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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농무>의 시인 신경림과 '그림마당 민'

1974년의 봄은 긴급조치 9호와 함께 시작되었다. 사회는 급속히 냉동되었으며 봄은 어디론가 실종되고 말았다. 송창식은'무엇을 할 것인가 둘러 보아도 보이는 건 모두가 돌아 앉(노래 '고래사냥')"아 있다고 말하면서 우리 그러지 말고 고래 잡으러나 떠나자고 선동했지만 그 말에 귀를 기울이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나 역시 내게 등돌리지 않은 그 무엇인가를 찾아 헤맸다. 그러나 모색의 끝자락에서 내가 만지는 것은 공허감 뿐이었다. 그럴 때면 몇 시간이고 어두운 다방 한 구석에 앉아 불붙지 않는 시간을 쉽게 불붙을 줄 아는 성냥개비로 대체하는 법을 익히곤 했다. 함부로 삶을 직시해서는 안되는 위험한 시대였다. 먼발치에서라도 삶을 바라보지 않고는 배길 수 없는 갈증이 슬며시 찾아오는 날이면 책방으로 나가서 전공과는 아무런 관계없는 시집을 사서 읽곤 했다.

창작과 비평사에서 출간된 신경림의 <농무>라는 시집도 그렇게 만났다. 세상에 나온지 1년이 지나서 였다. 책 속의 '파장'이라는 시 가운데 '못난 놈들은 서로 얼굴만 봐도 흥겹다'라는 한 구절에 매혹돼버렸다. 시집 <농무> 속에는 점차 피폐해가는 농촌 현실이 파편처럼 흩어져 있었다. 농무는 농민이 추는 춤이로되 신명의 춤이 아니라 한과 울분을 토해내는 춤이었다.

'갈대'와 같은 '순수한' 서정시조차도 마찬가지였다. "산다는 것은 속으로 이렇게 / 조용히 울고 있는 것이라는 것을/그는 몰랐다."(시 '갈대")라는 구절을 읽는 순간, 난 어느 새 갈대와 통정하는 사내가 돼 있었다. 시인의 감정이 빠르게 전이돼 왔던 것이다. 내 자신이 울고 있는 갈대라는 걸 그때 처음 알았다. 이를테면 신경림 시인이 '원조 갈대'라면 난 '짝퉁 갈대'였다. 짝퉁에겐 원조를 닮으려고애쓰는 콤플렉스가 있고 그 때문에 원조의 세계에 가까이 가려는 경향이 있다.

'짝퉁 갈대'는 속으로 조용히 다짐했다. 언젠가 기회가 닿는다면 이 시인을 꼭 한 번 만나 보리라. 신경림 시인을 실제로 본 것은 그로부터 아주 오랜 세월이 지나서였다. 정확한 기억은 아니지만 1989년 그 어름이었을 것이다. 당시 나는 전주에 살고 있었는데 주말이면 그림 구경을 한답시고 뻔질나게 서울을 올라다니곤 했다. 그림의 'ㄱ'자도 모르는 내게 어떻게 그런 황당한 바람이 불었던 걸까.

한 번 올라가면 경복궁 옆 사간동에서 인사동까지 화랑이란 화랑은 죄다 훑고 다녔다. 내 순례의 목록에는 대학로 샘터 화랑 근방도 올려져 있었다. 어쩌면 그 시절 내 다리에는 몇 백 마력의 엔진이 달려 있었는지도 모를 일이다. 국악 음반 수집 광풍까지 한몫 거들고 있었으니까.

이종구, 민정기, 김정헌, 임옥상, 박불똥 등의 민중미술 쪽 작가들과 이만익, 권순철, 강경구 화백 등을 그 시절 내가 단골로 접했던 화가들로 기억한다. 그중에서도 특히 1991년엔가 학고재 화랑에서 열렸던 신학철 선생의 두 번째 개인전에 대한 기억은 아직도 뚜렸하다. '모내기'라는 그림 때문에 1989년 국가보안법으로 구속되기도 했던 선생의 전시회에서 본 '한국근현대사' 연작들은 신랄하기 짝이 없었다. 그 어떤 역사책보다 더 생생하게 우리 역사의 치부를 드러내는 선생의 그림 앞에서 '전율은 나의 것'이 되었다.

학고재 화랑은 선생의 전시회 도록을 1만원씩에 판매하고 있었다. 그러나 내 호주머니는 달랑 전주 내려갈 차비 외에 여윳돈을 허락하지 않았다. 전날 밤 시인학교라는 카페에서 가진 돈을 몽땅 음주로 탕진한 뒤끝이었기 때문이다. 집에 내려오자마자 곧 바로 신학철 선생에게 편지를 썼다. 단순히 도록 한 권 보내주실 수 없느냐는 내용인데 말을 치장하다보니 만리장성이 되었다. 며칠 지나지 않아 선생의 서명이 든 도록이 우송돼 왔다. 정성을 다하면 절대 호박떡은 설지 않는 법이라는 걸 어릴 적 무당에게 들었던 게 유익했던가 보다.

지금은 세월 속으로 사라져버린 민중미술판 '그림마당 민'에 가면 민중미술의 모든 것을 섭렵할 수 있었다. 1986년에 작고한 오윤의 판화를 처음 본 곳도 그곳이었다. 때로는 내가 전에 알고 지내던 사람들의 그림을 볼 수 있는 우연도 심심찮게 누렸다. '그림마당 민'은 갤러리였지만 민예총의 회의장 구실도 했던 모양이다. 어느 날이었던가. 전시회를 구경하는 도중이었는데 민예총 회의를 하려고 그랬는지 전시장의 문을 갑자기 닫아버렸다. 그 바람에 오도가도 못하고 꼼짝없이 회의를 지켜봐야 하는 신세가 되고 말았다.

그렇게 시인과의 만남은 다소 살벌하게 이루어졌다. 신경림 시인은 당시 민예총 회장을 맡고 있었다. 회의가 시작되고 곧 이어 회장의 인삿말이 있었다. 자신의 순서가 끝나고나서 자리에 앉은 시인이 본격적으로 졸기 시작한다. 미안한 표현을 쓰자면 봄볕 따가운 양지 쪽에 마실나온 닭처럼 꾸벅꾸벅 졸았다.

그렇게 자울자울 하다가도 자신의 차례만 되면 용케 깨어나서 회의의 원만한 진행에 하등 지장을 주지 않았다. 그때마다 사람들 사이에서 잔잔한 웃음이 번져나갔다. 시인 자신이 생각해도 겸연쩍었던지 따라 웃었다. 신경림 시인과의 인연은 거기까지가 전부였다. 그러나 시인의 소탈함과 가식없는 행동은 내 뇌리에 지금껏 인상깊게 박혀 있다.

구산선문의 탯자리 실상사와 석장승

작년 9월, 나라는 존재의 허상이 말랑말랑하게 느껴졌을 때 실상사를 찾아갔다. 백장암에서부터 걷노라니 가을 볕이 몹시 따가웠다. 실상사는 구름을 매개로 지리산 제1봉인 천왕봉과 교감을 나누며 지리산으로부터 흘러내려오는 만수천가에 앉아 탁족을 즐기며 한가로이 앉아 있었다. '실상사로 가려거든 나를 밟고 가라'고 다리가 말했다. 해탈교는 실상사를 속세와 이어주는 끈이었다.

▲ 대장군 장승과 상원주장군 장승.
ⓒ 안병기
해탈교 부근에서 돌장승들을 만났다.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다'는 듯 다리를 건너지 않고 있는 장승 1기와 속세를 버리지 않고 어찌 피안의 맛을 알겠느냐고 어서 건너오라고 건너편 장승을 손짓해 부르고 있는 장승 2기 등 모두 3기의 장승이었다.

장승은 민간신앙의 한 형태이다. 마을 어귀나 사찰의 들머리에 세워져 경계를 표시하기도 하고 잡귀의 출입을 막는 수호신의 역할도 한다. 중요 민속자료 제15호인 남원 실상사 석장승 역시 경계표시와 함께 사찰 경내에서 부정한 행위를 금하라는 뜻으로 세워진 것이다.

세 장승은 모습이 거의 비슷했다. 벙거지를 쓴 머리에 퉁방울 눈에 뭉툭한 주먹코. 윗 턱 아래로 삐져나온 송곳니 두 개가 만들어 낸 입가의 미소가 "나, 나쁜 사람 아니야"라고 말하고 있었다.

왼쪽 나무 밑에선 대장군과 상원주장군은 마치 연애거는 남녀처럼 마주보고 있고, 그런 모습을 행여나 동네 어른들에게 들킬세라 옹호금사축귀장군이라 새겨진 다리 저 편 장승이 망을 봐주고 있는 듯한 형국이다. 장승을 바라보고 있자니 신경림 시인의 시 '실상사의 돌장승'이 부표처럼 떠올랐다.

지리산 산자락
허름한 민박집에서 한 나달 묵는 동안
나는 실상사의
돌장승과 동무가 되었다.
그는 하늘에 날아올라가
노래의 별을 따다 주기도 하고
물 속에 속꽂이해 들어가
얘기의 조약돌을 주워다 주기도 했다.

헐렁한 벙거지에 퉁방울눈을 하고
삽십 년 전에 죽은
내 삼촌과 짝이 되어
덧뵈기춤을 추기도 했다.
어름산이 시늉으로 다리를 떨며
자벌레처럼 몸을 틀기도 했다.

왜 나는 몰랐을까
그가 누구인가를 몰랐을까.
문득 깨닫고 잠에서 깨어나 달려가 보니
실상사 그 돌장승이 섰던 자리에는
삼촌과 그의 친구들만이
퉁방울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서서
지리산 온 산에 깔린 열나흘 달빛에
노래와 얘기의
은가루를 뿌리고 있었다. - 신경림 시 '실상사의 돌장승 - 지리산에서' 전문


사물의 의미는 늘 더디게 포획된다

시인은 언제 이곳에 다녀갔던 것일까. 시 '실상사의 돌장승'은 신경림의 세 번째 시집 <달넘세>(1985)에 수록된 시이다. 그러니 아마도 그 이전에 다녀갔을 것이다. 이곳에 왔던 시인은 나흘이나 닷새 가량(나달)을 민박집에서 묵었던 모양이다. 심심한 시인은 돌장승과 동무가 되었던 거고. 장승은 새로 사귄 친구를 위해 '하늘에 날아올라가/노래의 별을 따다 주기도 하고/물 속에 속꽂이해 들어가/얘기의 조약돌을 주워다 주기'도 했던가 보다.

더 나아가서 시인은 실상사 장승이 삽십 년 전에 죽은 시인의 삼촌과 짝이 되어 경상도 지방의 야유나 오광대 등 가면극에서 사용되는 대표적인 춤사위인 덧배기 춤을 추는 듯한 환상에 사로잡히기도 하고 장승이 줄꾼(어름산이) 시늉으로 다리를 떨기도 하고 나뭇가지처럼 생긴 자벌레처럼 몸을 트는 듯한 착각에 빠지기도 한다. 그렇게 함께 놀면서도 시인은 정작 장승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한다. 그러던 어느 날, 잠에서 깬 시인은 문득 그 장승이 삼촌이라는 걸 깨닫는다.

사물의 개념은 낱말풀이식으로는 100% 이해되지 않는다. 시간이 지나야 비로소 완벽하게 터득하게 된다. 어렸을 때 광주천변 가설극장 무대에서 속칭 약장사들이 노래 부르던 풍경을 많이 봤다. 노래를 부르고나면 약을 사라고 청중에게 돌렸다. 그들이 부르는 노래가 판소리였다는 걸 안 것은 아주 먼 훗날이었다. 추상화로 각인된 풍경이 구상화가 되기까지 무려 30년이 걸린 셈이다.

부모님이 돌아가시고 나서야 비로소 부모가 내게 무슨 의미를 가진 존재였던가를 깨닫고 되고 어렸을 적 부모님과의 아주 사소한 추억이 나이들어 삶에 지쳐 있을 때 비로소 위안이 되는 현상을 경험한다. 인간은 숙명적으로 늘 의미를 더디게 깨닫고 후회하는 어리석은 존재로 태어났다.

사람은 그 시대를 닮고 시대를 닮은 사람은 작품 속에다 자신을 투영한다. 시간을 더 거슬러 올라가면 우리가 보고 있는 것은 300년 전 이곳에 살던 사람들의 얼굴이다(대장군의 받침돌에 있는 기록으로 보아 조선 영조 원년(1725)에 세워졌음을 알 수 있다.). 실상사 석장승은 신경림 시인의 삼촌의 얼굴이자 우리들 삼촌의 얼굴이다.

신화적 상상력으로 가득찬 이 시 속에서 장승과 삼촌은 하나이다. 장승인가 하고 쳐다보면 삼촌의 얼굴이고 삼촌인가 하고 자세히 들여다보면 장승이다. 실상사 석장승에서 모티브를 얻은 이 시는 시인이 죽은 삼촌을 그리워 하는 진혼곡에 다름 아니다. 시 속에서 퉁방울눈에 눈물을 그득 담고 서 있었던 것은 삼촌 친구들이 아니라 시인 자신이다.

글을 마치려고 하니 2년 전에 세상 떠난 막내 외삼촌 생각이 간절해진다. 머리가 명석했던 삼촌을 망친 건 평생을 달고 산 술이었다. 난 술 이전에 맹호부대원으로 2년간 베트남에 파병돼 있으면서 얻은 삶에 대한 뿌리깊은 회의 때문이었다고 믿는 사람은 나 이외엔 아무도 없다.

인간에게 죽음은 너무 빨리 온다. 그러나 사물의 의미는 늘 해찰부리는 아이처럼 더디게 온다. 하긴 세상이란 게 우리를 끙끙 앓게 만드는 얄궂은 심술이 없다면 여기가 바로 천당이 아니겠는가.

태그:#신경림, #신학철, #실상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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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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