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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지금은 여느 가정주부처럼 집안 일만 하시고 계시는 어머니는 고향에서 막내와 함께 살고 계신다. 해마다 명절 때나 조상을 모시는 날, 음식을 준비하면서 읊조리는 과거사는 흡사 판소리의 그것과 비슷하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어릴 때는 어머니의 한 서린 소리가 듣기 싫어서 일부러 피해버리거나 어머니에게 듣기 싫은 소리를 종종했던 것으로 기억한다. 이제 나이를 어느 정도 먹어서인지 어머니의 애잔한 소리가 그립기만 하다. 회고하시는 어머니 말씀을 적었다.

일제 시대였던 1940년 일본에서 장녀로 태어난 나는 조선인으로는 드물게 부유한 생활을 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가 끝난 후 해방을 맞아 가족들은 모두 조선으로 건너오게 되었다. 일본 도쿄에서 제재소에 나무를 공급해주는 일을 했던 아버지는 재력가였지만, 결국 조선으로 넘어와서는 그 돈이라는 것도 무용지물이 되어버렸다.

고작 6년이 채 안 되는 어린 시절을 일본에서 보낸 후 아버지의 고향 경상북도 어느 자그마한 시골에 안착하게 되었다. 가진 것이라고는 아무것도 없었던 터라 고모댁 논, 밭을 부쳐 먹었고 아버지는 세상을 뜰 때까지 그렇게 소작농으로 지내셨다.

아버지의 사랑을 너무 받아서였던지 어머니의 구박은 이웃사람들이 혀를 두를 정도였다. 바로 아래동생은 남자였는데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이 남동생에게 못 미친다고 생각한 탓이었는지도 모르겠다.

한겨울에 어머니는 집안 개천으로 이불빨래며 옷가지를 나에게 안겨주며 깨끗하게 빨아올 것을 명령하면 나는 거역할 수 없었다. 따뜻한 남도라고 하지만, 혹독한 겨울 추위는 비켜가는 법이 없었다. 꽁꽁 얼어붙은 냇가에 쪼그리고 앉아 얼음을 깨고 빨래를 시작하면 살을 에는 듯한 고통의 순간이 다가온다. 찬바람은 속절없이 얼굴을 훑어 내린 뒤 저고리 틈을 비집고 들어와 찬 서리를 한 움큼 내려놓고 달아나기를 수없이 반복했다.

참을 수 없는 고통의 순간들이 수십 차례 지난 뒤 감각이라도 무디어질 법 하건만 아린 고통은 뼈 속까지 스며들 뿐이었다. 또래 애들은 지금쯤 따뜻한 아랫목에 앉아 재미난 얘기로 시간 가는 줄 모르고 있을 텐데 하는 생각이 들면 빨리 동무에게 가고 싶은 생각뿐이다. 그렇게 빨래를 하고 마당에 널고 나면 어머니는 단 한 차례도 내가 해 온 빨래를 그냥 넘기는 법이 없었다.

빨래가 다 말라갈 때면 하얀 무명저고리며 이불을 마당에 내동댕이치셨다. 다섯 살 먹은 어린애가 해도 이것보단 잘하겠다며 꽁꽁 얼어붙은 흙 마당에 흩뿌려댔다. 머리채를 잡고 흔드는 것은 다반사였다.

여든이 조금 안 되는 연세에 세상을 뜨셨는데 그 연세에도 어머니는 젊은 장정의 식성을 가진 분이었다. 야무진 어머니의 힘은 처녀인 내게는 늘 맞을 때마다 눈물이 빙그르 돌 정도의 너무 아픈 것이었다. 동네 우물도 없었던 터라 당시만 해도 산 중턱까지 물을 길으러 가야만 했다. 예나 지금이나 산이 동네를 오롯이 감싸고 있는 곳이라 당시만 해도 늑대니 여우니 하는 것들이 동네로 내려온다고 하던 때였다.

그런 곳에 어머니는 꼭 이른 새벽에 나를 깨우거나 저녁 해가 저물기를 기다려 물을 길어오라고 했다. 그렇게 어머니의 구박은 아버지가 없는 틈을 타서 이루어지기 일쑤였다. 동네사람들은 계모라도 그렇게는 못할 텐데 꼭 시집살이하는 며느리 같다며 안타까워할 뿐이었다.
또래 동무들처럼 공부하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으나 어머니는 결코 용납하지 않았다. 그러하기에 내가 환갑이 넘은 나이에 한글을 배우기 시작한 이유는 배움에 대한 갈망이 남아있었기 때문이었다.

친정어머니의 사랑을 받지 못한 탓이었던지 시집 간 후로 시어머니의 사랑을 지극히 받았다. 장남에게 시집가서 첫 딸을 낳았는데 연신 싱글벙글 좋아하시는 시어른들이 함께 계셔서 더 없이 행복했다.

하지만 죽 끓여먹기도 힘든 시집살림이었다. 첫 애를 낳고도 둘째 아들을 낳고도 제대로 먹지 못한 시부모님과 나는 그저 구걸하는 삶을 살았다고 해야 할 것이다. 남편은 가장의 역할을 기대하는 게 무리였던 것 같다. 가족보다는 친구를 더 좋아했다. 동네사람들에게는 호인이라는 소리를 들었겠지만, 가족들은 속앓이를 해야만 했으니까.

굶어죽을 수는 없는 노릇이어서 어느 날은 친척집에 빚을 조금 내서 떡을 지었다. 첫 애는 시어머니에게 맡기고 둘째 애를 들쳐 업고 부산 행 완행열차에 몸을 실었다. 한글조차 배우지 못했던 나는 좌석을 찾을 수 없는 까막눈이어서 마냥 서서 부산까지 갈 수밖에 없었다. 젊은 아낙이 글도 모른다고 할까봐 창피하기도 했다. 자갈치 시장이라는 곳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아무 곳에나 앉아서 떡을 팔기 시작했는데 ‘떡 사이소 떡, 떡 사이소 떡예.’ 기어가는 목소리였다.

부끄러움이 확 몰려오긴 했지만, 집에서 목이 빠져라 기다릴 시부모님과 첫 애 생각에 목소리에 힘을 주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손님들이 몰려와 정신없이 떡을 팔았다. 들쳐 업은 애가 똥을 싸서 기저귀를 갈아야 하는데 그럴 시간이 없었다.

옆에서 보다 못한 아줌마가 ‘아지매요. 아지매요. 얼라 기저귀 갈아주소. 저래 울다가는 얼라 숨 넘어가겠심더. 퍼득 기저귀부터 가이소. 어요 어요, 장사도 처음 하는 갑데이. 돈부터 받고 떡은 나중에 줘야지. 떡부터 주이끼네 돈도 안 주고 기냥 가뿌리도 새댁은 영 정신이 없어가꼬 모른다 아인교. 땅 파서 장사하는 것도 아일낀데 우짤라꼬 그카노 말입니더. 정신 차리이소’ 하신다.

생각보다 그래도 장사가 잘 되서 하루 끼니는 벌어서 갈 수 있었는데 계속 장사를 하기에는 무리가 있었다. 시어른들의 건강이 날이 갈수록 악화되면서 그마저도 며칠 장사로 끝낼 수밖에 없었다. 그 뒤로 식당일이며 군청에서 하는 공공근로, 남의 집 밭 매는 일을 가리지 않고 했지만, 쪼들리는 생활에서 헤어나는 일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남편이 세상을 뜰 때 아들이 임종을 못 지켰듯 시어른들이 세상을 뜰 때 남편 역시 시부모님의 임종을 지켜내지 못했다. 남편은 당시 하루도 거르지 않고 당구장에서 세월을 보내던 터라 그것은 당연한 일인지도 모른다. 가족에 대한 남편의 무책임으로 첫애는 고등학교 진학을 시키지 못했다. 둘째 애는 고등학교는커녕 중학교 진학을 한 해 미루는 지경까지 갔다.

나는 둘째 애를 붙잡고 ‘엄마가 우짜든지 내년에는 중학교 보내주꾸마. 그라이 너무 마음 쓰지 말거래이~ 올 한해만 우예 잘 버티마 안되겠나. 어요, 어요. 미안테이. 부모 잘못 만나서 남들 다 가는 학교도 못 보내주고 니 볼 낯이 없데이. 우야마 좋노. 우야마 좋노, 니한테 미안해가 내 우아먀 좋노’ 아예 곡을 했다고 해야 할 것이다.

그 뒤로 자꾸만 변해가는 둘째의 모습을 보면서 내 잘못 때문이라는 죄책감 때문에 가슴을 치며 통곡하는 일이 많아졌다. 남편을 탓한다고 돌이킬 수 있는 것도 아니었고 그저 가난이 원망스러울 뿐이었다. 남편은 환갑이 되던 해에 세상을 떴다. 남편이 가끔 어깃장 놓는 것을 받아주면서 그래도 친정어머니보다 백배 낮다는 생각을 많이 했다. 그래서인지 위암으로 세상을 등진 뒤에도 그렇게 원망스럽지도 않았다. 대신에 애틋한 감정 같은 것도 남아있지 않았다.

남편보다 더 오래 살았던 친정어머니의 임종을 앞두고 어머니와 나의 쌓였던 한을 풀어놓을 시간이 주어졌다. 친정어머니는 진정으로 사과하고 미안하다고 했다. 아버지의 사랑을 독차지했던 것이 미웠단다. 공부를 시켜야한다는 아버지의 뜻을 어긴 것도 여식이 잘 되면 남동생 인생이 잘 풀리지 않을 거라는 생각이셨단다. 나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 때문에 남동생이 사랑받지 못한 게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고 했다.

"옥아 옥아 너거 엄마 용서해도. 너거 엄마가 니 처자(처녀)적에 그래 못할 짓 했제. 내가 니한테 와 그래 못된 짓만 했노 모르겠데이. 이래 늦게 말해가꼬 미안타. 정말 미안테이. 우야꼬, 미안해서 우야마 좋노. 옥아, 옥아. 다 이자뿌라. 이자뿔고(잊어버리고) 너거 엄마 용서해도. 어요."

그렇게 짧지 않은 말씀으로 용서를 구하고 친정어머니는 떠나셨다. 어머니의 한마디에 마음은 어느 정도 풀렸다. 하지만 어머니처럼 나 역시 어머니의 삶을 살면서 이 땅에서 어머니라는 위치가 어떤 희생을 요구하는 것인지 알기에 그 용서라는 것은 오래전에 마음속에서 빛을 바랜 것이었을지도 모를 일이다.

내 나이 환갑에 한글을 깨우치면서 자유롭다는 의미에 대해 느끼기 시작했다. 그 중 하나는 지난 번 4.15총선 때였다. 늘 남편의 의견을 좇아 선거라는 선거는 항상 남편의 의견대로 따라갔다. 남편이 없는 이후 두 번째 치르는 선거에서 나는 자식들의 예상을 뛰어넘어 민주노동당이라는 곳에 표를 던졌다.

무엇보다 남편의 그늘에서 벗어나 스스로 판단해서 선거를 치른 것에 대한 뿌듯함이 있었다. 내 생에 첫 선거는 그렇게 이루어졌다. 대선 때는 그래도 보수색이 짙은 경상도의 영향도 있었지만, 빨갱이들이 나라 팔아먹는다는 생각에 민노당은 씨알도 안 먹히는 당이었다.

하지만 가난하기는 예나 지금이나 매 한가지인데 차별 없는 세상을 부르짖는 당에게 한 표를 던진다고 해서 크게 후회스럽지 않을 듯했다. 막연하나마 맞는 말이라고 여겼기에 가능한 일이기도 했지만 말이다. 의아해하는 애들의 얼굴을 보면서 한마디 해주었다.

"그 넘이 그 넘이고 맨날 저거들끼리 누가 더 도둑질 잘하노카민서(잘했는지)쌈질이나 해쌓는데 내가 미칬나 그다가(거기에다) 표 던지구로, 참말로 웃기는 종자들 아이가. 내 핑생에 가들한테 표 던지가꼬 덕 본기 읍따. 선거철 딱 대마(되면) 이거 해쭈께 저거 해주께 매리새끼맨쿠로 쫑알댈 쭐이나 알지. 지나고 나마 가들이 약속 지키는 거 봤나? 인자는 기대할끼 읍따아이가."

우리 시대 어머니들의 삶이 나와 별반 다를 게 없을 거란 생각을 한다. 더하면 더했지 못하지 않은 한 많은 어머니들의 인생이 나의 인생이리라. 무엇이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능력마저 세월 속에 묻혀버렸던 인생. 가족을 위해 한 여성으로서 위치는 온데간데 없고 온전히 삶을 가족을 위해 내던져야 하는 인생. 그것을 미덕이라 여겼던 이 사회가 아닌가. 그래야만 가족들이 행복해질 거라 믿어왔던 세월이었다. 이 나이에 무엇을 할 수있으랴만 그 누구도 원망하지 않는 삶을 살면서 그래도 할 수 있는 일이 있다면 두 손 걷고 해 볼 요량이다.

어릴 적 새벽이면 항상 맑은 정화수를 떠놓고 촛불을 밝히신 후 달을 보며 가족의 평안함을 기원하는 어머니의 모습을 볼 수 있었다. 뒷간을 가다 마주치던 어머니의 모습이 새삼 떠오른다. 저녁노을에 물든 어머니의 붉은 얼굴을 보며 많이 울었던 기억이 난다. 어렸을 때 정말 나는 어머니가 붉은 노을나라에 다녀온 줄 알고 당신 혼자 다녀온 것에 내내 서운해 하며 떼를 쓰고 울었으니까.

사회생활을 하면서 그게 어떤 의미인지 알게 되었다. 힘든 삶을 잠시 비켜나고 싶어 한잔 술에 홍조 띤 얼굴을 하고 있었음을 말이다. 시골에 가면 지금도 하루도 거르지 않고 기도를 하시는 어머니의 모습을 본다. 그 기도는 이 세상 많은 어머니들의 마음을 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식들의 평안함과 세상의 안녕을 노래하는 축원이 들리는 듯하다.

덧붙이는 글 | '부모님 자서전' 대필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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