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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야흐로 정치의 계절이다. 다들 제대로 된 정치가 필요하다고 말하지만 주변의 누군가가 정치를 '하는' 것은 타락의 길로 들어서는 것처럼 여긴다. 이는 음험한 이전투구의 각축을 한 치의 부끄럼 없이 드러내 보여 정치란 타락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음을 보여주면서, 노동자 민중들에게는 몇 년에 한 번씩 돌아오는 선거에 투표하는 행위로만 정치를 묶어 두고자 하는 보수정치의 전략이자 본질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혹은 그렇기에 선거는 더욱 중요한 정치적 국면이다. 선거는 각각의 정치 진영들이 특정한 사회적 의제에 대한 관점을 드러내도록 요구받는 시기다.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과 건강의 문제는 일터의 위험을 우리 사회가 어떻게 다루고 있는가와 관련된 문제다. 대선 국면을 맞이하여 각 후보 진영을 향해 노동자들은 왜 위험해지는지, 어떤 노동자들이 더 위험해지는지, 그리고 그것은 과연 정당한지에 대해서 질문을 던져야 한다.

건강 불평등이 불공정한 사회와 경제 질서, 불량한 사회정책, 나쁜 정치의 유독한 조합의 결과물(김창엽, 김명희, 이태진, 손정인. 한국의 건강 불평등. 서울대학교출판문화원; 2015)이라고 한다면 직업안전과 건강상의 문제야말로 이 시대 한국 사회가 봉착하고 있는 가장 중요한 문제로서 형평성과 정의, 불평등의 문제에 대한 것이며 첨예한 정치적 문제이다.

세월호의 경험은 사고로 사람들이 그냥 죽는 것이 아니라 절차와 과정이 무시되고 시스템이 작동되지 않아서 죽임을 당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닫게 했고 이는 상당수 국민들에게 '정치적' 각성의 경험이기도 했다. 높아진 사회 전반의 생명·안전에 대한 감수성에 기반한 사회적 요구는 노동안전보건에 있어서도 법과 제도의 변화를 초래했다.

김용균법이라는 이름으로 산업안전보건법이 전부 개정되었고 중대재해처벌법이 제정되었다. 정치가 정상적으로 작동한 것이 아니라 당사자와 유가족, 시민사회의 요구에 등 떠밀린 변화였다. 입법 과정에서도 생명·안전에 대한 가치보다는 기업의 이해관계를 중심에 두고 고심하던 정치의 행태는 보편적 시민 의식에 비해 한참 뒤처져 있다. 이것이 세계 10위권의 경제 규모의 나라가 산재사고 사망률은 경제협력개발기구(OECD)에서 수위를 다투고 있는 이유다. 이제 정치가 응답할 시기다.
 
20대 대선을 앞두고 생명안전시민넷과 재해·재난 유가족 단체 등이 모여 대선후보 생명안전 국민약속식을 진행해, 대선 후보들이 모인 자리에서 단체들은 생명안전 공약을 촉구했다.
 20대 대선을 앞두고 생명안전시민넷과 재해·재난 유가족 단체 등이 모여 대선후보 생명안전 국민약속식을 진행해, 대선 후보들이 모인 자리에서 단체들은 생명안전 공약을 촉구했다.
ⓒ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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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복되는 재래형 산재를 어떻게 줄일 것인가

대권 경쟁에 나선 이들은 산재사고사망을 절반으로 줄이겠다는 대통령의 약속이 절반도 지켜지지 못한 이유를 말하고 자신은 어떤 해법과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 답해야 한다. 노동자들의 손상과 죽음을 초래하는 일터의 위험이 기업에도 경영상의 위험이 되고, 노동자의 안전이 기업의 이윤으로 연결되도록 만들 수 있는 정책을 내놓아야 한다.

노동자의 생명과 안전에 대한 사회적 가치를 향상시키고 이에 대한 침해가 발생했을 때 기업의 사회적 부담이 현저히 높아지도록 하는 것이 필요하다. 이것이 중대재해기업처벌법 제정 배경이며 사업주나 경영책임자의 관리책임에 대한 치밀한 제도적 구성, 처벌의 강화, 매출 규모를 기준으로 하는 징벌적 손해배상 등이 주장되고 있는 근거이기도 하다.

중대재해처벌법 제정의 취지가 관철되고 재해 감소로 이어질 수 있도록 만드는 경로를 어떻게 구성하고 정책적으로 뒷받침할 것인지가 중요하다. 중대 재해를 조사하게 될 고용노동부와 안전보건 공단이, 기소권을 가지고 중대재해 조사결과를 받아볼 검찰이 예방 가능했던 산업재해로 인한 노동자들의 손상과 죽음의 문제에 대해 어떠한 관점을 가지고 임하도록 만들지 답해야 한다. 사법부의 판결과 양형이 재래형 재해의 반복을 막을 수 있는 수준의 단죄가 될 수 있도록 제반의 행정적 절차와 과정을 어떻게 구성할 것인가에 대해서 답해야 한다.

산재예방에 있어서 노동자들의 참여는 핵심적이다. 중대재해 발생 이후에 조사대상이나 참고인으로서 소환되는 수준이 아니라 노동자들이 사고원인을 밝히는 조사에서부터 책임을 묻고 따지는 사법절차, 재발방지대책의 수립과 사고로부터 얻은 교훈의 사회적 공유에 이르기까지 주체로 참여할 수 있어야 한다.

처벌의 핵심적 기준이 될 사업주와 경영 책임자의 안전 및 보건 확보 의무 수행 여부 판단은 '위험성 평가'의 적절성 검토에서 출발할 수 있다. 구체적 노동이 이루어지는 현장인 일터의 위험을 당사자들이 사전에 파악하고 관리의 방안을 모색하도록 하는 위험성 평가가 제대로 이루어지기 위해서는 기업의 안전보건활동의 전반에 대한 노동자 참여 보장 방안이 있어야 한다.

새롭게 등장하는 직업건강 위험에 어떻게 대응할 것인가

각 정치 진영은 새롭게 등장하는 직업 건강상의 위험을 어떻게 다룰 것인가에 대해서도 답해야 한다. 첨단 산업에서 등장하는 새로운 위험, 서비스 산업에서의 안전보건 문제, 근골격계질환 및 뇌심혈관계 질환을 넘어서서 정신질환에 이르기까지 부상하고 있는 작업관련성 질환의 문제, 전통적 노사관계와 일터의 경계가 모호해지는 상황에서 파생되는 구조적 위험에 대한 책임 소재문제 등 오래된 굴뚝 산업의 위험과 사고를 중심으로 구성된 낡은 산업안전보건법제와 행정조직 체계로는 감당하기 어려운 문제들이 산적해 있다.

시대에 조응하는 안전보건정책은 이러한 문제들에 대해서도 답할 수 있어야 한다. 당장 인과관계를 밝히기 어렵더라도 잠재적 위험에 대한 관리가 필요한 직업성 질환 관리를 위한 정책적 방향 제시가 필요하다. 급식조리노동자의 폐암, 환경미화원의 호흡기질환, 택배노동자의 과로사, 돌봄노동자의 근골격계질환, 직무스트레스와 관련한 정신질환 등 직업 상의 건강문제는 계속 새롭게 등장하지만 이를 작업환경 측정이나 특수건강진단 등의 기존의 고식적 제도에 욱여넣어 버리는 방식은 해법이 아니다.

도입 당시의 열악한 작업환경과 낮은 의료 접근성을 고려하면 법제도로 규정된 작업환경측정이나 근로자 건강진단은 직업병의 조기 발견이나 노동자들의 건강관리에 있어서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작업환경과 의료 접근성에 있어서 일정한 진전이 있는 현 상황에서 산업보건 '시장'의 상황과 소극적 안전보건행정과 맞물려 지체상태에 놓여있는 이들 제도는 일부 중소규모 사업장을 예외로 하면 실효성이 낮다.

산업화의 진전 및 노동과정의 변화 등으로 인해 새로운 유해요인과 문제들이 등장하고 있으나 작업환경측정 및 건강진단 대상자 선정이나 주기 및 검사항목 등이 시대에 부응하지 못하고 있다. 사후관리나 작업환경개선과 연계되지 않는 형식적인 측정과 검진은 재고되어야 한다. 반복적으로 검진하고 측정한다고 해서 위험이 줄어드는 것이 아니라 개입하고 관리해야 비로소 위험은 줄어드는 것이다.

사업장 보건관리를 측정과 검진만을 중심에 두고 주요한 건강상의 문제들이 제기되면 다양한 관리적 방법을 동원하려는 시도보다는 기존의 고식적 제도를 통해서 해결하고자 하는 경향을 넘어서는 제도 전망을 보여줘야 한다. 노동자 건강을 이야기한다면 일상적인 보건관리 체계와 연계된 측정과 검진제도의 개선에 대해서는 말할 수 있어야 한다.

새로운 안전보건법제와 안전보건행정기구의 전망

생산성, 임금, 고용, 노사관계 등 노사 간의 조정, 협의·타협을 중심으로 여타 노동행정을 관장하는 고용노동부에서 안전보건행정 업무를 수행하는 것에 대한 문제제기는 지속되어 왔다. 2018년에는 고용노동행정개혁위원회에서 산업안전보건청 설치를 중장기 과제로 추진할 것을 권고했고 2020년 4월에는 경제사회노동위원회에서도 산업안전보건청 설립 검토를 합의한 바 있으며, 산업안전보건청 신설에 대한 복수의 정부조직법 개정안도 발의되어 있다.

2021년 7월에는 고용노동부 산재예방보상정책국이 산업안전보건본부로 격상되어 확대 개편되었다. 그러나 현재 산업안전보건청 문제는 정치적 이슈가 옮겨 가면서 국회에서도 논의가 없고, 고용노동부는 정치권의 향방에 촉각을 곤두세우고 있는지는 몰라도 사회적 공론의 장을 열어보려는 시도는 보이지 않는다.

차제에 일터에서 비롯되는 위험을 다루는 사회적 방식에 대해서 완전히 새로운 접근을 시작해야만 한다. 이것은 오래된 산업안전보건법제 자체에 대한 검토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새롭게 등장하거나 사회적 쟁점이 되는 안전보건문제에 대해서 현장 작동성도 검토하지 못한 조문을 끼워 넣고 특별법으로 땜질하는 방식은 한계에 도달했다.

산업안전보건청 논의를 넘어서서 새로운 법의 제정과 그에 기반한 안전보건 행정 시스템과 거버넌스의 구축에 대한 전망이 필요하다. 사업장의 규모, 고용의 형태를 불문하고 모든 일하는 사람들을 대상으로 하고 일하는 사람들의 활동과 관련하여 발생한 위험으로부터 일하는 사람들 이외의 사람까지 포괄하는 새로운 안전보건법제에 대한 전망이 필요하다.

규제항목을 일일이 법에 담아 나열하는 지시적 방식의 한계를 극복하고 구체적 위험을 파악할 수 있는 이들이 책임지고 관리하는 목표기반 규제가 가능해야 한다. 사업주 및 경영책임자의 포괄적 안전보호의무를 전제로 책임의 주체는 기업과 노동자들의 대표조직을 함께 포함하고 권한과 통제권이 주어질 수 있도록 설계된 법제가 필요하다.

기업의 이해관계를 우선하는 정치의 후진성을 극복할만한 사회적 동력이 미처 축적되지 못해 국가 안전보건 시스템의 성찰과 개조는 미루어져 왔다. 유예된 기간 동안 매년 천명 내외의 노동자들이 막을 수 있는 재해로 사망해왔다. 국가의 안전보건 시스템은 새로운 법제와 이를 책임있게 수행할 수 있는 안전보건행정기구를 통해서 갖추어질 것이다.

일하는 사람들의 안전하고 건강할 권리에 대한 배타적 옹호기관으로서 국가적 차원의 위험성 평가를 기반으로 하는 정책 입안과 집행이 가능한 조직, 지원과 규제 행정을 유기적으로 통합하고 효과적으로 집행할 수 있는 조직으로서 새로운 안전보건 행정기관의 전망을 가지고 있는지 물어야 한다. 산업안전보건청을 넘어서 당사자의 참여를 전제로 한 거버넌스를 기본으로 행정 각 부처, 지자체, 전문가 등과 유연하고 힘 있는 거버넌스를 구축할 수 있는 안전보건 행정기관의 청사진을 내놓아야 한다.

여기에는 안전보건기관의 행정관료들은 자질과 역량을 강화방안이 포함되어야 한다. 사업주, 경영책임자, 기업들이 행한 안전보건조치가 '합리적으로 실행가능한' 수준으로 이루어졌는가를 판단할 수 있을 만큼의 기술적 전문성과 가치관을 가진 감독관과 행정관료가 필요하다. 최소한 국가의 안전보건정책을 수립하고 정책효과 검증에 활용 가능한 산업재해통계와 분석은 내놓을 수 있어야 하지 않겠는가?

노동자와 시민의 생명과 안전의 문제야말로 정치가 담당해야한 할 원초적인 과제이다. 수권 정당임을 선언하고 대통령 후보를 내는 모든 정치 진영에서는 앞서 나열한 오래된 문제의 성찰과 검토를 수행할 사회적 기구를 시급히 마련하겠다는 약속부터 해야 한다.

오래된 문제의 성찰과 검토에는 그만큼 시간이 필요하다. 진지한 성찰적 검토를 어렵게 하는 노·사·정 상호 간의 불신을 불식시키고 상호간의 신뢰에 기반하여 장기적 목표에 접근해가는 경험을 만들어가는 사회적 논의 테이블을 약속하기 바란다. 불신이 초래하는 사회적 비용이 노동자들의 손상과 생명이어서는 안 된다.

덧붙이는 글 | 이 글은 한노보연 소장이자 직업환경의학전문의인 류현철님이 작성하셨습니다.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일터> 3월호에도 게시됩니다.


태그:#대통령_선거, #노동안전보건_정책, #산재_사망, #산업_재해, #산업안전보건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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