 경찰이 저렇게 차벽을 세워 통행을 막아놓은 것 자체가 원천적인 폭력이 아니겠는가? 또한 법원의 판결대로 따져도 경찰의 행동이야말로 불법인 것이다. 그런데 저 선을 넘으려는 순간 우리 쪽은 폭력세력으로 매도될 각오를 해야 한다. 또한 의경은 우리 시민들의 자녀다. 시위대 역시 이를 인식하고 있다.

이렇게 피아구분이 불확실해지는 순간, 전선은 제대로 형성되기가 어려워보였다. 그렇다면 청와대로 향하겠다는 이 전술 자체에 무언가 문제가 있는 것은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차라리 여의도 새누리당사를 점거하거나 시위대가 도심 각지로 퍼져 더 많은 시민들의 호응을 이끌어내고, 각 권력기관을 접수하며 서울도심 전체를 무정부상태의 해방구로 만드는 게 더 효과적이지 않을까?

기실 경찰은 청와대 방어에 열중한 탓에 광화문 바로 앞의 정부종합청사는 방어하지 못하고 있는 상황이었다. 지금 떠오르는 생각이지만, 우리 시민들은 그때 정부종합청사를 점령하면 되지 않았을까? 설사 청와대로 향한다 하더라도 왜 오직 이 한 길로만 가려고 하는지도 의문이었다. 시위대가 분산되어 여러 갈래의 길을 통해 청와대를 점령할 수도 있는 것 아닌가?

우리는 여전히 지배자의 영향력과 손아귀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는 것 아닐까? 피지배자의 일부 구성원을 공권력에 동원해 피지배자의 저항을 막는 저들의 놀음에 우리 모두 속고 있는 것은 아닐까? 그러나 경찰은 분명 우리가 아닌 청와대를 위해 봉사하고 있다. 우리가 아무리 "비켜라"를 외쳐도 경찰은 비켜줄 리가 없다. 공권력 자체가 지닌 모호한 속성이 피아의 구분을 어렵게 하고 적대의 경계와 대상을 흐리게 하고 있었다.

또 우리는 지배자들과 주류 언론이 짜놓은 폭력집회-평화집회 프레임에 포획되어 있었다. 문제는 폭력집회-평화집회냐가 아니라 지금 이 사회를 지배하고 있는 기득권 세력, 그들 자신인데도 말이다. 평화적 집회로는 백만이 집결했다고 한들 당장 아무 것도 바꿀 수 없다. 그렇다고 저 차벽을 넘으려면, 또 이를 위해 폭력을 행사하기에는 우리에게 무기가 없을뿐더러 저들의 간계(奸計)에 말려들 위험도 있다.

어쩌면, 혁명은 시민들의 손에 무기가 있을 때만이 가능한 것 아닐까? 그렇지 않다면 우리의 전략은 경찰과 의경으로 하여금 우리 편에 서라고, 우리 편에 서서 청와대로 같이 가자고 설득하는 전술을 택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혹은 경찰의 처지를 우리 쪽에서 활용하는 방법도 있을 수 있겠다. 하기야 지금 이 국면에서 칼자루를 장악한 것도 실상 검찰이 아닌가? 검찰에 칼자루를 맡겨야만 하는 우리의 운명이 새삼 서글플 뿐이다.

이처럼 청와대로의 행진이 과연 효과적 전술인지 회의가 들자 나는 멍해지는 기분이었다. 더욱이 발 디딜 틈 없는 좁은 곳에 2시간가량 겨우 버티며 서있다 보니 지치기도 했다. 또 열차가 끊기기 전에 대구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도 들었다. 결국 10시쯤 겨우 뒤로 빠져 나와 경복궁역 옆에 앉아 잠시 집에 통화했다.

나는 다시 광화문 쪽으로 가보기로 했다. 광화문에서는 여전히 문화제가 진행 중이었다. 나는 망설였다. 집으로 갈까, 아니면 현장에 더 남아 있을까. 과연 저 차벽을 뚫을 수 있을까 등등. 그러다가 광화문에서 다시 청와대 진입로 쪽으로 오자 확실히 조금 전보다 많은 인파가 몰려있음을 알 수 있었다. 광화문에 있던 사람들이 이쪽을 향해 오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고 또 한 번 어느 참가자가 경찰버스 위에 올라가 대치하는 상황이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방황했다. 구호를 외치다가도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는 생각과 역사의 현장에 끝까지 있어야 된다는 생각 사이에서 망설였다. 그러던 중 오늘이 아니면 언제 한 번 늘 차량으로 가득 찬 서울 중심 도로를 걸어볼 수 있을까라는 생각에 현장 이곳저곳을 돌아보았다. 기타를 치며 노래 부르는 사람도 있고, 풍물놀이도 벌어지고 있었다. 시간이 흐를수록 경복궁역 앞은 인산인해였지만, 나는 더 이상 선두로 가고 싶은 마음은 없었다. 구급차도 또 한 번 들어와서 나가는 것을 보았다. 오히려 발은 무거웠고, 좀 쉬고 싶었다.

밤 11시가 넘어서야 나는 서울역을 가기 위해 길을 나섰다. 하지만 서울역에 도착하자 이미 자정을 넘겨 있었고, 모든 열차는 운행 종료된 상태였다. 할 수 없이 13일 아침 동대구행 첫 고속열차표를 예매한 후 다시 광화문 광장까지 걸어갔다. 아직도 광화문 광장에는 도합 1천 명은 넘어 보이는 시민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있었다.

광화문 광장의 이곳저곳, 특히 세월호 희생자 추모관과 기억저장소를 돌아보고 걷는데, 이순신 장군 동상 부근에서 주진우 기자 목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보니 시민들은 자체적으로 'The 날밤-광장의 직접민주주의 한국사회 어떻게 바꿀 것인가'라는 토론회를 벌이고 있었고, 여기에 주진우 기자가 나와 시민들과 문답하고 있었다. 나는 잘 됐다 싶어 앉아서 구경했다. 주 기자 다음으로는 박원순 서울시장이 나와 시민들과 대화를 나누었다. 이때가 새벽 1시였다.

박원순 시장 발언 이후에는 시민들의 자유발언이 이어졌다. 이날 시민들의 토론회는 이순신 장군 동상 전후 두 군데에서 이루어졌던 바, 새벽 3시까지 이어졌다. 추위가 온 몸을 휘감았지만, 어느 누군가 어묵 국물을 준비해와 무료로 나누어주어 잠시나마 괜찮을 수 있었다. 그런데 3시 45분쯤, 저쪽에서 "박근혜는 퇴진하라"는 소리가 들려 깜짝 놀라 뒤를 바라보니 한 무리의 사람들이 깃발을 들고 정부종합청사 방면을 돌아 광화문광장으로 돌아오고 있었다. 이들은 마지막까지 남아 싸웠던 것이다. 나는 서울역에서 광화문광장으로 돌아온 이후 청와대 진입로 쪽으로 가보지 않아 그 이후 그곳 현장상황을 알 수 없었지만 이때까지 남아 싸우고 있던 그들의 모습을 보며 참으로 대단한 분들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이들의 깃발에는 '서울민중의 꿈', '울산민중의 꿈'이라고 적혀있었다.

지금 이 국면은 일제와 군사독재에 협력해 떡고물을 얻어먹던 자들과 차마 '보수'라고 불러줄 수 없는 새누리당을 청산하고, 우리사회가 건강한 방향으로 나아갈 수 있는 절호의 찬스다. 그러니 지금 야당과 시민사회, 그리고 깨어있는 시민들은 정신 바짝 차려야 한다. 예민하게 촉각을 곤두세우고 저들의 생존욕, 집권욕을 주시하며 일격을 가할 태세를 갖추어야 한다. 그런 만큼 우리 역시 좀 더 전술과 전략을 마련할 필요가 있다.

'총집결'만이 해법은 아니다. 총집결한 후에 어떻게 집회시위를 이끌어나가야 저들에게 효과적으로 타격을 줄 수 있을지, 또 어떻게 혁명적 열기를 고양시켜 나갈지 고민할 필요가 있다. 또한 총집결 이후의 카드도 생각해야 한다. 총집결만으로 세상을 바꿀 수 없다면, 그 이후 우리는 무엇을 선택할지 고민해보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광장으로의 총집결은 우리 스스로가 새롭게 태어날 수 있는 기회이기도 하다. 광장에서 새로운 주체가 형성되고, 각성할 수 있기 때문이다. 2008년 촛불항쟁은 '촛불소녀'라는 주체의 탄생으로 이어졌다. 이번 백만항쟁 역시 우리 시민들을 새 시대의 주인으로 거듭나게 할 것이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어디까지나 제가 보고, 겪고, 느끼고, 기억한 것을 바탕으로 11월 12일 당시의 현장을 구성해낸 일기 형식의 글입니다.



태그:#백만항쟁, #해방구, #청와대 행진, #총집결, #역사의 현장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역사를 공부하고 있는 시민. 사실에 충실하되, 반역적인 글쓰기. 불여세합(不與世合)을 두려워하지 않기. 부단히 읽고 쓰고 생각하기. 내 삶 속에 있는 우리 시대 이야기.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