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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야금의 기원은 멀고도 멀다. 오랫동안 대한민국 대표악기로 장기 집권한 가야금은 근대에 들면서는 산조라는 기막힌 옥동자를 출산했으며, 오늘날에는 17줄부터 25줄까지의 혼혈을 낳아놓고 있다.

 

거문고나 아쟁들과 마찬가지로 오동나무를 고집하는 가야금은 연주 명인, 제작 명인은 있으나 정작 명기(名器)라 불리는 악기는 남기지 않는다. 서양의 악기가 묵을수록 더욱 가치를 높이는 것과는 달리 가야금은 세월의 성상이 쌓이면 마치 사람의 그것처럼 뒷전으로 물러서게 된다.

 

마치 혼신의 힘을 다하고 더 이상은 여력이 없다는 듯 가야금은 대략 한 연주가의 연주이력과 비슷한 수명을 갖는다. 오래 가는 나무를 몰라 선조들이 명 짧은 오동나무를 택하진 않았을 것이다. 애초에 들려주기보다는 스스로 즐기는 것인 한국의 음악사 속에 딱히 고대 연주인들이 기록에 남지 않은 것과도 일맥상통한다.

 

그러나 요즘은 어디서 가야금 한 줄만 팅겨도 낱낱이 기록되고 후일 누가 알아도 알게 된다. 음악이 소리의 즐김이란 뜻이 그때나 이제나 변함이 없으나, 그 옛날의 자족이 아니라 들려주는 것으로 형식은 달라져 있다. 이런 격세지감이 따로 없다. 그나마 불과 20,30년 전에 비하면 요즘 국악은 팔자 핀 셈이다. 고운 따님께서 가야금을 하겠다면 대뜸 ‘기생될라고 하느냐’는 불호령이 떨어질 것이 뻔했던 우여곡절도 이제는 모두 옛 추억일 따름이다.

 

한국 음악의 변화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크다. 통칭 국악을 딱히 전통이라 규정하기에는 곤란한 갖은 변화는 오래 전부터 있어왔다. 오늘날 가야금은 산조나 영산회상을 타는데 그치지 않고 아니 그보다 더 빈번하게 파헬벨의 캐논이나 오선보를 앞에 둔 연주를 하고 있다. 강요였든 자발적이었든지 간에 외래 문화에 대한 맹종적 분위기 속에서 살아남기 위한 방편으로 국악은 일부 서구의 옷을 갈아입었다. 살아있음 혹은 현대화의 변명 속에.

 

그런 와중에 현대국악은 명곡(국악계에서는 창작곡이라 부르는)도 여럿 탄생시켰다. 한국음악사 속에서 가장 충격적인 창작곡은 75년에 발표한 황병기의 ‘미궁’일 것이다. 더불어 ‘미궁’은 국악기가 이룩한 가장 인상 깊은 창작행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꼭 그 곡만이 아니라 전통과 현대국악에서 마치 양쪽 날개처럼 균형을 지킨 황병기 명인의 많은 창작 가야금곡은 일파만파의 영향을 음악계에 끼쳤다.

 

그리고 ‘미궁’은 국악이 현대음악(컨템포러리)으로 변하게 독려(?)하는 계기가 되었고 오늘날 많은 현대음악작곡가들의 국악기를 통한 표출이 잦다. 국악계 내부에서도 그런 요구와 필요가 커져서 ‘현대음악앙상블’이나 ‘아우라’ 같은 현대음악을 전문적으로 연주하는 단체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활동하고 있다. 그 배경에는 수구초심이랄까, 서양음악을 전공한 작곡가들의 어찌 보면 당연한 자기 본연의 성찰이 있다.

 

현재 서양음악계에 몸담고 있으면서 꾸준히 국악곡을 써내고 있는 몇몇 작곡가들이 있다. 이만방, 강준일 임준희, 김희정 등은 국악곡만으로 작곡발표회나 음반을 내놓은 사람들로 국악에 각별한 동기를 갖고 있다. 그들 중 가장 후배 격인 김희정은 특히 가야금에 천착하고 있는 작곡가이다.

 

지난 12일(수) 국립국악원 우면당에서 열린 김희정(상명대 작곡과 교수)의 현대음악발표회는 현대국악사에 인상 깊은 하루로 기록될 것이 분명하다.

 

말은 현대음악발표회였지만 거기에는 가야금이란 말이 생략되어 있다. 이 날 발표된 6곡 모두 가야금으로 연주되었다. 그러나 발표회 제목이 <가야금 지구 대작전>인 것을 보면 이 날 발표회 분위기는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앞서의 ‘미궁’이 무섭도록 강한 톤으로 가야금의 몸부림을 표출했다면 김희정의 현대가야금은 발랄한 '끼'로 유머와 역설적 미학을 주었다.

 

작곡가이면서 연출가 프로덕션 아티스트로 활약 중인 김희정은 머리 속에 온갖 상상과 장난기가 가득 찬 사람이다. 이 날 발표된 6곡의 제목이 남다른 면이 우선 눈길을 끈다. ‘가야금 지구 대작전(초연)’, ‘여성과 암호술(2006)’, ‘뻥쟁이 아줌마, 강아지와 주지스님(2005)’이 그렇다.

 

이 날 초연된 발표회 제목이기도 한 ‘가야금 지구 대작전’을 표현한 표지 그림은 보는 이로 하여금 웃음을 자아내기에 충분했다. 한복 입고, 팔을 걷어붙인 한 여성이 가야금을 휘두르며 불을 내뿜는 괴물과 맞서는 그림이다.

 

이 날 연주는 현재 국악계에서 현대음악을 가장 잘 연주한다는 용인대 이지영 교수와 한예종출신 3인으로 구성된 실력파 가야금 앙상블 '아우라'가 전담했다. 그리고 플룻(패릭스 랭글리)과 정가(이아미), 장고(김웅식)가 가야금과 호흡을 맞추었다. 또한 두 곡에 입체적인 영상을 만든 상명대 최연식 교수가 가세했다.

 

이 날 발표회에서 청중들은 우선 김희정의 가야금에 대한 열정과 멀티미디어 발상에 놀랐던 것 같다. 이 날 초연된 가야금 지구 대작전은 김희정이 처음 쓴 25현금 곡이다. 서양음악을 전공한 김희정은 한국악기 중 12현 산조가야금에 남다른 애정을 가져서 스스로 열성애호가라 칭한다.


이 곡에 가야금이 지구 음악을 구한다는 염원을 담았다고 한다. 그만큼 이 곡에서는 진지함과 강한 열망, 도저히 포기할 수 없는 절실함이 느껴졌다. 아가리에서 불을 뿜는 용가리는 아마도 한국음악의 전통미학을 위협해온 그 무엇일 텐데 그것에 가야금으로 맞서려는 김희정의 의도는 지극히 역설적이다.

 

그렇다 해도 현대음악은 여전히 화자(話者)의 음악이다. 그점에서 한국전통음악과 맞닿은 지점이 존재할지도 모를 일이다. 그렇기 때문에 김희정의 음악을 계몽적으로 이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예컨데 이지영이 연주한 ‘여성과 암호술’은 1인이 두 대의 가야금(하나는 철현금)을 연주하고 거기에 장고가 반주하는데, 이 곡의 해설을 보면 카마수트라 이야기가 등장한다. 즉, 김희정이 가진 열성은 ‘가야금 지구 대작전’ 혹은 ‘뻥쟁이 아줌마, 강아지와 주지스님’ 같은 알쏭달쏭한 표제 속에 역설적으로 지켜보는 이를 어쩐지 교화시킨다는 느낌을 주는 것이다.

 

‘뻥쟁이 아줌마, 강아지와 주지스님’은 3인의 연주자가 한 대의 가야금에 들러붙어 연주하는 곡이다. 이 곡은 김희정과 해외 연주를 단골로 다닌 ‘아우라’가 여러 대의 가야금을 들고 다니기가 불편한 것을 보고 ‘단지’ 그 불편을 덜어주기 위해 작곡했다고 솔직히 고백하는데, 3인의 여성이 가야금 하나에 매달린 모습도 놀랍거니와 작곡 동기를 얼마든지 그럴싸하게 윤색해도 될텐데 오히려 숨기지 않고 거리낌없이 밝히는 김희정의 당당함과 솔직함이 발랄함으로 그대로 배여 나온다.

 

그러면서도 정가와 영상이 어우러진 ‘공무도화가’와 ‘젖은 땅을 위한 애가’에서는 뭐랄까 한국인만이 가질 수 있는 슬픔에 대한 두려움과 동경을 고스란히 담고 있다. 세상에 단조음악은 어디에나 존재하지만 비가의 대표라 할 수 있는 레퀴엠과 이를 테면 김희정의 애가가 다른 점은 역시나 한국 정서인 애이불비(哀而不悲)에 있다.

 

그녀가 모차르트를 연상시키는 엉뚱한 상상력과 지독한 열정을 가졌다 해도 어느 날 문득 우울한 날에는 황병기의 ‘침향무’를 연주한다는 영락없는 한국인이기 때문이다.

 

이 날 발표회는 한 2년쯤 후가 될지 아니면 그보다 훨씬 더 이르거나 늦을 김희정의 두 번째 가야금 대작전을 기대하게 했다. 인권문화운동과도 연을 대고 있는 김희정의 작품 중 ‘종군위안부를 위한 애가’가 뉴욕 WNYC, 영국 BBC, 중국 CCTV 등에서 방송된 것처럼 가야금의 세계성을 확인시키는 어떤 결실을 기대하게 한다.


태그:#김희정, #가야금, #현대음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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