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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나물로 이루어진 제철 밥상
 봄나물로 이루어진 제철 밥상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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퍼주고도 다시 우러나는 국물 같은
냉이의 꽃말에
바람도 슬쩍 비켜가는 들,
온 들에 냉이가 돋아야 봄이다
봄이라도
냉이가 물어주는 밥상머리 안부를 듣고서야
온전히 봄이다

냉이꽃, 환한 꽃말이 밥상머리에 돋았다
- 김승해 시인 (냉이의 꽃말 中)


시간이 갈수록 계절과 멀어진다. 눈이 와도 겨울인 것이 와 닿지 않고, 장마가 내려도 여름인지 모르겠다. 그저 퇴근길이 막히겠다는 생각에 불평만 늘어난다. 설상가상 마스크까지 쓰는 바람에 감각은 더욱 무디어져 1년이 무색무취였다.

어느 날 벤치에 앉아 마스크를 고쳐 쓰려 잠깐 끈을 벗은 순간이었다. 기회를 엿보고 있었는지 따스한 바람이 훅 얼굴을 감쌌다. 그 순간 1년간 잊고 살았던 농축된 봄내음이 났다. 멈춰 있던 위장이 꿈틀대고 코가 간질간질하다. 
 
냉이
 냉이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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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바구니에 냉이, 곤드레, 달래, 미나리를 담았다. 나물 하나 무쳐본 적 없으면서 무턱대고 사버렸다. 넷 다 봄나물로 유명하기도 하지만, 개성있는 향이 한 데 모이면 튀지 않고 어우러지는 공통점이 있었다. 흙이 잔뜩 묻은 냉이를 박박 씻으니, 어느새 방에 봄나물 향이 가득하다. 디퓨저, 탈취제 등의 인공적인 향을 안 좋아해 무색무취였던 내 방에 색깔이 입혀진다.

최대한 자연적인 것을 써봐야겠다. 웍 대신 한번도 써본 적 없는 뚝배기를 꺼냈다. '장 맛은 뚝배기'라고, 뚝배기에 냉이를 넣은 된장의 향이 배어들 생각을 하니 군침이 돈다. 쌀뜨물로 뚝배기 세척을 하고 된장을 푼 멸치육수에 양파와 두부를 숭덩숭덩, 냉이 한 움큼을 넣었다. 와! 내가 만들었지만 기가 막히다.

된장찌개가 끓는 동안 가마솥에 곤드레 밥도 지어야겠다. 가마솥은 우리집의 마스코트다. 자취방에 밥솥을 놓을 곳이 없어 장만한 것인데 이제는 누룽지를 위해서라도 없으면 안 될 도구가 되었다.

아뿔싸, 쌀을 너무 많이 넣었나. 물을 머금은 쌀이 불어 냄비 한가득 되었다. 가마솥을 믿고 들기름과 간장에 조물조물 무친 곤드레를 쌀 위에 얹는다. 뚜껑을 닫고 강불로 쌀이 끓기를 기다린다. 탄내가 난다.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려야 한다. 내 짧은 경험으로 비추었을 때, 이때를 못 참고 불을 낮춰버리면 밥이 설익는다.

5분 정도를 더 기다린 뒤 뚜껑을 열었다. 와! 밥이 되고 있다. 한번 섞어주고 중불로 낮춘 다음 15분 더 기다린다. 뜸까지 들이고 나니 아주 맛있는 곤드레 밥이 됐다. 잘 지어졌는지 한 입만 먹어본다는 것이 자꾸 먹게 된다. 밥만 먹어도 맛있다.
 
주말농장 개구리
 주말농장 개구리
ⓒ 정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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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나리를 무치고 달래장까지 만드니 어릴 적 생각이 난다. 약 10년 전 부모님과 함께 주말농장을 했다. 남들은 취미인데 우리는 생존이었다. 아버지 일이 몇 달 간 끊겨 조금이라도 생활비를 줄여보고자 직접 상추, 고추, 토마토 등을 재배했다.

기껏 키운 토마토가 장마에 쓰러져 울고 불고, 어느 날은 개구리와 눈싸움을 하고, 오이도 꽃이 핀다는 사실도 그때 처음 알았다. 책 바깥의 세상은 신비로웠다. 그때만큼 사계절을 생생하게 느끼던 때가 있을까.

자연이 짜준 코스 메뉴를 따라가는 것은 기쁜 일이다. 달래장에 비빈 곤드레 밥에 냉이 된장찌개를 한 술 떠먹으니 그때의 감각이 조금씩 살아나는 것 같다. 언제나 제철은 반갑다. 우리의 봄도 머지 않았다.

태그:#봄, #봄나물, #냉이, #미나리, #자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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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갑습니다. 정누리입니다. snflsnfl835@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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