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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역.
 논산역.
ⓒ 안병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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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간의 마침표를 어디에다 찍어야 할까

시간은 한 꾸러미의 달걀이다. 한 해를 시작하면서 사람들은 저마다 자신의 몫으로 열두 알의 달걀을 받았다. 그걸로 어떤 이는 프라이를 해먹고, 또 어떤 이는 나처럼 후루룩 날것으로 마셔버렸고, 어떤 이는 얇게 썰어 김밥에 넣어 먹기도 했다.

달걀을 상온에서 오랫동안 방치해 둔 사람들은 이제야 달걀에서 악취가 난다는 걸 알았다. 코를 감싸쥐고 쓰레기통 속에다 곯은 달걀을 버렸다. 이제 달걀은 마지막 한 알이 남았다. 남은 달걀에서 슬슬 악취가 풍긴다.

달걀을 제대로 요리해 든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고 하소연하려는가. 아니면 프라이팬의 온도가 적당하지 못해 달걀부침을 버렸다고 말하고 싶은가. 어처구니없이 변명부터 하려 드는 건 당신의 오랜 지병이다.

하긴 달걀을 제대로 요리해 먹기에는 그대는 너무 바쁜 사람이지. 달마다 돌아오는 곗돈도 막아야 하고, 본격적으로 시청하려고 앉으면 어느새 끝나버리는 연속극도 봐야 하고 블로그에 올려놓은 글에 줄줄이 사탕처럼 매달린 댓글에도 눈인사를 해야겠지.

느리게 살자고? 미친놈들. 즈그들이, 그 하루살이들이 일상의 연속성을 알기나 하나? 그 날라리들이 사는 일의 엄중함을 알기나 하냔 말이야? 어쨌든 신이 주신 달걀은 이제 한 개 남았다. "어느 날 갑자기 낙엽 지는 소리에 갑자기 텅 빈" 내 마음을 본다.

생활의 문법을 잘 알지 못하는 나는 마침표를 어디에다 찍어야 할는지 잘 분간이 서지 않는다.

얼마 전, 저물어 가는 논산역에 서서 기차를 기다리고 있을 때였다. 플랫폼에 하나둘씩 불이 켜지기 시작했다. 하나의 등불처럼 뚱딴지같이 "삶이란 얼마나 막막한 것인가?"라는 생각이 켜졌다. 그리고 가슴 속에서 뛰- 소리를 내며 옛 증기기관차 화통을 단 미카 기차 한 대가 지나갔다. 순간, 내 생에서 소중한 무엇인가가 또 하나 지워지고 있다는 어두운 징후를 읽었다.

마지막 남은 달걀 한 알을 만지작거리며

김진경의 시 '시간 위의 집'을 읽는다. 그의 시를 읽는 게 무척 오랜만이다. 내가 그의 시를 처음 읽은 것은 1981년에 나온 '5월시' 동인지 1집 <이 땅에 태어나서>였다. 이영진, 박몽구, 곽재구, 나해철, 나종영 등과 함께 낸 그 동인집 속에서 그는 격정에 찬 목소리로 '5월'을 노래했고, 나는 숙연하게 그 깊고 어두운 목소리를 들었다. 이후 1985년, 그는 '민중교육' 사건으로 옥고를 치른 후 교육민주화 운동에 헌신해 왔다.

시집 표지.
 시집 표지.
ⓒ 창작과 비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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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이 간이역에서 서지 않는다
오직 지나쳐지기 위해 서 있는 낡은 역사
무언가 우리의 생에서 지워지고 있다는 표시
시간 위의 집

- 김진경 시 '시간 위의 집' 전문

그의 시의 특징은 슬픔 속에서 기쁨을 찾아내고, 고통 속에서 희망을 발견하고, 부정을 통해 긍정을 획득한다. 아마도 이분법적으로 대립하는 이 세계에서 지치지 않고 싸우기 위한 낙관적 방법일 것이다.

시 '시간 위의 집'은 1996년에 나온 시집 <별빛 속에서 잠자다>(창작과비평사)에 실려 있다. 이 시 속에는 그가 시를 쓰기 위해 즐겨 차용하는 이분법적 장치가 없다. 절망은 아니지만, 무언지 모를 쓸쓸함이 시 전체를 누비고 있을 뿐이다.

그는 "기차는 이 간이역에서 서지 않는다'라고 시의 서두를 꺼낸다. 일상이란 시시한 것이다. 우리가 살아가는 하루하루는 너무나 하찮고 시시한 잡동사니 같다. 우리는 종종 오늘 하루는 무시해 버려도 좋을 만큼 무의미한 것이었다고, 심지어 지워버려도 좋다고 생각할 때가 있다.

그러나 일상이란 "오직 지나쳐지기 위해 서 있는" 역이 아니다. 일상이 없다면 개인의 역사란 결코 존재할 수 없다. 만일 일상을 그냥 지나쳐도 무방할 만큼 하찮은 것으로 간주한다면 삶이 얼마나 허망할까. 오늘 없이 어떻게 내일이 있을 수 있는가. 아무리 하찮은 오늘일지라도 내일을 움트게 하는 씨앗이 된다.

이제 햇살은 점점 길어지고, 사람들도 덩달아 그의 그림자에 무거운 추(錘)를 달 것이다. 마지막 남은 달걀 한 알을 만지작거린다. 무언가 우리의 생에서 지워지고 있다"라는 느낌이 앵겨드는 저녁이다. 마지막 남은 달걀 한 알로는 무슨 요리를 해먹을까.


태그:#김진경 , #시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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먼 곳을 지향하는 눈(眼)과 한사코 사물을 분석하려는 머리, 나는 이 2개의 바퀴를 타고 60년 넘게 세상을 여행하고 있다. 나는 실용주의자들을 미워하지만 그렇게 되고 싶은 게 내 미래의 꿈이기도 하다. 부패 직전의 모순덩어리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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