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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부분이 군 밖에서 일어난 시국사건은 언론에 보도되어 잘 알려져 있지만 군인신분이 일으킨 시국사건은 군보안상 이유로 언론통제가 되어 그다지 알려져 있지 않다.

나는 박정희 독재부패권력이 정권을 장악하고 있을 때, 1972년 11월 1일 공군사관후보생 제65기 소위로 임관해 공군교육사령부 기지전대 인사과장, 공군본부 본부전대 인사장교, 국군보안사령부 행정과 행정계장을 거쳐 1979년 3월 29일 당시, 공군본부 인사참모부 원호담당장교(대위)로 보직 근무하고 있었다.

당시 웬만한 한국인이라면 대한민국의 심각한 비민주적인 독재부패정치와 장기집권의 권력구조화로 민족적ㆍ사회적 위기감을 직감하고 있었다. 나 역시 역사학을 전공한 군 장교로서 국가와 사회가 망그러져 가는 것을 더 이상 볼 수 없었다. "무엇인가라도 해야 되지 않겠는가"라는 생각을 갖게 되었다.

장교 신분이었지만 당시와 같은 상태에서는 대한민국의 자유민주주의는 불안하다고 믿었다. 그리고 유신헌법 철폐에 앞장서야 하겠다는 신념을 갖게 됐다.

그래서 편지를 썼다. 평소 알고 지내거나 인맥이 닿는 친지와 지식인, 은사 그리고 동료들에게 민주주의의 위기의식을 일깨우고 이들이 무엇인가 해주기를 바랐다. 바로 많은 대중을 상대로 한 선동이었다. 편지를 연하장 형식으로 78년 연말과 79년 연초에 걸쳐 100여명에게 보냈다. 이게 '긴급조치 9호'에 저촉됐다.

문제의 서신내용을 먼저 보자. 글쓴이는 당시 상황을 "박정희와 그 일당들이 장기집권을 위하여 국민을 억압하고 정부조직을 남용할 뿐만 아니라 빈부의 격차를 조장, 국민경제를 파단에 몰아넣고 민족의 존익을 위태롭게 한다고 판단" 했다.

"붉은 태양이 떠오른 4311년(1978)은 조용한 혁명의 소리가 독재의 아성을 무너트리고저, 회롱 속에서 진심을, 속박 속에서 해방을, 궁핍 속에서 풍요를, 자유다운 자유, 인간다운 참 자유를 위하여 민족혁명을 일으켰던 한 해였다.

그러나 불행하게도 어리석은 독재자에 아부함으로써 영화와 권력에 아집하려는 위정자의 총부리와 군화에 무참히 이그러저 버리고 말았다. 이들은 오로지 정권만을 위한 풍요의 과대선전, 정권유지를 위한 경제정책의 남발과 꼭두각시놀음, 특권방어를 위한 자기 합리적 조직의 남용, 부익부 조장을 위한 무단지폐의 남발뿐 진정한 민족의 권익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이제 무력적 투쟁만으로는 정권욕만 오로지 하는 무리들의 조직을 파괴할 수 없고, 오직 민족문화혁명(문화혁명론)으로써 만이 이를 극복할 수 있다."


박정희 '철의 정권'을 비난하고 지식인들이 정신적으로 무장하여 1966년 중국 사회주의가 대중선동을 통한 사회주의혁명(후에 극좌적 오류로 판단되었지만)을 이끈 것처럼 우리나라에서도 반유신민주화 대중혁명이 일어나기를 바랐다.

그런데 이것이 수사기관에 적발되었다. 이른바 공군장교가 일으킨 '긴급조치 9호 필화사건'이다. 필화사건의 전말은 이러하다.

잘못 부친 편지, 중앙정보부에 밀고 되다

서신을 친필로 써서 놓으면 시간 관계상 아이엄마가 우체국에 가서 붙였다. 그런데 나의 세심치 못한 성격 탓으로 서신의 수신자 명단 중 한 명의 주소를 잘못 확인했다. 서울대 동양사학과를 나온 친구 김아무개를, 동명이인이었던 S사 편집국장 김아무개로 잘못 알았다. 100여명 수신자 중 동명이인인 김아무개는 "이상한 서신을 받았다"고 중앙정보부에 밀고했다(1979년 1월경).

중앙정보부는 발신자 글쓴이를 찾기 시작하였다. 그들 말에 의하면 나와 같은 이름을 쓰는 동명이인이 전국에 10명이 되더란다. 그런데 공군장교였던 나는 처음에 제외시켰다. "공군장교가 설마…"해서였단다.

다른 동명이인 9명은 서울의 남산에 끌려가 모진 고생들을 했던 모양이다. 결국 9명의 동명이인들이 관련자가 아니라는 사실이 드러나면서 중앙정보부는 나를 편지 발신자의 주인공으로 판단하게 됐다. 내가 군인신분이므로 중앙정보부는 사건을 당시 국군보안사령부에 이첩하게 되었다.

1979년 3월, 국군보안사령부는 곧바로 당시 공군본부 인사참모부 인사근무처에서 근무하고 있던 나를 "좀 알아볼 일이 있다"는 구실로 국군보안사령부 공군본부지부로 불러 내렸다. 그 곳에 들어가자마자 체포돼 헌병의 감시를 받게 되었다.

마침 수사관들이 없는 틈을 타서, 재빨리 옆에 있는 전화로 집에 전화를 걸었다. 헌병이 급히 제지했다. 나는 헌병을 밀치고 전화를 억지로 걸었다. 마침 아이엄마가 집에 있어 전화를 받았다. "일이 잘못돼 보안사령부에 잡혀 있다"는 짤막한 말만 남겼다. 옆의 헌병은 당황하여 "자기는 모르는 일"이라고 다짐을 해둔다.

오후가 되자, 보안사령부 관계자가 와서 공군 지프차에 태워 서울 서빙고 보안사령부 대공분실로 끌고 갔다. 이곳에서 죽음의 공포와 협박을 받으며 7일 동안 조사를 받았다. 잠을 잘 때에는 두 손 두 발이 철제침대와 함께 수갑으로 채워진 채 잠을 자야 했다. 영어의 몸이 되고 보니,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이렇게 엿새를 지냈다.

조사 첫날은 중앙정보부 소속 대머리 수사관이 파견되어 조사를 했다. 검은 안경과 검은 장갑을 낀 다섯 명의 장정들이 뒤에서 나를 에워싼 채 수사관은 나를 '빨갱이'로 몰고 갔다.

특히 문제가 된 단어 중의 하나가 '붉은 태양'이다. 그 수사관은 "붉은 태양은 김일성을 의미한다"며 나에게 조직을 대라 한다. 그리고 누구의 사주를 받았느냐고 다그친다. 공포가 엄습해 왔다. "이렇게 해서 빨갱이가 되는구나, 버텨야 한다, 여기서 몰리면 죽는다"라는 최면을 걸고 죽음의 땅으로 떨어지지 않으려고 엄청 애를 썼다.

혐의가 드러나지 않자 이들은 '거짓말탐지기'까지 동원했다. 기계의 오작동이 없었기에 망정이지, 기계의 오작동이 있었더라면 나는 그 때 어떻게 되었을지 모른다. 인생이 어떻게 바뀐 채 살아가고 있을지 모른다.

중정 시나리오 "5년 구형,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언도"

보안사 대공분실에서 조사를 마친 후 공군본부 보안사지부에 와서 다시 조사를 받았다. 그리고 공군본부 군법회의 검찰실로 이첩돼 군사재판을 받게 되었다. 당시 군검찰관은 민족주의 이념단체 '수양동우회'의 같은 회원이었던 S대위가 맡았고, 변호인은 당시 인권변호사였던 고 황인철 변호사(사촌동서)가 맡았다.

어느 날 S대위가 개인 자격으로 공군본부 영창으로 나를 찾아왔다. 같은 이념단체 회원이며 동료로서 검찰관을 맡게 된 데에 대한 미안함에서였다. 여러 가지 대화를 나눈 후 면회가 끝날 무렵에, 슬며시 호주머니에서 무언가를 꺼내 나에게 보여주었다. 바로 중앙정보부에서 공군본부 참모총장에게 보낸 '정식공문서'였다.

내용인즉 '황보윤식, 긴급조치 9호 위반, 5년 구형, 징역 3년, 자격정지 3년 언도'라고 쓰여 있었다. 참으로 어처구니없는 일이었다. 재판도 받기 전에 구형과 언도가 이미 대본으로 나와 있다. 재판은 형식이었다. 변호사의 변론은 한낱 허공에 뜬 메아리에 지나지 않았다.

아무리 권력에 미쳤기로 민주주의의 핵심인 3권 분립을 이렇게 기만해도 되는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사법부마저 행정권이 좌우지하는구나. 이것이 파쇼라는 거구나. S도 "나 역시 어쩔 수가 없게 되었다, 미안하다"는 말을 남기고 영창을 나가버렸다. 박정희 독재권력 말기의 재판이 이러했다.

결국 군법회의에서 검찰관은 5년을 구형했다. 그리고 재판관은 중앙정보부의 각본대로 긴급조치 9호 위반 3년 징역, 자격정지 3년형을 언도하였다. 1심 재판 후, 황 변호사의 권고로 상소를 포기하였다.

상소를 포기하고 당시 공군본부 참모총장의 결재를 남기고 있던 중, 10월 26일 밤 공군본부 영창에서 보초를 서고 있던 헌병이 갑자기 나한테 오더니 "유고랍니다, 공포탄이 아닌 실탄이 배부되었습니다"라고 귓속말로 일려준다. 나는 직감적으로 '박정희가 죽었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박정희는 독재권력 내부의 자기모순이 폭발되면서 당시 권력의 핵심부요, 자기의 심복이었던 중앙정보부장 김재규에게 피살되었다. 10·26의거 이후 곧바로 나는 육군교도소(이른바 육각)로 이감돼 본격적인 옥살이에 들어갔다.

육각에 들어온 지 얼마 안 되어 밤 12시경 갑자기 간수 육군상사가 감방을 비워달란다. 내방에 김재규가 들어오기 때문에 나는 옆방으로 옮겨야 한단다. 이리하여 한 달여를 김재규와 벽을 사이에 두고 옥살이를 하였다. 그리고 11월 어느 날 김재규가 흰색 윗도리와 회색 아랫바지 한복에 하얀 고무신을 신고 육각문을 나가는 것을 보았다. 김재규가 총살당하였다는 소문이 육각 안에 파다하게 나돌아 다녔다.

그 해 12월 7일 최규하 대통령은 긴급조치해제 조치를 내렸다. 이 조치로 일반교도소에서는 긴급조치 폐기일인 12월 8일에 출소하였으나, 공군의 군검찰에서는 출소통지를 육군교도소에 보내오지를 않았다.

나중에 안 이야기이지만, 공군본부 인사참모부에서 같이 근무하였던 친구가 동분서주 노력한 결과로 공군검찰이 부랴부랴 출소통지를 육군교도소에 보냄으로써 그나마 12월 9일 하루 늦게 '형 집행정지'로 출소하게 되었다. 출소해 보니 우리 딸 홍인이가 태어난 지 3일째 되는 날이었다. 남편을 감옥에 보내고 아이를 혼자 출산했을 아이엄마를 생각하니 그 동안 쌓였던 울분과 비애가 뒤섞여 울음보가 터져 나왔다. 한없이 울었던 것 같다.

덧붙이는 글 | 비공개된 숨겨진 자료입니다.


태그:#황보윤식, #서빙고, #필화사건, #육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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