천년학 -글자가 예술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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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한국 영화를 사랑하기 시작한 것은 대학 시절 안성기, 장미희 주연의 <깊고 푸른 밤>을 보고 나서인 것으로 기억된다. 방학 때 스터디 그룹을 만들어 열심히 공부하러 다녔지만 <깊고 푸른 밤>을 보기 위해 스터디 그룹의 친구 하나를 꼬셔서 땡땡이치게 만들었던 것이다. 그 후로 <겨울 나그네> <박하사탕> <미술관 옆 동물원> <쉬리> <공동경비구역JSA> <오아시스> <서편제> <집으로> <살인의 추억> <웰컴 투 동막골>... 그리고 <괴물> 등등에 이르기까지 모두 나를 행복하게 했던 영화들을 손꼽아 보면 한국영화의 질적 향상이 가져 온 이상으로 한국영화에 대한 인식의 전환이나 애정도에 많은 변화를 가져왔다. 4월 27일(금)에는 모처럼 한가하게 쉴 수 있는 여유가 있어서 별러 두었던 <천년학>을 보러 가기로 하였다. 미리 약속했던 친구는 영화보다 산이 좋은지 산삼을 캐오겠다고 갑자기 산으로 내빼서 혼자가 된 나는 혼자서도 영화 잘 보러 다니던 습관이 발동하여 계획을 강행하기로 하였다. '어디 산삼 한 뿌리 안 줘봐라, 흥...'하면서. 직장을 입시학원에서 초등학교로 옮기고 둘째 아이가 고등학교에 진학하고 이래저래 몇 달 동안 마음이 시끄럽고 복잡하여 영화 한편 볼 여유가 없었다. 더구나 TV도 교육적인 차원에서 없애버린 지 일 년이 넘었고, TV에 비디오 장치가 같이 되어 있었던 탓에 비디오도 없앤 형국이 되었으니 영상미를 느낄 만한 환경이 아닌 것이다. 아이들이 불평하면 인터넷으로 필요한 것만 찾아서 보라고 한다. 그러면서 요즘 잘 나가는 드라마가 무엇인지, 출연진은 어떻게 되는지 슬쩍 곁눈질로 아이들에게서 정보를 얻는다. 뉴스는 라디오로 듣는 편이라서 세상 돌아가는 것을 알고야 있지만 그래도 신세대 아이들과 대화가 통하려면 어느 정도의 정보는 필요하게 마련이다. 주몽이 그렇게도 재미있다고 하여 마음먹고 인터넷으로 보았는데 하필이면 주몽이 한번도 나오지 않아서 실망했던 일도 있었다. 주몽이 죽었다나, 어쨌다나.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 고장난 핸드폰에 입력되어 있는 포스터에 비비안리 대신 내 얼굴을 넣어 저장했던 것을 다시 편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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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렇다 보니 영화를 좋아하는 나는 틈만 나면 영화관으로 달려가던 대학 시절이 무지하게 그립다. 가장 기억에 남는 것은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인데 종로 3가 근처 단성사에서 보았던 것 같다. 아마 상영 시간이 222분 이었던 걸로 기억한다. 중간에 휴식 시간이 주어졌었으니까. 클라크 게이블의 표정 연기가 아직도 인상에 남는다. 이런저런 생각을 하며 영화관에 도착해 보니 관객이 나를 포함 해 열명 남짓이었다. 아무리 평일이라지만 이래서 되겠나 싶은 생각이 들었다. 그래도 한국의 거장이라고 하는 임권택 감독의 100번째 작품이라는데...
 천년학- 꿈 속으로 아련히 들어가는 듯한 유봉, 동호, 송화의 뒷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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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앞 좌석에서 핸드폰이 울렸다. 어디가나 마찬가지로 핸드폰 공해는 꼭 있다. 아직도 영화 상영 중에 통화까지 하는 사람이 있다는 것은 얼마나 한심한 일인지... 남을 배려하는 것이 그렇게도 힘든 일인지 모르겠다. <서편제>의 연장선에 있는 <천년학>의 내용은 새로울 것이 없다. 그러나 사계절의 영상미는 정말 뛰어났다. 특히 광양 청매실 농원의 매화가 만개했을 때 찍은 영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매화 향에 묻혀 죽어가고 있는 '백사'(장민호 분)에게 송화(오정해 분)는 "꿈이로다 꿈이로다... 꿈 깨이니 또 꿈이요... 꿈에 나서 꿈에 살고 꿈에 죽어가는 인생 부질없다...."하며 인생의 허무를 노래한다. 봄과 함께 아련하게 느껴지는 장면이다. 어릴 때 어머니를 따라 절에 간 적이 있었다. 그때 어느 보살님이 인생은 꿈이라고 하였다. 그게 무슨 말인가 싶어 집에 돌아온 후에도, 그 후로도 오랫동안 화두처럼 머릿속에 남아 있었다. 인생이 꿈이라면 우리는 언제 꿈에서 깨어난단 말인가?
 꽃잎 하나마다 애증을 담고 하늘로 오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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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 봄에는 저렇게 아름다운 매화도 못 보고 저물어가는 매화를 보고 온 것에 만족해야 했으니 영상으로나마 만나는 매화가 그렇게도 애틋할 수가 없었다. 성당의 우리 신부님께서도 그 장면이 마음에 남아있었는지 꽃비가 내리더라는 표현을 하셨다. 꽃비? 꽃비라... 꽃비란 말이 정말 아름답게 느껴졌다.
 저 꽃잎들 종내는 가볍게 이승을 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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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데 그 꽃비가 하늘에서 내려오지 않고 바람을 타고 하늘로 올라가는 느낌이었다. 부질없고 부질없어 허망한 인간사가 꽃잎 하나마다 애증을 담고 다음 생으로 향하는 것 같았다. 그렇게 날리다가 종내는 애증이고 눈물이고 다 내려놓고 가볍게가볍게 이승을 버릴 것이다. 내생(來生)이 있다면 다시 무엇으로 만나더라도 또 꿈이 아닐른지... 청매실 농원에 갔을 때 <천년학> 세트장 앞의 절구에 고인 물 위를 수놓던 꽃잎이 마음에 남아 찍어 두었었는데 그 사진과 똑같은 화면을 나는 놓치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의 시각도 삶과 죽음의 의미를 심도있게 전달하려고, 바람에 날리다가 절구에 가득 담기는 꽃잎에 머물렀을 것이다.
 절구에 담긴 물에 떠 있는 매화꽃잎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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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은 잘 알고 있듯이 이청준의 소설 <선학동 나그네>를 영상으로 옮긴 것이다. <선학동 나그네>를 읽으면서 가장 선명하고 아름다운 장면으로 기억되는 것은 포구가 논으로 변해 버렸지만 선학동을 다시 찾은 눈 먼 여자는 밀물 때를 잡아 소리를 하고, 소리를 하는 동안 불가사의하게도 포구로 물이 차오르고 한 마리 선학이 포구를 끝없이 노니는 것이다. 이 아름답고 신비로운 광경을 임권택 감독은 마지막 장면에 넣어 안타깝고 아쉬운 여운을 더해주고 있다. 동호(조재현 분)가 송화를 그리워하면서 북채를 잡고 송화는 어느새 곱디 고운 흰 한복을 입고 소리를 하는 것이다. 물이 점점 차오르고 학이 날고 다시 관음봉은 선학의 자태로 물그림자를 만든다.
 송화에 대한 그리움을 가득 담은 동호의 눈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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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은 동호와 송화의 사랑에 초점을 맞추었다. 동호는 송화를 사랑하지만 누나라고 불러야 하는 괴로움에 집을 떠난 후 군에 입대한다. 다시 송화를 찾은 동호는 판소리 공부를 하는 송화를 위해 돈을 벌어 집을 지어주려고 중동으로 가려 한다. 서로를 그리워하는 마음은 제주의 오름에 올라 춘향가 중에서 이별가를 부르는 송화와 이에 북장단을 손으로 맞추는 동호의 모습에서 눈시울을 젖게 한다. 송화의 애 끊는 듯한 소리가 사랑의 절정을 유감없이 보여준다. 배경 또한 가슴을 에이는 데 한 몫을 한다. 제주에서 동호를 그리워하는 송화는 보지도 못하는 텔레비전에 귀를 기울이고 잘 나오지 않는 텔레비전을 두드려 가며 중동지역에서 전해오는 '대한뉴스'를 듣는다. 텔레비전에서 동호 소식이 전해질 리 만무하지만 귀를 세우고 중동지역의 상황을 듣는 그 마음이야말로 간절함이 아닐 수 없다. 사랑의 깊이는 도대체 얼마나 될까? 어떤 색깔의 사랑이든 깊이는 알 수가 없다. 그 깊이를 가늠할 수 있다면 우리가 살아가기 한결 힘이 덜 들지도 모를 일이다. 중동에서 돌아온 동호는 눈 먼 송화가 불편함이 없도록 세심한 애정을 기울여서 집을 짓는다. 집을 모르고 지나치지 않도록 풍경을 달아 놓고, 문턱을 없애고 모두 미닫이문으로 만든다. 복도를 좁게 하여 방향을 잃지 않도록 하고, 방마다 다른 점자를 새겨 넣어 찾기 쉽게 하는 등 동호의 헌신적인 사랑이 곳곳에서 드러난다. 그러나 그 집의 주인 송화를 결국 만나지 못하고 한 때 같이 살았던 창극단의 단심(오승은 분)의 정신병 뒷바라지로 집마저 다 날려버린다. 단심은 말한다. 나도 장님이 되어서 이 집에 살고 싶다고...
 천년학 촬영지 장흥 회진리- 산봉우리가 학이 날개를 편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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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호역의 조재현의 내면 연기와 눈빛 연기는 심금을 울린다. 하지만 어색한 장면도 눈에 띈다. 동호가 제대를 하고 송화를 만나는 장면은 화면의 느린 전개에 비해 너무 급하다는 인상을 받았다. 그래서 탄피로 송화의 반지를 만든 동호의 절절한 감정이 다 전해지지 않고 어색하게만 느껴진다. 선술집의 용택(류승룡 분)은 송화에게 헌신적인 사랑을 표현하는 동호와 삼각구도의 인물로 설정됐다. 하지만 마지막 장면에서 동호의 북장단과 송화의 소리에 물이 차오르고 학이 나는 것을, 용택의 눈을 통해 관객을 몰입시키는 무게 있는 인물이다. 유봉(임진택 분)과 2대를 소리로 이어오면서도 예능인으로서 남아 <적벽가>를 부르는 조명창의 권위에 밀려나며 판소리의 전문가로서 인정을 받을 수 없는 시대적 배경도 임권택 감독은 소홀히 다루지 않았다. 임권택 감독은 <서편제>에서 거듭나기 위한 노력의 하나로 음악을 선택했다고 한다. <서편제>에서는 김수철이 음악 감독을 맡았으나 <천년학>에서는 동양의 절제된 정서와 서양의 자유분방한 정서를 오묘하게 표현해내고 있는 재일교포 피아니스트인 양방언이 음악감독을 맡았다. 한국 영화로는 최초로 영국 심포니 오케스트라의 연주로, 비틀즈가 녹음했던 영국 애비로드 스튜디오에서 OST를 녹음했다고 한다.
 선술집-학이 금방이라도 저 소나무에 날아와 앉을 것만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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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권택 감독이 완성에 가까운 작품을 내놓고 싶다고 만든 <천년학>의 완성도가 높다고들 평한다. 하지만 오히려 나에게는 <서편제>가 더 매력적인 작품으로 다가온다. 소리꾼 이야기인 <서편제>의 감동이 너무 강해 애정을 다룬 <천년학>이 조금은 가볍게 느껴지는지도 모르겠다. <천년학>은 무엇보다도 아름다운 한국의 정서와 합일점을 찾으려는 영상미의 대가 임권택 감독의 장인정신이 돋보이는 작품이다. 그러나 빛과 소리와 사랑을 빚어낸 <천년학>의 관객은 그리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보고 음악과 소리와 혼에 감동 받으면 좋겠다. 그리고 중요한 것은 혼자 보기에 그만인 작품이라는 것이다. <서편제>가 누군가와 장단을 맞추며 보아야 어울리는 영화라면 <천년학>은 혼자 보아서 더 좋은 영화라고 추천하고 싶다.
 흰철쭉은 송화의 이미지를 닮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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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천년학>을 보고 돌아오는 길에 어쩐지 새하얀 철쭉이 유난히 눈에 들어왔다. 초록잎 위에 새하얗게 핀 철쭉은 동호와 송화의 애절한 마음을 담고 있는 듯 보였다. 초록과 흰색의 조화가 저렇게 가슴 시리다니... 조팝꽃이나 완두콩꽃, 혹은 파꽃, 요즘 한창 피고 있는 이팝꽃도 초록과 흰색의 조화를 이루고 있지만 꽃송이가 커서인지 흰 철쭉꽃이 흰옷 입은 송화의 이미지와 닮아 보였다. 가슴 밑바닥에서부터 고요히 고이는 슬픔이 느껴진다. 사랑은 이렇게 애절하게 봄을 밟고 꿈처럼 가버리는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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