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오마이뉴스의 모토는 '모든 시민은 기자다'입니다. 시민 개인의 일상을 소재로 한 '사는 이야기'도 뉴스로 싣고 있습니다. 당신의 살아가는 이야기가 오마이뉴스에 오면 뉴스가 됩니다. 당신의 이야기를 들려주세요.】

▲ 명성산과 산정호수, 하늘 풍경
ⓒ 이승철
기다려 달라던 그날의 약속은
여름날의 뜬구름 같은 것이었을까
기다림의 세월에 지치면
가슴에도 저렇게 푸른 멍이 들겠지

젊은 날의 그 약속은
흘러가는 흰 구름이었는데
천형인양 영혼 속에 자리 잡아
계절이 바뀌는 것도 잊은 채 반평생이 갔다

기다림이란 참으로
구름 한 점 마음에 담아 두는 것인데
추억으로 가라앉은 너는
언제부터인가 저 푸른 호수가 되었다.

흘러가버린 물이 돌아서지 못하듯
너는 이제 내 안에 없다
다만, 가버린 시간 속에 침잠하여
나를 우러르고 있을 뿐이다.

- 이승철의 시 '산정호수' 모두


▲ 집을 나설 때 바라본 도봉산을 감도는 구름풍경
ⓒ 이승철
▲ 광덕산 자락에서 바라본 화악산 풍경
ⓒ 이승철
날씨처럼 변덕스러운 것이 있을까. 지난 17일, 아침을 먹고 서울에서 출발할 때만 해도 하늘은 찌푸려 있었다. 그래서였는지 경기도와 강원도의 접경에 있는 광덕고개를 향해 달리는 길은 시원하게 열려 있었다.

그래도 다행히 일기예보는 흐리기만 할 뿐, 비는 내리지 않을 것이라고 했다. 의정부를 지나 포천 땅으로 접어들자 하늘이 맑아지기 시작한다. 검은 구름이 걷힌 하늘에는 대신 하얀 뭉게구름이 떠올랐다.

광덕산과 백운산 사이로 난 고갯길, 광덕고개 위에 있는 하늘시장엔 어느새 인근 농민들과 상인들이 몰려들어 좌판을 벌여놓고 있었다. 고개 위에서 바라본 풍경이 싱그러움으로 가득하다. 구불구불 광덕고갯길은 캐러멜 고개와 카멜 고개로도 불린다. 고개를 넘어다니던 옛 시절의 한국군 사단장과 미군 장교가 붙인 이름이란다.

하늘시장의 명물은 수수부꾸미다. 아침을 부실하게 먹어 출출한 뱃속을 감칠맛 나는 부꾸미 한 조각으로 달래며 바라본 줄기줄기 능선과 산봉우리들이 짙푸른 색감으로 정신까지 맑게 하는 느낌이다. 그 사이 더욱 맑아진 하늘에 떠오른 뭉게구름들도 잠들었던 감성을 일깨우기에 충분하다.

고개를 넘어 달리는 길 오른편은 광덕계곡, 물소리 바람소리에 섞여 짙은 숲 향기가 차 안까지 파고든다. 전날 밤을 지새우며 세미나를 가졌던 후배들은 숲 속 공터에서 족구시합으로 몰려오는 잠을 쫓고 있었다.

골짜기 깊숙한 곳에 은밀하게 숨어 있는 리조트를 용케도 찾아내 숨어든 이들이다. 통나무집이며 황토집들이 조용하고 멋스럽게 조화를 이룬 숲 속은 아직 찾는 사람이 별로 없는지 한적하고 조용하기만 했다. 민물매운탕으로 점심을 먹고 다시 길을 나섰다.

운전대를 잡은 친구가 어디로 가는 것이 좋겠느냐고 내게 길을 묻는다. 금수강산 산골짜기 아무 곳이나 다 좋은데 어떤 길인들 어떠냐고 하니, 왔던 길을 되돌아가는 것은 재미가 없다며 다른 길을 찾던 친구가 웬일인지 다시 광덕고개를 넘는다.

▲ 숲속의 통나무집
ⓒ 이승철
▲ 숲속 전통예절학교 마당의 장승들
ⓒ 이승철
백운계곡 길을 달리던 차는 오른편으로 방향을 바꿔 다시 고개 하나를 더 넘었다. 그렇게 들어선 곳이 산정호수였다. 주차장은 만원이었다. 날씨가 맑아지자 많은 사람들이 이곳으로 찾아온 것이다.

"오늘은 날씨가 너무 무더우니까 등산은 하지 말고 호수나 한 바퀴 돌아볼까?"

정말 햇볕이 따가웠다. 놀이시설들이 있는 곳에서는 아이들의 깔깔거리는 소리가 정답다. 그동안 내린 비로 물이 불어난 호수는 더욱 맑고 푸른 빛깔이다. 호수 위에서는 고속으로 달리는 작은 보트가 물살을 가르는 모습이 시원했다.

산 속의 우물 같은 모습이어서 산정호수라는 이름이 붙었다는 호수답게 주변에 둘러선 산들이 정말 병풍을 둘러친 모습이다. 반 바퀴를 돌아선 지점에는 작은 허브농장이 있었다. 허브 아이스크림으로 무더위를 조금 식혀볼까 했지만 품절이란다. 다시 걷기 시작했다.

다리를 건너서 갈대 숲길을 지나자 숲 속의 산길로 이어진다. 이쪽 길은 사람들이 별로 보이지 않는다. 간간이 보이는 사람들은 쌍쌍이 걷는 아베크족들이다. 호수 위로 늘어진 소나무 아래 다정하게 붙어 앉은 젊은 커플의 모습이 정겹다.

문득 떠오르는 사람이 있었다. 30대 중반에 직장에서 만난 친구였다. 20대 후반이면 결혼을 서두르던 시절이었는데 그 친구는 아직 싱글이었다. 약간 창백하고 갸름한 얼굴에 별로 말이 없던 그 친구와 친해진 것은 한 1년쯤의 세월이 흐른 후였다.

그 무렵 동료들과 함께 바로 이곳을 찾았었다. 요즘처럼 무더위가 한창이었으니까 바로 이맘때였을 것이다. 모처럼 멋지고 시원한 곳을 찾은 일행들은 준비해 가지고 온 음식과 술로 배를 채운 후 시원한 물놀이에 여념이 없었다.

그런데 일행 중에 한 사람이 보이지 않았다. 바로 그 친구였다. 그러나 다른 일행들은 그의 존재를 까맣게 잊고 있는 것 같았다. 그때만 해도 이곳 산정호수가 지금처럼 많은 사람들로 북적거리던 시절이 아니었다. 시설도 빈약했었다.

▲ 허브농장에서 만난 방울풀
ⓒ 이승철
▲ 호숫가 나무그늘 밑의 젊은 커플
ⓒ 이승철
문득 그가 걱정이 되어 그를 찾아 나섰다. 물론 나 혼자였다. 가까운 주변을 찾아보다가 한적한 물가에 홀로 앉아 있는 그를 발견했다. 반가웠지만 그렇게 홀로 앉아 있는 그를 소리쳐 부르기가 어쩐지 마음이 내키지 않았다. 나는 말없이 잠깐동안 그를 바라보다가 그에게 다가갔다.

그는 안주도 없이 술병 한 개만 달랑 들고 있었는데 술은 거의 바닥이 나고 있었다. 내가 말없이 옆자리에 앉자 그때야 그가 나를 알아차린 듯 돌아보며 멋쩍은 미소를 짓는다. 나도 그에게 미소를 지어 보이고 그냥 그대로 앉아 호수를 바라보았다.

바람이 사르르 스치고 지나갔다. 햇볕은 뜨거웠지만 마침 나무그늘 밑이어서 시원했다. 그 친구도 역시 말없이 호수를 응시하고 있었다. 나는 무슨 말인가 그에게 묻고 싶었지만 선뜻 말이 나오지 않아 그냥 앉아 있었다.

"잘 살고 있겠지?"

그가 하는 말이었다. 그를 돌아보니 그는 여전히 호수를 바라보고 있었다.

"벌써 10여년이 지났군."

그가 또 혼잣말처럼 뇌까렸다. 그는 그때 누군가를 회상하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무슨 깊은 사연이 있는 것 같았지만 나는 그에게 묻지 않았다. 그의 표정이 너무나 진지했기 때문이다. 그는 잠깐 동안 말없이 그렇게 앉아 있었다. 그러던 그가 술병을 입에 대고 털어 넣듯 조금 남은 술을 마신 다음 이야기를 시작했다.

그는 대학 2학년 때부터 사귀던 여성이 있었다고 한다. 그녀는 그보다 나이가 한 살 아래였는데 두 사람은 서로를 진심으로 사랑했다. 그런 그들이었는데 그가 군대에 입대할 무렵 그들은 영원히 헤어지게 되었다는 것이었다.

호남지방의 가난한 농가에서 태어난 그는 학기마다 등록금 때문에 무척 어려움을 겪었다. 몇 번인가 휴학을 하기도 했는데 3학년을 마치고 군에 입대할 무렵 그녀는 졸업을 했다. 그가 자주 휴학을 했기 때문이다. 그가 군대에 입대를 하게 된 것도 사실은 등록금 때문이었다.

▲ 산정호수 풍경
ⓒ 이승철
▲ 산과 호수와 나무
ⓒ 이승철
그의 입대를 앞두고 둘은 이곳을 찾았었다고 한다. 그들의 사랑과 추억이 깃든 장소였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날 그는 그녀로부터 정말 뜻밖의 말을 들었다. 그녀는 곧 유럽으로 유학을 간다는 것이었다. 그가 입대한 며칠 후면 그녀도 유럽으로 출국을 한다는 것이었다.

"제대할 무렵이면 나도 다시 돌아오게 될 거야. 군대생활 잘 마치고 우리 다시 만나자. 그땐 우리들의 모습이 지금보다 훨씬 성숙해 있겠지. 그땐 우리 바로 결혼했으면 좋겠어."

그녀는 그들의 헤어짐을 조금 더 성숙한 모습으로 만나기 위한 과정쯤으로 생각하는 것 같았다. 그러나 그들은 그 이후 다시는 만나지 못했다. 어떻게 된 일인지 입대 후에 그녀로부터 단 한 통의 편지도 받아볼 수 없었다.

그렇게 군대생활을 마치고 제대했지만 그녀의 소식은 여전히 끊겨 있었다. 그는 그녀의 옛 친구를 어렵게 수소문하여 만날 수 있었지만 그 친구로부터 이제 그녀를 잊으라는 말밖에 들을 수 없었다.

호숫가를 걸으며 바라본 풍경은 아름답기 짝이 없었다. 호수 건너 명성산 위에도 하얀 뭉게구름이 두둥실 떠 있고 유원지 뒤쪽의 뾰족한 산꼭대기 위에도 구름이 흘러가고 있었다.

"저만 때가 참 좋은 때인데…."

호숫가 나무그늘 밑에 붙어 앉아 있는 젊은 커플을 보며 같이 걷던 친구가 하는 말이었다. 그러나 그 순간에도 나는 옛 직장동료의 슬픈 사랑이 떠올라 가슴이 저려져 온다.

▲ 돌아오는 길에서 바라본 운악산
ⓒ 이승철
옛 직장동료는 몇 년 후 회사에서 사직하고 지방으로 내려갔다. 여전히 혼자였다. 그런데 그로부터 20여 년이 지난 몇 년 전에 역시 직장 사람들과 이곳에 왔다가 우연히 그를 만날 수 있었다. 그도 나도 일행들이 있어서 긴 이야기를 나눌 시간은 없었지만 그는 여전히 혼자인 것 같았다.

호수를 한 바퀴 돌아 주차장으로 가는 길에는 음식점마다 사람들이 많은 모습이다. 장마 중 모처럼 날씨가 화창해서인지 산정호수엔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찾아온 것 같았다. 놀이시설도 보트장도 이용하는 사람들이 많았다. 그 시끌벅적한 소음 속에서도 산과 물은 더욱 푸르고, 푸른 하늘에 떠가는 뭉게구름만 하얀 풍경이 옛 친구의 서글픈 사랑을 떠올리게 하고 있었다.

태그:#산정호수, #명성산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바른 시각으로 세상을 보고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겸손하게 살자.

이 기자의 최신기사100白, BACK, #100에 담긴 의미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