메뉴 건너뛰기

close

역사의 교훈

 

한나라 문제(文帝) 때 가의(賈誼)라 불리는 명신이 있었다. 가의는 10여 세에 이미 <시경>과 <서경>을 통독했으며, 스무 살 나이에 박사가 되었다. 건국 초기의 유약한 나라 기틀을 다지고자 <논적저소>를 썼고, 이어서 <치안책>을 기술하여 문제에게 올렸다. 젊은 날의 가의가 고통스럽게 지적한 한나라의 문제점은 대강 이러하다.

 

"지금 한탄할 일은 사치스러운 것, 존귀의 위계질서가 무너진 것, 염치없는 자가 많은 것, 신하들이 예를 잃은 것입니다. 자고로 나라가 백성과 맞서면 빠르든 느리든 결국에는 백성이 이기는 법입니다."

 

가의가 내세운 나라를 다스리는 근본방침은 애민과 민본사상이었다. 그것을 위해 왕은 물론 조정의 신료들은 질박하고 검소하게 생활하고, 염치를 알며, 사치를 버려야 한다고 말한 것이다. 시대가 바뀌어도 나라를 다스리는 기본이념과 방향은 크게 다르지 않다. 국민을 받들고, 어질고 뛰어난 인재를 두루 등용하는 것이 정사의 기본이다.

 

그런데 한국의 실상은 어떤가. 각종 비리로 최고권부 청와대의 비서관과 정책실장이 옥살이를 하고 있다. 대한민국 대표기업 삼성은 경영권 불법승계와 비자금 문제로 특검을 목전에 두고 있다. 거기에 더하여 유조선에서 기름이 쏟아져 나왔다. 나라 전체가 총체적인 난국과 위기상황이다. 그리하여 국민들이 정권에 등을 돌리는 지경에까지 이르렀다.

 

그것은 대통령이 몸을 낮추지 않고 국민과 맞서고, 염치없는 자들이 득세하며, 관료답지 못한 자들이 권력을 농단했기 때문이다. 어디 그뿐인가. 돈과 권력을 한꺼번에 움켜쥐려는 파렴치한 인간과 그를 둘러싼 세력이 아침저녁으로 세상을 향해 불호령을 내리는 얼토당토않은 진풍경마저 벌어지고 있다. 과연 이래도 '우리들의' 대한민국은 괜찮은가. 

 

거리에서

 

날카롭지만 어여쁜 초승달이 사흘 전부터 우리를 찾아왔다. 나는 좋은 징조라고 생각한다. 무엇이든 차고나면 기울거나 넘치는 법이다. 상현을 지나 보름을 지나면 달도 하현과 그믐으로 넘어간다. 그러면서 하나의 달이 끝나고 새로운 달로 시나브로 넘어가는 것이다. 차가운 동짓달 12월의 초저녁 종로 거리에서 깨끗하고 아름다운 초승달을 우러른다.

 

1987년 12월이 떠오른다. 가마솥처럼 뜨겁고 길었던 그해 6월 항쟁을 거쳐 만들어낸 6.29 항복 선언과 직선제개헌. 가슴 벅차게 이루어냈던 이른바 '87체제'! 그러나 분열로 점철된 양김의 대립과 갈등. 그 결과는 군부독재의 연장과 공안정국으로 이어졌다. 1991년 봄 백주대낮에 일어난 명지대생 강경대의 학살과 열두 사람의 분신을 생생하게 기억한다.

 

왜 그랬던가. 그것은 권력을 향한 욕망이 민주화를 갈망하는 국민의 바람과 의지를 처절하게 짓밟았기 때문이다. 과도한 권력욕에 마비된 양김과 그들을 둘러싼 정치집단의 맹목적인 욕망이 초래한 비극적인 결과였다. 기나긴 10년 세월이 다시 지나서야 이 땅에 최초의 민주적인 정권교체가 이루어졌다. 하지만 그것은 불안하고 불완전한 정권교체였다.

 

'IMF사태'로 야기된 국가채무와 대규모실업, 엄청난 개인파산이 새로운 정권을 기다리고 있었다. 무능하고 부정직한 민자당과 문민정부의 거듭된 실정이 원인이었다. 그들의 후예가 신한국당과 한나라당으로 이름만 바꿨을 뿐, 그 실체는 변함없이 이어지고 있다. 그런 자들이 보수언론과 함께 '잃어버린 10년'을 합창하고 있다. 어처구니없게!

 

십여 차례 전과기록을 가진 자를 대통령후보로 뽑아놓고는 부끄러운 줄도 모르고 날마다 목청 높여 '경제를 살리겠다!'고 우긴다. 거리를 질주하는 외제차와 계절을 가리지 않고 넘쳐나는 해외여행객, 고급식당과 백화점에 차고 넘치는 수많은 인파들! 그들이 말하는 경제는 무엇인가. 땅과 아파트 투기인가! 사기행각인가! 그것도 모자라서 위장취업인가! 
             
왜 단일화인가

 

그들은 'IMF사태'로 헐벗고 가난해진 우리들의 허다한 비정규직들과 무업자들과 실업자들과 노숙자들과 거리의 노인들에게 무관심하다. 그들의 경제는 시장이 주인 노릇하는, 가진 자들이 더 많이 갖고, 없는 자들이 더 가난해지는 비참한 양극화경제일 따름이다. 그래서다. 그것이 대선을 눈앞에 둔 지금도 후보단일화를 소리 높여 외치는 까닭이다.

 

인간이 인간인 까닭은 인간과 인간의 유대에 있다. 너와 내가 존중하고 공존하는 가능성이 존재할 때 유대는 만들어진다. 그것은 무한경쟁과 투쟁이 능사가 아니라, 상호이해와 화해를 모색할 때 생겨나는 것이다. 한나라당이나 그곳 대통령후보가 주장하는 ‘성공하세요!’ 슬로건은 ‘가진 자들’만의 성공을 뜻한다. 그들은 가난과 실패를 생각하지 않는다.

 

이것은 무서운 일이다. 끝없는 성공에 도취한 인간과 세력이 주장하는 성공. 그래서 실패와 좌절을 경험한 정동영-문국현 두 후보가 단일화를 위해 마주 앉아야 한다고 생각한다. 네 명의 형을 앗아간 가난과 죽음의 문턱에서 살아나 재수의 길을 거쳐 대학에 입학한 정동영. 이차대학의 오명(?)과 불리함을 극복하고 반듯하게 일어선 기업가 문국현.

 

적어도 당신들은 청렴하고 강직하다. 거짓말도 하지 않고, 위장하지도 않으며, 비리로부터도 자유롭다. 우리 어린 것들을 올바르게 인도하고 가르치기에 부족한 사람들이 결코 아니다. 사람이 살아갈 길과 방향은 여태까지 그가 밟아온 삶의 내력에서 쉽게 찾을 수 있다. 그와 달리 당신들은 맑고 깨끗하다. 배울만한 것이 당신들에게 있다는 말이다.

 

그러니 다시 머리를 맞대고 단일화를 의논하라. 87년 체제의 비극적인 결말을 되풀이하지 말라! 패배를 생각하지 말고 단일화를 염두에 두어야 한다. 시민사회 원로들이 왜 단일화를 끝까지 촉구했는지, 돌이켜보라. 우리는 실패한 역사에서 반드시 배워야 한다. 눈앞의 작은 이익이나 맹목적 신념이 아니라, 훨씬 크고 막중한 천명을 생각해야 한다.     
   
단일화만이 살길이다

 

2007년 가을과 겨울. 대한민국에는 성공의 유령, 위장의 유령, 투기와 사기의 유령이 떠돌고 있다. 성공과 돈을 위해서는 온갖 부정과 불법과 탈법과 거짓도 허용될 수 있다는 믿음이 깊이 뿌리 내리고 있다. 부정과 부패, 위선과 거짓이 활개 치는 세상에서 인간은 절대 행복할 수 없다. 그런 나쁜 세상과 작별하고 좋은 나라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는가! 

 

어떤 사람은 끝난 승부라고 말한다. 싱거운 결말이라고 한다. 2대1 싸움이라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하지만 나는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다. 지난 10년 'IMF 사태'와 눈물겹게 싸워온 우리국민이 이토록 허망하게 부패집단에게 국가권력을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거리에서 광장에서 지하철에서 전경과 최루탄에 맞서 민주주의를 쟁취한 우리국민 아니던가!

 

희망은 있다. 지금도 역전은 가능하다. 그것을 위해 정동영과 문국현은 즉시 만나야 한다. 전쟁으로 얼룩진 아픈 상처를 딛고 남북한이 만나고, 대한민국과 베트남이 만나는데, 왜 당신들이 만나지 못하겠는가. 마음을 텅텅 비우고, 맑고 순수한 열망과 아름다운 영혼을 가지고 아침부터 밤까지 얼굴을 맞대보라. 그러면 크고 너른 출구가 나타날 것이다.

 

누군가는 단일화시도가 국민에 대한 ‘마지막 예의’라고 말했다. 그렇다. 그것은 지난 세월, 지난 역사에서 이름도 없이 사라져간 수많은 민주영령들을 위한 따뜻한 진혼곡이기도 하다. 후보단일화를 위한 최소한의 노력도 없이 시간을 흘려보낸다면, 당신들은 후손에게 무엇이라 말할 것인가. 권력에 대한 욕망도, 내년을 향한 계산도 다 버려야한다.   

 

끝까지 가려면 도중에 포기할 수 있어야 한다. 도중에 포기할 수 있어야 끝까지 갈 수 있다. 완주자체를 목적으로 대선에 임하는 것이야말로 어리석은 결정이다. "위대한 정치가가 나타난다 해도 30년이 흘러야 어진 정치가 가능하다"고 공자는 말했다. 이제 시작이다. 두 분의 위대한 결단을 기대하면서, <도덕경> 제24장을 인용하면서 글을 마칠까한다.

 

"발꿈치를 땅에 대지 않고 발돋움하면 오래 서있을 수 없고, 큰 걸음으로 걸으면 멀리 가지 못한다. 자기를 내세우면 부각되지 않고, 자기가 옳다고 하면 드러나지 않는다. 공을 자랑하면 그 공도 사라지게 되고, 혼자 우쭐거리면 오래가지 못한다. (企者不立 跨者不行 自見者不明  自是者不彰 自伐者無功 自矜者不長)"


태그:#후보단일화, #정동영, #문국현, #양극화, #87체제
댓글
이 기사가 마음에 드시나요? 좋은기사 원고료로 응원하세요
원고료로 응원하기

인터넷 상에서 여러 사람들과 만나 자유롭게 의견을 교환하고, 아름답고 새로운 세상 만들기에 참여하고 싶어서 회원으로 가입했습니다. 개인 블로그에 영화와 세상, 책과 문학, 일상과 관련한 글을 대략 3,000편 넘게 올려놓고 있으며, 앞으로도 글쓰기를 계속해 보려고 합니다.


독자의견

이전댓글보기
연도별 콘텐츠 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