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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운대역
정약용의 시가 있는 멀구슬나무
ⓒ 송유미
비개인 방죽에 서늘한 기운 몰려오고
멀구슬나무 꽃바람 멎고 나니 해가 처음 길어지네
보리 이삭 밤 사이 부쩍 자라서
들 언덕엔 초록빛이 무색해졌네.
- 다산 정약용, '농가의 늦봄' 일부


해운대역은 역사(驛舍)가 아담하다. 1934년 7월 15일 동해남부선(부산진-해운대간)개통으로 영업을 개시. 신라말 석학 고운 최치원 선생의 자, 해운으로부터 유래된 지명에 따라 해운대역이라 칭했다. 일부 열차의 시·종착역으로 관광 특구의 관문치고는 어느 시골 간이역 같이 전원적이다.

영화 <편지>에 나오는 간이역처럼 옹기종기 꽃화분이 먼저 반겨준다. 늘 출구를 통해 지나치는 발길이 오늘 따라 문득 멈추었다. 그간 몇 수십 차례도 넘도록 해운대 역 출구를 빠져나왔을 텐데, 오늘에야 눈에 띄는 멀구슬나무.

사람의 눈이란 이처럼 믿을 것이 못 된다. 역사에서 언제 승객을 위해 만들어두었음직한 멀구슬나무의 안내판은 처음보는 듯해서, 가만히 들여다보니 다산 정약용 선생의 강진 유배지에서 쓴, 멀구슬나무에 대한 시가 적혀 있다.

몸으로 시를 쓰는 나무

▲ 멀구슬나무에 대한 시
다산 정약용의 <농가의 늦봄>
ⓒ 송유미
아, 시를 쓰면서 애기똥풀꽃 이름을 마흔 너머 처음 알았다고 성찰하던 某 시인처럼 나는 그제야 이름만 듣던 멀구슬나무를 본 것이다. 왠지 생기가 없어 보이는 멀구슬나무. 지하에 질주하는 지하철의 영향 때문일까.

나이는 얼마나 된 것일까. 나무들도 나무끼리 함께 어울려 자라야 하는데, 멀구슬 나무는 외따로이 역 개찰구 앞에 서 있다. 나무의 속성상 빨리 자라는 멀구슬 나무의 커다란 키만으로는 그 나이를 짐작할 수 없다. 허공을 향해 팔을 뻗어 있으나 힘들어보이는 멀구슬나무. 기차가 떠날 때마다 바람에 손을 흔든다.

어림잡아 멀구슬 나무의 수령은 대충 오십년은 될까. 일본, 대만, 중국, 서남아시아, 히말라야와 우리나라 전남 소록도가 분포지인, 멀구슬나무는 어떻게 여기까지 흘러와 뿌리를 내리고 있는 것일까.

사람이라면 무척 외로울 것 같은 혼자 서서 비바람을 견디는 멀구슬 나무. 잎들은 귀를 가진 것처럼 쫑긋쫑긋 먼 바다 파도 소리에 귀를 여는 듯. 해운대 역무원 아저씨에게 언제부터 이 멀구슬나무가 있었냐고 물어보니 싱긋 웃기만 한다.

불멸의 이름, 해운(海雲), 최치원

▲ 해운대역
ⓒ 송유미
줄기와 껍질(고련피)은, 청열, 조습, 살충에 효능이 있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딸을 낳으면 이 멀구슬나무를 키웠다가 장롱을 만들어 보낸다고, 원래는 염주를 만들었다고 하여 목구슬나무로 부르다가 멀구슬나무가 되었다고 한다.

정갈한 자갈돌 위에 올려놓은 꽃화분과 정원수들이 잘 가꾸어진 해운대 역. 역사의 건물은 주위의 화려한 맘모스 건물이 늘어나도 예전과 똑같은 모습. 그래서 더욱 정겨운 해운대역.

해운대는 너무 유명해서 모두들 잘 알고 있지만, 해운대의 아름다운 바다에 가려, 숨겨진 그리운 전설을 찾는 사람은 몇이나 될까. 아파트 숲에 묻혀 버린 장산은 그 옛날 장산국의 성터. 청사포는 바다로 나간 지아비를 기다리는 망부석이 있다.

해운대 동백섬에는 인어공주상과 최치원 선생의 시 9편이 새겨진 돌병풍과 최치원 선생 동상이 있다. 동백섬 바닷가 암벽에 직접 새겼다는 해운(海雲) 두 글자는 선생의 필력을 느낄 만큼 아직 선명하다.

그 당시도 지금의 정치판처럼 어지러운 정치상황과 사회 현실로, 선생은 6두품 출신으로서 한계를 느끼고 대략 40여 세의 나이로 속세를 등지고 유랑했다고. 최치원 선생과 해운대는 별리 될 수 없고, 오랜 세월 수많은 묵객과 시객과 가객이 해운대를 찾아와 바다를 노래했다. 

하지만 해운대 파도소리보다 시적인 시는 그리 많지 않다. 자연이 바로 시고 노래인 해운대. 해운대 역사 앞에 묵객처럼 멀구슬나무는, 세상을 등지고 하늘을 향해 시를 쓰고 있다. 

저 중아 산이 좋다 말하지 말게
좋다면서 왜 다시 산을 나오나
먼 훗날 내 자취 돌아보게나
한번 들면 다시는 안 돌아오리
동백섬 산정을 내려와 동백섬 동남쪽
- 저중에게, 최치원


나무의 영혼

▲ 해운대역
기다림의 멀구슬나무
ⓒ 송유미
"좋은 나무가 바쁜 열매를 맺을 수 없고, 나쁜 나무가 좋은 열매를 맺을 수 없다. 좋은 열매를 맺지 못하는 나무는 모두 찍혀 불에 던져지는 것이다" 란 성경 구절이 있지만, 열매도 아름다운 꽃도 실하지는 않지만, 깊은 뿌리를 지하철 천정에 내리고 있을 멀구슬나무.

해운대의 낡은 역사의 그림자처럼 있는 듯 없는 듯 서 있는 멀구슬나무의 존재는, 해운대의 푸른 파도의 이미지를 닮아 있다. 잎잎마다 배를 뒤집는 나뭇잎 사각거리는 바람소리는 마치 두 선인의 영혼이 아름다운 해운대 역 멀구슬나뭇가지 위에 내려와 정담을 나누는 소리처럼 들려온다.

여름이면 파도처럼 몰려왔다가 빠져나가는 많은 인파가 사라진 바닷가의 외로운 물새발자국만 남은 모래사장처럼. 멀구슬나무는 승객이 빠져나간 갯벌처럼 쓸쓸한 역사를 혼자 지키고 있다. 곧 개장될 해수욕장으로 달려오는 기차에서 쏟아낼 많은 승객을 미리 나와 마중하는 듯….

덧붙이는 글 | 인간과 나무


태그:#해운대, #해운대 역, #멀구슬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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