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 경복궁 경회루
ⓒ 이정근
군주의 덕은 치산치수(治山治水)에서 비롯된다는 말이 있다. 백성들이 천재지변의 위험으로부터 마음 놓고 살 수 있기 때문이다. 권력획득과 기반조성에 여념이 없던 태종이 매년 비만 오면 유실되던 흙다리 광통교를 돌다리로 건설하고 이제야 비로소 치수(治水)에 관심을 갖기 시작했다.

"해마다 비가 많이 오는 여름철이면 천변의 물이 넘쳐 민가가 침수되니 밤낮으로 근심이 되어 개천 길을 열고자 한 지가 오래이다. 개천도감을 설치하라."-<태종실록>

이름 없는 하천 청계천의 본격 치수사업이다. 지금이야 청계천이라는 이름을 얻었지만 그 당시에는 이름이 없었다. 도읍지를 동서로 관통하는 하천이고 시냇물이었다. 건천(乾川)이기 때문에 수량은 많지 않았지만 우기에는 범람하는 것이 예사였다. 백성들 역시 우기에 있을 수 있는 통과의례로 받아들이며 순응하고 살았다.

▲ 복원된 청계천
ⓒ 이정근
고려조의 남경으로 별 볼 일 없던 한양이 조선 개국과 함께 도읍지로 번창 하면서 인구가 늘고 가옥도 많아졌다. 왕도에 유입된 기층민들이 천변에 집을 짓고 살면서 홍수기에 피해가 컸다. 개천이 범람하여 종묘 창의문 앞까지 물이 차오르는 대홍수에는 인명피해가 컸다. 왕명에 의하여 개천도감(開川都監)이 설치되었다.

"정월에는 대중을 일으키지 말라고 월령(月令)에 나와 있습니다. 지금 대중을 움직여 개천을 파게 되면 곧 경칩이 다가옵니다. 청컨대, 정지하소서."

예조에서 반대 의견이 올라왔다. 백성을 동원하여 개천공사를 시작하면 곧 농사철이 다가오니 진행하기 어렵다는 얘기다.

"이번 일이 백성에게 폐해가 없겠는가? 아직 후년을 기다리거나 혹 자손 대에 이르게 하는 것이 옳지 않겠는가?"

예조의 의견을 가납한 태종이 좌정승 성석린에게 물었다.

"명년 2월 초하룻날 역사를 시작하는 일로 이미 충청도와 강원도에 하달하였습니다."

"금년은 윤12월 15일이 입춘이니 정월의 기후가 반드시 따뜻할 것이다. 2월을 기다리면 농시(農時)를 빼앗을까 염려되니 정월 보름이 되기 전에 부역을 마치게 하라. 금년에는 경상도와 전라도가 조금 풍년이 들었으니 양도(兩道)를 소집하는 것이 좋겠다."

"경상도 백성에게는 충주창(忠州倉)을 짓는 일을 이미 하달하였습니다."

지의정부사(知議政府事) 박신이 말했다.

"그러면 노역을 겹쳐서 행할 수가 없으니 전라상도(全羅上道)의 백성을 부역하게 하는 것이 가하다."

전라상도 즉, 오늘날의 전라북도 백성들이 동원되었다.

▲ 청계천의 징검다리
ⓒ 이정근
"군인은 몇 명이나 동원하느냐?"

"충청도·강원도·전라도 군사가 4만 명입니다."

"개천을 파는 일이 거창한데 군인의 수가 적다."

"5만 명으로 하고 정월 15일에 역사를 시작하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농사에 지장이 없도록 공사를 조속히 마무리 하도록 하라."

인력동원 문제가 확정되었는데 안동 대도호부사(安東大都護府使) 최용소와 충청도 도관찰사 한옹이 한양에 올라와 이의를 제기했다.

"갑사(甲士)와 선군(船軍) 그리고 조호(助戶)는 다른 역사에 참여하지 말라는 것이 이미 나타난 영갑이 있습니다. 지금 개천을 파는 군인을 징발하면 수를 채우기가 어려우니 가을을 기다려서 역사하게 하는 것이 옳을까 합니다."

국토방위를 우선으로 하는 정예군은 개천공사에 투입할 수 없으니 가을로 미루자는 것이다.

"신도(新都)의 이 역사는 급히 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또 지금 기계가 이미 갖추어지고 군인의 수가 이미 정하여졌으니 파할 수 없습니다."

계획대로 추진하자고 의정부에서 강력히 주청했다.

"기쁨으로 백성을 부리고 백성을 적당한 시기에 부리는 것은 예전의 도(道)입니다. 만일 의리에 합한다면 비록 칼날에 죽더라도 또한 분수가 있는 것입니다. 기쁘게 하는 도리는 창고를 열어서 양식을 주고 밤에는 역사를 쉬게 하여 피로해서 병이 나지 않게 하는 것이 가장 좋습니다."

영의정 하륜이 말하였다.

"개천을 파는 것은 폐지할 수 없습니다. 때는 농한기이니 무엇이 불가한 것이 있겠습니까?"

좌정승 성석린과 우정승 조영무도 개천공사를 미루어서는 안 된다고 말했다.

▲ 복원된 청계천에 오리가 노닐고 있다
ⓒ 이정근
개천공사가 시작되었다. 종묘·사직과 산천의 신(神)에게 대신(大臣)을 보내어 고(告)했다. 수많은 사람이 동원된 공사장에서 사상자가 없기를 바라는 의식이다. 동원된 군사는 경상도·전라도·충청도 3도의 군인 5만 2천 8백 명이었다.

"군인 중에 부모의 상(喪)을 입은 자의 수가 3백 명에 이른다 하니 그들은 돌려보내도록 하고 5만여 명이 먼 길에 쌀을 지고 오는 것이 넉넉지 못할 것이니 군자감(軍資監)의 쌀 4만 4백 석을 내어 군인에게 각각 3두(斗)씩을 주어 양식으로 하도록 하라."-<태종실록>

개천도감제조(開川都監提調)가 증원되었다. 농번기가 다가오는 공사기간을 넘기지 않기 위해서다. 남성군(南城君) 홍서, 화성군(花城君) 장사정, 희천군(熙川郡) 김우, 총제(摠制) 김중보·유습·이지실·김만수·유은지·이안우·황녹과 사(使)와 판관 33명이 투입되었다.

"부역자와 군인이 일하고 쉬는 법은 파루(罷漏) 뒤에 역사를 시작하여 인정(人停) 뒤에 방헐(放歇)하게 하라. 만일 명령을 어기고 백성을 과중하게 역사시키는 자가 있으면 마땅히 중하게 논죄하겠다. 또한 전의감(典醫監)·혜민서(惠民署)·제생원(濟生院)은 미리 약을 만들고 막(幕)을 쳐서 만일 병이 난 자가 있으면 곧 구제 치료하여 생명을 잃지 않도록 하라."

대규모 인력을 동원한 개천공사가 끝났다. 개천이 태어난 이래 최초로 행하는 대대적인 공사였다. 개천공사에 징발된 백성들의 농사에 지장을 주지 않기 위하여 공사기간을 넘기지 않았다. 딱 한 달간에 걸친 속전속결공사였다. 대단한 집중력이다.

장의동 어귀로부터 종묘동 어구까지 문소전(文昭殿)과 창덕궁 문 앞을 모두 돌로 쌓고 종묘동 어귀로부터 수구문까지는 나무로 방축(防築)을 만들었다. 또한 대·소광통교와 혜정교 및 정선방(貞善坊) 동구 그리고 신화방(神化坊) 동구의 다리는 모두 돌을 썼다. 광통교는 그 당시에 가장 넓은 다리였기에 광통(廣通)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혜정교는 운종가에 있던 다리로서 삼청계곡에서 내려오는 물이 장원서교, 십자각 다리, 중학교(橋)를 거쳐 혜정교를 지나 청계천에 합류했다. 오늘날의 교보문고 뒤쪽이 바로 그 물줄기가 흐르는 개천이었다.

종로3가에서 창덕궁에 이르는 길목에 물줄기가 남류했는데 그 물줄기와 종로가 교차하는 지점에 있던 다리가 정선방교다. 신화방 동구의 다리는 서린동과 무교동을 잇는 다리로 당시에는 이름 없는 다리였으나 영조시대에 모전교라는 이름을 얻었다.

▲ 창덕궁 금천교
ⓒ 이정근
당시 돌로 만든 다리로서 경복궁에 영제교(永濟橋)가 있었고 창덕궁에 금천교(錦川橋)가 있었다. 궁궐이 아닌 일반 백성들이 다니는 길에 돌다리가 등장한다는 것은 초가집이 콘크리트 슬래브 집으로 변한 것 이상의 혁명적인 사건이었다.

궁궐에 있는 다리는 실용적이라기보다 조형미와 의식적인 면이 강했다. 백악과 북산에서 흐르는 물을 인위적으로 대궐을 휘돌아 흐르도록 하고 그 위에 돌다리를 만들었다. 정문과 중문사이에 있는 이 다리를 건너는 임금과 신하가 마음을 씻고(洗心) '어떻게 하면 백성을 편안하게 하여 태평성대를 이룰 것인지?' 생각하게 하기 위함이었다.

백악산 백운동천(泉)에서 발원한 자연 하천이 오늘날의 청계천으로 다시 태어난 것이다. 이름 없던 하천이 이름도 얻었다. 하천을 열었다 해서 개천(開川)이다. 청계천이라는 이름은 훗날 일제강점기에 명명되었다. 개천 공사를 마감한 개천도감에서 임금에게 보고했다.

"역사에 나와서 병들어 죽은 자가 64명입니다."

인명 희생자다. 과로와 사고로 죽은 사람이 더 많았는데 모두 다 병들어 죽었다고 보고했다. 그러나 임금은 알고 있었다.

"일에 시달려서 죽은 자는 심히 불쌍하다. 마땅히 그 집의 요역(徭役)을 면제하고 콩과 쌀을 주라. 또한 어리석은 백성들이 집을 생각하여 다투어 한강을 건너다가 생명을 상할까 염려한다. 각 도의 차사원(差使員)·총패(摠牌) 등으로 하여금 운(運)을 나누어 질서 있게 강을 건너도록 하라."

부역에 동원된 백성들이 고향에 돌아간다는 해방감에 들떠 사고가 날까 염려되었다. 순금사대호군(巡禁司大護軍) 박미와 사직(司直) 하형을 나루터에 내보내 차례를 무시하고 강을 건너는 자를 단속하게 하였다.

▲ 경회루 편액
ⓒ 이정근
동원된 백성들을 고향으로 돌려보낸 태종은 여세를 몰아 경복궁 보수공사에 착수했다. 개천도감을 행랑조성도감(行廊造成都監)으로 개편하고 동원된 군사로 하여금 경복궁 근정전 서쪽에 행랑을 짓고 그 바깥쪽에 못(樓池)을 파고 누각(新樓)을 짓게 하는 공사였다. 누각 공사가 끝나자 태종이 지신사 김여지를 불렀다.

"내가 새 누각의 이름을 경회(景會)·납량(納涼)·승운(乘雲)·과학(跨鶴)·소선(召仙)·척진(滌塵)·기룡(騎龍)이라고 지었는데 어느 것이 좋으냐?"

"경회가 좋습니다."

새 누각을 경회루라 명명한 태종은 영의정 하륜으로 하여금 경회루 기(記)를 짓도록 하고 호조판서 한상경에게 글씨를 쓰도록 했다. 또한 세자 양녕대군으로 하여금 경회루(慶會樓) 편액(篇額)을 크게 써서 걸도록 했다.

경회루를 완공한 태종은 대소신료와 세자, 종친, 부마를 불러 기념연회를 했다.

"내가 이 누각을 지은 것은 중국(中國) 사신에게 잔치하거나 위로하는 장소를 삼고자 한 것이요, 내가 놀거나 편안히 하자는 곳이 아니다. 실로 모화루(慕華樓)와 더불어 뜻이 같다."-<태종실록>

태그:#이방원, #태종, #청계천, #광통교, #경회루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