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수술 날짜 잡았는데 회사에서 미루면 안 되녜요', '회사 때려치고 쉬고 싶네요', '월차 없는 회사에 다니시는 분들 진료 때 어떻게 하시나요'.

한 온라인 환자 커뮤니티에 '회사'로 검색했을 때 나오는 게시글 제목이다. 암 진단을 받았지만 회사에 쉽게 알릴 수 없다는 이야기, 대학병원 진료 날짜를 맞추기 어려운데 회사와 쉬는 날을 조정하기도 어려워 난감하다는 푸념 섞인 이야기들을 쉽게 찾아볼 수 있다. 큰 병원이 없는 지역의 직장인은 더 막막하다. 서울 소재 병원까지 가려면 하루 또는 며칠 휴가를 내야 하기 때문이다. 어렵게 수술을 받아도 회복되지 않은 몸 상태에서 과로를 견디다 못해 사표를 냈다는 글도 심심찮게 볼 수 있다.

치료받기 위해 회사를 그만둬야 하는 처지에 놓인 노동자의 시름은 깊어 가지만, 정부의 해결 의지는 보이지 않는다. 오히려 산재 노동자에게 '나일롱 환자'라는 둥 왜곡된 발언을 일삼고 있다. 고용노동부는 근로복지공단의 '나일롱 환자' 점검 부실과 산재 환자 대상 특별 수가 등을 눈여겨보겠다며 11월부터 두 달간 감사를 강행하기도 했다. 산재 인정이 충분한 쉼과 요양으로 이어지지 못하게 하는 조건은 여전하지만, 이를 해결할 생각은 하지 않고 산재 노동자 개인을 공격하는 것이다.

이는 일터의 아픔을 개인화하는 것으로, '아프면 쉴 수 있어야 한다'라는 당연한 권리와 정확히 반대된다. 지금, 모든 노동자에게 필요한 건 '아프면 제대로 쉬고, 제대로 치료받아 일터와 삶에 복귀할 수 있어야' 하는 권리의 확장이다.
 
산재의 문턱이 여전히 높은 지금, 유급병가나 상병수당 등 '아프면 쉴 권리'에 대한 보장 역시 요원하다.
 산재의 문턱이 여전히 높은 지금, 유급병가나 상병수당 등 '아프면 쉴 권리'에 대한 보장 역시 요원하다.
ⓒ 노동과 세계

관련사진보기

 
아파도 1년에 1.2일만 쉬는 노동자들

제대로 치료받을 수 없는 현실은 아픈 노동자를 더욱 고통스럽게 만든다. 2022년 한국보건사회연구원 강희정 선임연구위원은 한국 노동자의 연평균 병가 일수는 1.2일이라고 밝혔다.1) 다른 나라와 비교하면 영국 4.2일, 이탈리아 5.9일, 미국 7.4일, 캐나다 8.5일, 프랑스 9.2일, 독일 11.7일이다. 한국 노동자가 다른 나라 노동자에 비해 건강한 걸까? 그렇지 않다. 몸이 좋지 않아도 출근해서 일하는 '프리젠티즘(Presenteeism)'이 한국에 만연하기 때문이다.

이 같은 상황은 노동자가 아플 때 방패막이가 될 사회적 제도가 부재한 결과이다. 근로기준법에는 노동자 본인이 원할 때 선택할 수 있는 휴직에 관한 조항이 없다. 취업규칙이나 단체협약에 병가 규정이 있지 않으면 병가를 주는 것은 사용자 마음이다. 노동자는 사용자에게 허락을 구해야 하고, '착한' 사용자의 '선의'에 기댈 수밖에 없다. 힘들게 병가를 사용하더라도 급여를 요구하긴 어렵다. 상사와 동료들의 눈치는 덤이다. 여러 측면에서 문턱이 너무 높다. 그러다 보니 정말 죽을 만큼 아프지 않으면 병가는 꿈도 꾸지 않는다. 동료가 아프더라도 충분히 잘 쉬고 나오라는 말이 안 나온다. '나는 이렇게나 아픈데, 겨우 그 정도로 나오지 않는다고?'라는 뾰족한 마음이 절로 든다.

아프다는 건 노동자에게 불리하게 작용한다. 높은 노동강도를 견뎌내지 못하는 몸으로 취급되고, 쉬운 해고의 이유가 되기도 한다. 아프면 쉴 권리의 부재는 개별 노동자가 산재 승인에 모든 걸 걸게 만들기도 한다. 이처럼 필요한 제도의 부재 속에서 낮은 임금과 장시간 노동, 아픈 사람에 대한 편견과 차별은 모든 노동자를 불건강하게 만든다.

일 때문에 아픈 노동자는 매우 많다. 2001년 대비 요양재해자 수는 8만1434명에서 2022년 13만848명으로 60.1% 늘어났다. 연도별로 다소 차이는 있으나, 한 달 이상 요양이 필요한 경우가 차지하는 비중이 전반적으로 높다. 요양기간별 비중을 살펴보면 연도마다 차이는 있으나 한 달 이상의 요양이 필요한 경우가 매년 약 85%에 달한다. 6개월 이상의 중장기 요양재해자는 2007년, 2009년을 제외하고 매년 17~27% 사이를 유지하고 있다.2)

노동부는 지난 12월 20일 '산재보험 제도 특정감사 중간결과'를 발표하며 6개월 이상 요양이 필요한 환자가 많은 상황이 산재보험의 구조적 병폐라고 비난했지만, 중장기 요양재해자가 많은 것을 나일롱 환자가 많은 것으로 해석하면 안 된다. 대신 이들에게 어떤 복합적인 이유들이 있는지 살펴봐야 한다.

생계 문제로 참고 견디며 일하다 치료 시기를 놓쳐 병세가 악화된 상태에서 산재를 신청했을 가능성이 있으며, 회복이 덜 된 상태에서 무리하게 복귀를 시도하다 요양기간이 늘어난 것일 수도 있다. 암과 같은 중증 질환의 발생도 얼마나 늘어났는지 살펴봐야 한다. 이와 같은 요소를 외면한 채 강제 요양 종결 의지를 내비치는 노동부의 행태는 문제를 도돌이표처럼 반복하고 키우는 행위에 지나지 않는다.

산재 처리 기간과 협소한 승인 범위 문제

산재 신청을 했다고 바로 요양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결과가 나오기 전까지는 연차나 병가를 사용해야 한다. 산재 처리 기간이 지나치게 긴 것도 아픈 노동자를 더 힘들게 만든다. 근로복지공단은 요양급여 신청을 받으면 7일 이내에 지급 여부를 결정해서 알려줘야 하지만, 현실은 다르다. 업무상 질병의 산재 보상 처리 기간이 지난 9년 사이 2.6배 증가했다.

근골격계질환의 경우 해당 질환 중 자주 발생하는 질환과 직종에 대해 업무 관련성이 있다고 '추정'하고 일부 조사 절차를 생략하는 추정의 원칙 제도가 있음에도, 처리 기간은 오히려 한 달 가까이 늘었다. 뇌심혈관계질환은 2014년 62.8에서 2023년 123.1일로, 정신질환은 122.5일에서 210.4일로 늘었다.3) 업무 연관성을 금방 밝히기 힘든 질환의 경우 기약이 없다. 이 기간의 어려움은 산재 노동자나 이들의 가족이 온전히 져야 한다. 산재보상보험의 선(先)보장 요구가 제기되는 이유기도 하다.

제대로 치료받고, 잘 쉴 수 있어야 건강하다

산재보상보험이 고용 형태와 관계없이 일하는 모든 노동자에게 보장되고, 산재 처리 기간을 줄이는 것도 중요하다. 더 나아가 언제든 제대로 치료받고, 잘 쉴 수 있어야 한다는 사회적 가치가 반영된 제도가 우리에게 필요하다.

자신의 질병 경험(특히 암)에 대해 에세이를 쓴 아서 프랭크(Arthur W.Frank)는 회복이 질병의 이상적인 결말이라고 보는 견해에는 문제가 있다고 지적한다. 어떤 이들은 회복하지 못하기 때문이다. 후유증이 생길 수도 있고, 이전과 다른 몸 상태가 되기도 한다. 기업이 요구하는 '완벽히 건강한 몸'이라고 하는 허구적 표상은 노동자에게 아픔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이 기준에 미달한다고 여겨지는 만성질환자, 노인, 장애인, 여성 등 다양한 존재들을 일의 세계 바깥으로 내몰아 버린다. 당장 아픈 곳이 없더라도 언젠가 아플 수 있는 몸들에게도, 아프지 않을 때 더 많이 일할 것을 강요한다.

아플 때 충분히 쉬고, 생활 역시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삶은 정말 불가능할까. OECD 국가 중 한국과 미국만 없는 제도가 있다. 아픈 노동자를 방치하지 않기 위한 최소한의 장치, 국가 차원의 유급병가 형태를 띤 상병수당이다. 상병수당은 노동자가 '업무 외 질병이나 부상'으로 경제활동이 어려울 때 치료에 집중할 수 있도록 소득을 보전해주는 제도다. 유급병가가 일정 기간 '근로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것을 전제 조건으로 한다면, 상병수당은 공적으로 운영되기 때문에 '전통적 노-자 관계'에서 배제되어 온 특수고용노동자나 프리랜서, 소규모 사업장 노동자 등에게 더 닿을 수 있다.

한국에서도 상병수당이 시범적으로 시행되고 있다. 그러나 현재의 시범사업은 건강 손상이 빈곤으로 이어지는 걸 막기에는 한참 부족하다. 2022년 7월 시작된 시범사업은 현재 2단계로, 총 10개 지역에서 진행 중이다. 그러나 대상자를 소득 하위 50%로 제한하고 보장액을 최저임금의 60% 수준으로 낮게 책정했으며, 65세 이상 노인과 외국인(이주노동자) 등이 대상자에서 제외되었다. 대상자 범위와 보장액 수준 등을 대폭 확대해야 하는 이유다. 아픔의 이유를 노동자가 검열하거나 설명하지 않아도, 노동자가 잘 치료받고 복귀할 수 있도록 사업주가 책임지는 유급병가가 보장되어야 하는 것 역시 물론이다.

보편적 유급병가 보장 및 상병수당 도입은 젠더 관점에서 건강 불평등을 낮추는 방안으로도 의미가 크다. 만 15세 이상 여성 중 절반만 일하고 있고, 그중 절반은 비정규직이며, 남성 임금의 70%도 받지 못하는 게 여성노동자의 현실이다. 국민건강보험공단 고객센터 상담원 A씨는 여름휴가 중 한 쪽 다리에 깁스를 했다. 당분간 통원 치료를 받고 안정을 취해야 한다는 의사 소견에 따라 회사에 병가를 신청했지만, 관리자는 "손이랑 입이 다친 게 아니니 출근하라"며 반려 했다.4) 중장년 여성 노동자들이 많은 서울시 사회서비스원 사측은 2022년, 병가 사용 시 하루치 통상임금의 100%를 지급하기로 한 단체협약 조건이 과도하다며 이를 70%로 낮추라고 요구했다. 노동조합에서 이를 수용 하지 않자, 단체협약 해지까지 했다.

산재 신청하면 해고될까 봐 사비로 치료 받는 여성노동자, 병가조차 생각할 수 없는 5인 미만 사업장의 여성노동자 등 불완전한 고용관계에 놓인 여성노동자가 너무 많다. 이런 상황 속 모두가 아프면 쉴 수 있는 보편적 권리 보장은 아픈 노동자에게 기울어진 운동장인 지금의 현실을 조금이나마 바로잡아 줄 것이다.

1) 허남설, "'아파도 1년에 1.2일만 쉰다' 한국 노동자에게 유급병가를", 경향신문, 2022.08.18.
2) 김민수, '2001년부터 2022년까지 산업재해 현황 분석 및 제언', 나라살림브리핑, 2023.05.09.
3) 조해람, "허리도 '삐끗', 제도도 '삐끗'?…당신의 산재처리 늦어지는 이유", 경향신문, 2023.10.22.
4) 고귀한, "깁스했다고 병가? 입 멀쩡하면 출근하라" 건강보험 콜센터노조, 갑질 피해 인권위 진정", 경향신문, 2023.09.13.

덧붙이는 글 | 이 글을 쓴 이나래 님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 상임활동가입니다. 이 글은 한노보연 월간지 일터 24년 1월호에도 실립니다.


태그:#아프면쉴권리, #산재환자치료받을권리
댓글

한국노동안전보건연구소는 모든 노동자의 건강하게 일할 권리와 안녕한 삶을 쟁취하기 위해 활동하는 단체입니다


독자의견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