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역사의 주역은 늘 남성들로 조명되지만 실제로는 동력의 많은 부분을 여성이 감당해왔다는 사실을 아는 이들이 얼마나 될까.

역사의 전환점마다 늘 여성이 있었으나 그들 대다수가 주목받지 못했다. 여성이 이름을 알리기 어려운 건 과학, 의학, 수학 분야만이 아니라 예술 문화 분야도 마찬가지였던 듯하다.

3000년 이상의 미술사를 기록한 에른스트 곰브리치의 <서양미술사>. 800쪽이 넘는 이 책에 '공식적'으로 기록된 여성 예술가는 열여섯 명뿐이다. 지금까지 여성은 늘 그림자 같은 존재로 머물렀던 것이다. 그것은 기록의 권력을 쥐고 있는 이들이 대부분 남성이라는 사실과 무관하지 않을 것이다.

여성의 이름은 왜 보이지 않는가

미술사가 놓친 여성 에술가 15인
▲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미술사가 놓친 여성 에술가 15인
ⓒ 아트북스

관련사진보기


명예를 얻은 사람이건 무명으로 남은 사람이건 3000년 미술사를 기록한 책에 '공식적'으로 이름을 올린 여성 예술가들은 저마다의 삶과 이야기와 작품을 남겼다.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아트북스)는 작가이자 미술사가인 브리짓 퀸이 독자에게 던지는 질문이자 자기 자신에게 던지는 질문이기도 하다. 그녀는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로자 보뇌르, 리 크래스너 등 3명을 포함해 유딧 레이스터르, 아델라이드 라비르귀아르, 마리 드니즈 비렐르, 에드모니아 루이스, 파올라 모데르존베커, 버네사 벨, 앨리스 닐, 루이즈 부르주아, 루스 아사와, 아나 멘디에타, 카라 워커, 수전 오말리 등 미술사에 이름을 올리지 못한 총 15명의 여성예술가를 소개한다.

그녀들은 그림을 그리고, 조각을 했으며, 사진을 찍고, 설치 미술을 했다. 우리는 시대와 공간을 뛰어넘은 여성 예술가들의 삶의 궤적과 작품을 통해 오늘을 살아갈 힘과 용기와 영감을 얻게 될 것이다.

"H. W 잰슨의 <서양미술사(History of Art)>를 꺼내 책상에 올려놓고 그 두꺼운 책장을 넘기기 시작했다. 마침내 500쪽에 이르러서야 17세기 초 이탈리아 바로크 부분에 다음과 같은 내용이 등장했다.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우리는 지금까지 여성 예술가를 만나지 못했었다.'

나는 그녀의 이름을 노트에 옮겨 적은 후, 그다음부터는 천천히 한 장 한 장 넘기며 끝까지 다 읽었다. 뒤표지까지 왔을 때 여성 화가들 열여섯 명의 이름이 적힌 목록이 완성되었고, 그중 한 사람이 리 크래스너였다. 800쪽이 넘는 책에서 단 열여섯 명만이 '공식적'으로 미술사에 이름을 올린 전부였다.

(잰슨의 여성 예술가들은 다음과 같았다. 등장 순서대로,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 엘리자베스 비제르룅, 로자 보뇌르, 베르트 모리조, 메리 커샛, 게르투르테 케제비어, 조지아 오키프, 리 크래스너, 헬렌 프랑켄탈러, 주디 파프, 오드리 플래크, 바버라 헵워스, 마거릿 버크화이트, 도로시어 랭, 버레니스 애벗, 조앤 레너드)" -14쪽

미술사에 최초로 이름을 올린 이탈리아의 화가 아르테미시아 젠틸레스키의 이름을 아는 이들은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어디선가 그녀의 작품 '호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라는 그림을 본 사람들은 많을 것이다. 하얀 침대 위로 피가 줄줄 흘러내리고 있고 거대한 몸집의 사내를 뒤에서 여인이 찍어 누르고 목에 칼을 꽂고 있는 장면은 충격적이다.

여성 예술가 다섯 명을 떠올려보시오

책의 저자는 독자들에게 두 가지 질문을 던진다.

"목을 베는 일이 여인에게 적합한 일인가?
그림을 그리는 일은 여인에게 적합한 일인가?"

여성에게 금단의 영역이었던 그림을 너무 그리고 싶었던 아르테미시아가 치른 대가는 엄청난 것이었다. 저자에 의하면 그녀는 나이 많은 화가에게 강간을 당했고 그녀의 처녀성을 증명하기 위해 '시빌레(엄지 조이기 고문과 유사한 고문)'라는 고문을 받아야 했으며 7개월간의 소송을 견뎌야 했다.

한 남자와 결혼한 아르테미시아는 메디치가의 권력이 작용하는 피렌체에서 '호로페르네스의 목을 치는 유디트'를 그린다. 그 작품은 많은 것을 암시한다. 저자에 따르면 그녀는 자신을 강간한 남자 타시와 유사한 모습으로 호로페르네스를 표현했다고 한다.

"아르테미시아는 소송이 끝나고 얼마 지나지 않아 '유디트'의 첫 번째 버전을 그렸다. 그것은 피렌체에서 아이들을 출산한 후 완성한, 이 책에 실린 작품의 진정한 프로토 타입이었다. 그녀는 그림의 극적인 드라마와 화려함, 폭력 등이 메디치 가문의 취향에 잘 맞는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혹은 그녀의 평판을 생각하면 복수를 암시하는 장면을 그리고 싶었던 것인지도 모른다. '난 이 칼로 당신을 죽일 거야. 당신은 내 명예를 더럽혔어. 타시도 검은 머리였고 턱수염을 길렀다.'" -31쪽

여성이 자기 이름을 알리기 쉽지 않았던 시대에 이름과 작품을 남긴 열여섯 명의 여성 예술가들. 그들의 삶은 평탄함과 거리가 멀었다. 늘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남성들의 손쉬운 타깃이 되거나 폄훼되기 일쑤였다. 작가가 여성이라는 사실이 알려지기 전까지 격찬을 아기지 않던 비평가들이 여성임을 알고 나서는 꼬투리를 잡아 작품을 깎아내리기도 했다.

버네사 벨은 유명 작가 버지니아 울프의 언니다. 그녀는 그림, 글쓰기, 뜨개질 등 쉬지 않고 '일하는 여성'의 모습을 동생 버지니아 울프의 초상화로 표현했다. 벨은 신경증을 앓고 있던 동생 버지니아 울프에게 끊임없이 영감을 제공했지만 그녀의 이름을 기억하는 이들은 많지 않다.

예술가로 산다는 것은 선각자의 삶을 산다는 의미를 포함한다. 더군다나 여성이 예술가의 삶을 산다는 것은 더 큰 희생과 열정과 용기를 필요로 한다. 저자의 말대로 위대한 예술가 다섯 명의 이름을 떠올려보거나 써보라고 할 때 우리는 단 한 사람의 여성도 기억하지 못하는 경우가 대부분일 것이다. 늘 남성 화가의 작품을 접하고 그들의 이름을 배웠기 때문이리라.

책의 말미에 실린 수전 오말리는 일상의 모든 기록이 예술이 될 수 있음을 보여준 경우다. 오말리는 일상을 예술로 승화시킨 예술가다. 현수막, 꽃밭의 글씨, 모든 삶이 그녀에게는 예술이 되었다. 오말리의 마지막 프로젝트는 <여든 살의 내가 주는 조언(Advice from My 80-Year-Old Self)>라는 책이라고 한다.

오말리는 사람들에게 미래로 떠나는 시간여행을 권했다. 책이 오말리 사후 1년 후에 출간되었다니 안타까운 일이다. 오말리 같은 예술가의 작업에서 우리는 여성으로서 주눅 들지 않고 살아갈 용기를 얻지 않을까.

"'ART BEFORE DISHES (설거지보다 예술이 먼저).' 나는 이 말을 믿는다. 그리고 그렇게 행동하려고 노력한다. 오말리 역시 그렇게 행동했고 그것이 우리에게는 참으로 감사한 일이다." -292쪽

덧붙이는 글 |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브리짓 퀸 지음, 리사 콩던 그림, 박찬원 옮김/ 아트북스/ 18,000원



우리의 이름을 기억하라 - 미술사가 놓친 위대한 여성 예술가 15인

브리짓 퀸 지음, 리사 콩던 그림, 박찬원 옮김, 아트북스(2017)


태그:#여성 예술가, #서양미술사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