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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무김치, 나박김치, 오이지 반 접, 조기 열댓 마리, 깻잎김치, 애호박 한 개, 꼬부라진 오이 다섯 개(첫 수확), 아욱, 열무, 상추. 지난 주말(23일) 시어머니께서 보내주신 목록이다.

이렇듯 자식들에게 뭔가 하나라도 더 주시려고 주섬주섬 봉지 봉지마다 담으시는 어머니. 지금도 크게 변한 것은 없지만 신혼 초엔 왜 그리도 무섭던지…, 그 시대 여성으론 비교적 크신 체구에 쩌렁쩌렁한 목소린 아직 시집살이가 서툰 햇병아리 신부에겐 엄격한 교관처럼 느껴졌다.

첫아이가 아들이 아님을 몹시 섭섭해 하셨을 땐 산고를 겪어본 같은 여자로서 너무하신다는 생각에 오래도록 서운함을 가슴에 묻고 살았다. 그런데 6년 후 둘째 역시 딸을 낳고는 마치 큰 죄라도 지은 듯 어머님 뵐 면목이 없어 불편한 마음에 먹은 미역국이 체하고 말았던 기억이 아직도 생생하다.

유난히 아들 욕심이 많으셨던 분, 그러나 그 마음을 빗겨 가기라도 하듯 맏이인 우리와 둘째 네 집 모두 딸만 둘. 다행히 삼 형제 중 셋째 네 집에서 아들 하나를 낳아 간신히 대를 잇게 되었다. 하지만 미련이 남으셨던지 어느 날 어머니께서 내게 말씀하셨다.

"어멈아∼ 용한 의원이 있는데 그 집 약을 먹으면 아들을 낳을 수 있다는구나 같이 가보지 않겠니?"
"예, 어머니. 아범 들어오면 상의 좀 해 보고요."


실은 둘째를 출산하고 이미 가족계획을 끝냈기 때문에 청을 들어드리고 싶어도 그럴 수가 없는 상황이라 나는 쑤∼욱 빠지기로 하고 남편에게 모든 것을 맡겼다. 아니나 다를까 어머닌 아들을 불러 같은 말씀을 하셨고, 남편은 키울 능력이 없다며 더 이상 말씀을 못하시게 말막음을 했다.

1980년대를 전후 해서의 정부시책은 "아들 딸 구별 말고 둘만 낳아 잘 기르자"였기 때문에 아들에 연연하시는 어머님을 이해하기보다는 시대에 뒤떨어진 사고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며칠 전 군에 간 아들이 휴가를 왔다면서 엄마 키보다 훌쩍 커버린 아들과 외출을 하는 친구의 모습이 얼마나 부럽던지…. 지금 생각하니 어머님의 아들 욕심은 우리를 위한 것이었음을 늦게서야 알게 되었다.

어느새 서리가 내린 듯 머리는 허옇게 변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세월의 흔적을 감출 수가 없는 지천명의 나이. 스물다섯 해 전 친정어머니가 날 시집보낼 때의 그 나이가 되고 보니 그렇게 무섭기만 하던 시어머니도 "어멈아∼ 너도 이제 사위 볼 나이가 됐는데 어려워 말고 편하게 해라" 하시며 "아무 탈 없이 잘들 살아줘서 고맙다"고 덧붙이신다.

사실 신혼 초엔 옛날처럼 고된 시집살이는 아니었어도 아무런 마음의 준비도 없이 남편 하나 믿고 선택한 결혼, 넉넉지 못한 형편에 낯선 환경에서 시어른을 모시고 산다는 게 결코 쉬운 일은 아니었다. 해만 지면 집 생각에 베갯잇을 적신 날이 허다했는데, 어머님의 "잘들 살아줘서 고맙다"는 말씀 한마디에 봄눈 녹듯 모든 것이 녹아내렸다.

내일모레면 팔순이신 어머님(78세)은 당신의 유일한 낙이시라면서 계절에 맞춰 김치며 밑반찬을 보내 주신다. 오늘도 식탁 가득 차려진 어머님의 사랑과 마주하니 가슴 뭉클함에 눈앞이 흐려진다.

나무라듯 호통을 치셔도 이젠 그것이 당신만의 독특한 사랑방식이란 것을 오십이 넘어서야 알았다. 늘 일방적으로 주시기만 하면서도 행여 자식들에게 짐이 될까봐 웬만한 일은 말씀을 안 하시는 분. 그동안 받기만한 사랑 빚을 어느 세월에 다 갚을 수 있을까.

13년 전 시아버지께서 돌아가셨을 때 적적하실 텐데 같이 사시자고 했더니 "서로 시집살이"라며 혼자 사시길 고집하셨다. 그리고 경기도 고양시 덕양구 삼송동 단독주택에서 마당 한 편에 화단 같은 텃밭을 일구어 온갖 모종을 가득 심어 놓고, 아들과 손주, 며느리에게 나눠주시는 재미에 푹 빠져 사시는 우리 어머니.

"부디 눈물로 그 빚을 대신하지 않도록 건강하게 오래오래 사세요. 그것만이 자식들의 유일한 바람이랍니다!"

태그:#시어머니, #지천명, #며느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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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녕하십니까~? 저는 글쓰기를 좋아하는 52세 주부입니다. 아직은 다듬어진 글이 아니라 여러분께 내놓기가 쑥스럽지만 좀 더 갈고 닦아 독자들의 가슴에 스며들 수 있는 혼이 담긴 글을 쓰고 싶습니다. 특히 사는이야기나 인물 여행정보에 대한 글에도 관심이 많습니다. 이곳에서 많을 것을 배울 수 있길 희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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