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죽령산신당과 다자구 할머니

 

보국사 절터를 보기 위해 죽령을 찾았다. 죽령은 경상북도 영주시 풍기읍과 충청북도 단양군 가곡면 경계에 있는 소백산 자락에 있다.


중앙고속도로 단양나들목을 나와 영주와 풍기 방향 5번 국도를 타야 한다. 이 길은 이제 죽령 아래에 4.6㎞의 터널이 생기면서 아주 한적한 길로 바뀌었다. 죽령 이쪽과 저쪽에 살고 있는 사람들의 통행로 수준으로 그 의미가 격하되었다.


우리는 대강면 용부원리 텃골을 지나 죽령산신당(竹嶺山神堂) 안내판을 보고 오른쪽으로 나 있는 길로 들어섰다. 철도 아래로 난 소로를 따라 왼쪽으로 가파른 길을 오르니 죽령 산신당이 나온다. 산신당은 남향을 하고 있으며 서쪽으로 대강면 골짜기가 길게 내려다 보인다. 죽령산신당은 삼국시대부터 산신제를 지내던 곳이라고 한다.

 

조선시대에는 죽령사(竹嶺祠)라는 사당이 세워졌고 나라에서 제사를 지내는 국사당으로 위상이 높아졌다. 그리고 이곳에서 단양(丹陽)과 영춘(永春) 그리고 풍기(豊基)의 군수가 함께 제를 올렸다고 한다. 현재는 동민들이 3월과 9월 정사일(丁巳日)에 산신제를 지내고 있다.


죽령산신당과 관련해서는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전해오고 있다. 다자구 할머니 전설이다. 죽령은 예부터 험한 고개인지라 도둑들의 소굴이었다. 이들 도둑은 떼를 지어 행인들을 괴롭히거나 물건을 빼앗았다. 행인들의 피해를 보다 못한 조정에서 도둑 소탕령을 내렸고, 죽령폭포 앞에 살고 있던 한 할머니가 관군을 도와 도둑을 잡으러 나갔다.


할머니는 관군들을 곳곳에 매복시킨 후 암호를 정하고 '다자구'라고 하면 공격하고 '들자구'하면 숨어 있도록 하여 도둑떼를 소탕하는데 큰 공을 세운다. 그러나 마지막에 할머니는 도둑들에게 죽음을 당하고 말았다고 한다. 이에 조정에서 사당을 세워 할머니의 넋을 위로하게 되었다. 이것이 처음에는 '다자구 할머니 산신당'으로 불리다가 이곳의 지명을 따서 죽령산신당으로 불리게 되었다.

 

이곳은 한동안 퇴락했다가 1948년 주민들의 성금으로 중건하여 현재에 이르고 있다. 정면 2칸, 측면 1칸의 목조 기와집으로 팔작지붕 형태이다. 죽령산신당은 현재 충청북도 민속자료 제3호이다. 이 지역 사람들은 다자구 할머니와 관련해 다음과 같은 노래를 부르고 있다.


"다자구야 들자구야 언제가면 잡나이까?
들자구야 들자구야 아직 오면 안됩니다.
다자구야 다자구야 소리칠 때 기다리다
다자구야 다자구야 그때 와서 잡으라소."

 

제당인지 성황당인지 아니면 굿당인지?

 

산신당을 나와 다시 죽령의 7부 능선쯤에 이르면 오른쪽으로 죽령 옛길이 나온다. 길을 따라 길게 마을이 형성되어 있는데, 경관이 의외로 좋다. 그래서인지 펜션 같은 건물들을 짓느라고 여기저기 공사 중이다. 그래도 옛날 정서를 느끼게 하는 오래된 집들이 곳곳에 남아 있다. 그들 사이로 또 동제를 지내는 제당을 하나 볼 수 있다. 우리가 이곳을 찾았을 때는 보름인지라 촛불까지 켜져 있다.


세 개의 촛불 뒤로는 소백산신령 신위라는 위패가 모셔져 있다. 왼쪽에는 징이 놓여 있는 것으로 보아 제를 올렸거나 올릴 모양이다. 오른쪽 위로는 실 꾸러미와 한지가 걸려 있다. 동제(洞祭)에 관심이 많은 어경선 선생이 이것저것 유심히 살펴본다. 이곳을 관리하는 사람을 만나보면 더 많은 것을 알 수 있을 텐데 아쉽다.

 

보국사 석불에는 불두가 없다

 

이곳에서 차로 5분쯤 올라가니 길 왼쪽 언덕 위로 절터가 나타난다. 죽령 옛길의 8부 능선쯤 되는 이곳이 보국사지(輔國寺址)다. 주변이 대부분 밭으로 변해 있어 관심을 가지고 봐야 찾을 수 있다. 밭을 중심으로 약 700-800평쯤 되는 공간이 절터였을 것으로 추정된다. 그러나 현재 유물이 드러나 보이는 곳의 면적은 100평 정도이다. 5m쯤 되는 거대한 석불(丈六佛)을 중심으로 주변에 주초석과 연화대 등이 널려 있다.


1979년 충주에 있는 예성문화연구회가 조선시대 가사문학 작품인 <소백산 대관록>을 근거로 이곳에서 석불을 확인하고 통일신라 보국사지라고 주장했다.이에 따라 단양군에서 1984, 85년 두 차례에 걸쳐 지표조사를 실시했다. 그 결과 석불(장육불) 외에 연화문 석대와 기단부, 돌기둥인 석주,대나무 줄기 모양의 죽절문 석주,연화 첨차석,연화석,기둥머리돌(柱頭石),난간 석주,초석,옥개형(屋蓋形) 석재,깨진 기와 등이 다량 확인되었다.

 

이 중 가장 중요한 것이 장육석불이다. 장육석불이란 한 장(丈) 육 척(尺)의 석불로, 한 장이 10척이니 16척 높이의 석불을 말한다. 옛날에는 한 척이 33㎝였으니 이 장육불의 높이는 5.3m 정도 된다. 그러나 현재는 불두가 없어져 장육불의 높이가 4.6m이다. 머리가 없으니 부처님이 정말 딱해 보인다. 얼굴을 볼 수 없으니 부처님을 보는 종교적인 숭배감이나 감흥도 떨어진다.


단양군에서 80년대 이후로 불두를 찾기 위해 백방으로 노력했으나 찾을 수 없었다고 한다. 오히려 주변에 있는 부재만 하나 둘씩 반출되기 시작해 지금은 80년대 중반 지표조사 때보다도 절터로서의 모습을 더 잃어버리고 말았다. 문화재나 유물의 현장 보존과 유지라는 기본 정신을 망각한 것 같아 정말 아쉽다.

 

지금 현재 보국사지에서 사라진 것 중 찾아야 할 것은 장육불의 몸체를 이루는 불두와 오른팔이다. 물론 이것은 영원히 찾지 못할 수도 있다. 지난 20여 년간 전혀 성과가 없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70년 단국대 박물관이 가지고 간 장육불의 발 부분과 현재 죽령고개 풍기 쪽 휴게소에 세워져 있는 죽절문 석주 두 개는 빠른 시일 내에 현 위치로 돌아와야 한다.

 

이곳에서 그나마 원형을 유지하고 있는 것은 장육불의 옷주름이다. 특히 아랫 부분에 주름이 하나로 모이는 기법이 아주 특이하다. 그리고 왼손의 손가락 다섯 개가 분명하게 표현되어 있다. 불상을 아주 섬세하게 표현했음을 알 수 있다. 몸통도 어깨가 넓고 허리 부분이 잘록하며 엉덩이 부분이 나오고 발목 부분이 들어간 형태이다. 우리 몸의 모형을 그대로 재현한 아주 사실적인 작품이다.

 

통일신라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이 곳 죽령을 넘나들던 우리 조상들은 이 아름다운 불상을 보면서 소원을 빌고 또 마음의 평안을 얻었을 것이다. 그러나 지금은 보국사지를 찾는 사람도 우리 같은 역사연구자들 뿐이고, 이곳 동네 사람들마저 관심밖이어서 거의 폐허 상태가 되었다. 11월말, 계절 탓이기도 하겠지만 보국사 절터가 더 쓸쓸하게 느껴진다.

 


태그:#죽령산신당, #다자구 할머니, #보국사지, #장육불, #죽절문 석주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관심분야는 문화입니다. 유럽의 문화와 예술, 국내외 여행기, 우리의 전통문화 등 기사를 올리겠습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