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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경북 영양(10c). 경주박물관 앞뜰.
ⓒ 안병기

5월 초 국립 경주박물관에 갔을 때였다. 새벽 새벽의 미명이 채 걷히지 않은 박물관 마당 한 켠을 걷다보니 목이 달아난 석불들이 하얀 부표처럼 떠 올랐다. 목이 붙어 활보하는 중생의 마음이 아려왔다. 세상은 왜 돌들의 순교를 필요로 했던 것일까. 왜 생물도 아닌 무생물을 두 번씩이나 죽였을까.

목 없는 석불군이 끝나자 이번엔 미완성인 채로 앉아 있는 석불 두 점이 출현했다. 누가 저렇게 돌을 새기다 말았을까. 누가 그의 생의 한 시기를 저렇게 부질없이 낭비해버렸을까. 무슨 피치 못할 사정이 있어 중도에서 돌에 대한 새김을 포기했던 걸까.

새삼스럽게 영원과 불멸에 대한 꿈을 도중에서 접어야 했던 미지의 옛 사람에 대한 연민이 마음 속으로 밀물져 왔다. 마치 젊은 날 내가 포기해버렸던 옛 꿈의 흔적이라도 되는 듯이 안타까웠다.

천년도 훌쩍 넘은 세월의 건너편에서 누군가 버려야 했던 꿈의 잔영을 카메라의 바인더 속으로 힘껏 끌어 당긴 다음 셔터를 눌렀다. 이제 내가 인화한 사진 안에서 그가 꿈꾸던 불멸은 한동안 이어질 것이다.

▲ 경주 남산 삼릉계곡 석불좌상.
ⓒ 안병기

꿈이란 무엇일까. 짧게 말한다면 현실과의 대척점에 존재하는것이 꿈이다. 현실과 등을 기대고 서 있다. 누구든 꿈은 이뤄진다"고 말하지 마라. 그건 미필적 고의에 의한 사기에 지나지 않으니까. 모든 꿈의 영역은 기본적으로 불가능에 속한다. 접근 불가. 철두철미한 폐쇄성를 그 본질로 한다. 만일 꿈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이미 꿈의 시렁에서 끌어내려진 현실이다.

그런데 왜 사람들은 꿈을 하나의 가능태로 여기는 것일까. 인간은 자신이 꾸는 꿈에 속고 또 속아 넘어가는 게 어리석음을 가졌다. 사람들은 그 상습적인 어리석음을 합리화 하기 위해서 그것을 '의지'라고 고쳐 부를 뿐이다. 흔들리는 자신들의 마음을 다잡기 위하여 '불굴의'라는 관형사를 끌어다 붙인다.

꿈의 성분을 세심하게 들여다 보면 아무도 눈치채지 못할 만큼 미세한 사기성이 함유돼 있다는 걸 안다. 사람들은 그 미량의 사기성에 대책없이 농락 당하곤 한다. 그러나 뒤돌아서면 그만이다.

그렇게 꿈은 사람을 철저하게 중독시키고 세뇌시킨다. 나 역시 살아오는 동안 꿈이라는 이름으로 행해졌던 그 무수한 사기에 속절없이 당해왔다. 어렸을 적엔 홍시감을 따던 바로 간짓대로 하늘의 별마저 따올 수 있다고 믿을 만큼 순진했다.

▲ 경주 남산(금오산) 용장사 터 삼층석탑.
ⓒ 안병기

애써 오른 금오산 꼭대기에서 모가지를 잃어버린 꿈 하나를 만난다. 가엾어라. 저 석불은 어떻게 해서 불멸의 꿈을 빼앗겼을까. 왜 우리들의 꿈에는 모가지가 없는 것일까. 종말에 대한 비극적 암시를 위해서? 그게 아니라면 자유롭고 무제한적인 상상력을 위하여? 실체가 없는 꿈의 허망함을 보다 생생하게 느껴보라고?

어쩌면 세상의 모든 꿈은 본래부터 형태란 게 없는 것인지도 모른다. 정해진 형태가 없으니 끝까지 자신이 책임을 지고 형태를 만들어야 하는 미션이 주어진다. 아마 꿈을 가진 사람이 외로운 건 그 때문일 것이다. 그러니 이 세상 누구도 감히 피 한 방울 흘리지 않고서 자신이 가진 꿈에 다가갈 수 있다고 믿어선 안된다. 그렇다면 그것은 허황한 관념일 뿐이다. 허상에 지나지 않는다.

▲ 대전 상대동. 한밭도서관 향토사료관 앞.
ⓒ 안병기

저 모가지 없는 석불들은 참, 운이 좋다. 용도폐기되지 않은 채 여기에 이르러 가부좌를 튼 채 세상을 관조하고 있다. 꿈은 시작한 사람이 있고 그 꿈을 이어가다 지쳐 중도에 버린 사람이 있고 영영 버려졌던 꿈을 수습하는 사람이 제각기 다르구나.

누군가 버려질 뻔한 저 석불들을 챙겨 다시 꿈을 꾸게 한 것처럼 먼 훗날 누군가가 내가 포기하고 버렸던 모진 꿈의 파편들을 주워줬으면 좋겠다.

오늘 난 그렇게 단절이 아닌 역사의 영속성을 믿고 싶은 거다. 내 꿈이 너무 과한가? 나보다 먼저 이 땅에 왔던 돌부처여.

태그:#돌부처, #경주박물관, #삼층석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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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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