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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극은 기본적으로 영화와 무척 다를 수밖에 없다. 시공간의 압박에서 자유로울 수 있는 영화와는 달리 기본적으로 제한적인 공간과 시간, 그리고 각종 상황에 묶여 있기 때문에, 연출에 있어서도 그 폭이 좁아질 수밖에 없는 것은 당연한 사실일지도 모른다.

 

억지스러울지도 모르겠지만 예를 들어 영화 <반지의 제왕>을 연극으로 옮긴다고 가정해보자. 아무리 거대한 무대라도 해도 중간계의 광할함과 대규모 전투신의 웅장함을 묘사하기에는 무리가 있을 것이고, 그 어떠한 조명효과를 동원한다고 해도 간달프가 부리는 마법을 효과적으로 재현하기는 힘들 것이다.

 

또 아무리 분장에 공을 들인다해도 우르크하이의 끔찍한 외모를 흉내내기는 어려울 것이다(물론 어떠한 수를 써서라도 공연을 만들 수는 있겠지만, 내 머리속에서는 그저 우스꽝스런 코미디가 연상될 뿐이다. 두꺼운 호빗 의상 속에서 오리걸음을 걷는 조승우(프로도역)을 연상해보라).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연극이라는 매체는 '보다' 일상적이고 소소한, 쉽게 다룰 수 있을만한 이야기들에 집중 하기 마련이다. 대표적인 예를 들자면 그 흔하디 흔한 연애이야기라고나 할까.

 

근래 들어 여러 기회로 인해 많은 소극장 연극들을 접하게 되었는데, <노이즈 오프>를 제외하고는 모두가 연애에 관련된 것들이었다. "한 여자와 한 남자가 만나 첫눈에 반한다. 그리고 연애를 시작하고, 행복하게 지내다가 싸우기 시작하고, 그래서 그냥 헤어진다."

 

남자에게 다른 애인이 있거나, 여자가 유부녀라거나, 한명의 주인공이 여러 남자를 사귄다거나, 그도 아니면 알고 보니 여자가 귀신이었다 등등의 여러 하위 요소들이 있었지만, 기본적으로는 '만나고 사랑하다 헤어짐'이라는 큰 틀안에서 벗어나지 않는 이야기들이 대부분이었다.

 

흔한 이야기를 말하려면 그 화자의 목소리는 독특해야 하는 것이 당연한데, 대부분의 경우 좋은 연출 보다는 그저 단편적인 유머 요소들을 가져다 쓰는 것으로 땜빵하는 경우가 많았다. 친구들과의 술자리에서 언제든지 들을 수 있을 만한 이야기들을 굳이 돈을 주고 소극장까지 달려가 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노이즈 오프>의 경우를 제외하고) 소극장 연극에 대한 좋지 않은 인상이 확고해질 무렵 보게 된 것이 <김종욱 찾기>라는 뮤지컬이었다. 지난 10일 저녁 8시 대학로 예술마당에서 관람한 <김종욱 찾기>의 내용도 별반 다를 것이 없었다. 사랑을 두려워하는 한 여자와 그녀를 사랑하게 되는 한 남자가 만나 결국 사랑에 빠지게 되는데, 알고 보니 그 둘이야말로 운명적인 인연이었다. 

 

흔한 이야기와 약간 구차한 설정들에도 불구하고, 이 뮤지컬이 좋았던 이유는 배우와 연출가의 탄탄한 기본기에서 흘러나오는 원초적인 즐거움 덕분이었다. 경쾌한 노래들과 안무, 발랄한 배우들의 연기와 좋은 타이밍의 각종 유머 요소들이 한데 어우러져 '절로 흥이 나는 뮤지컬'을 비교적 깔끔하게 완성했다. 비록 중반 이후부터 집중도가 조금씩 떨어지긴 했지만, 과욕을 부리지 않고 오직 '사람이 사랑에 빠지는 과정'만을 산뜻하게 묘사한 연출가의 의도는 성공한 듯하다.

 

가장 눈에 띄었던 것은 바로 한 사람이 18가지의 배역을 맡는 '멀티맨'이라는 캐스팅이었다. 한정된 공간안에서 최소의 비용으로 최대의 효율을 창출해내야 하는 소규모 공연에 있어서 한 명의 배우가 여러 역할의 배역을 맡는 것은 그다지 드문 일이 아니다. 하지만 총 18가지의 배역을 한 사람이 소화해낸다는 것은 역시 흔한 일이 아니다.

 

'멀티맨' 역할을 맡은 임기홍이라는 배우는 어떠한 배역이라도 자신만의 색깔을 이용하여 희극적인 캐릭터로 소화해내는 재능이 있는 듯하다. 애드리브로 보이는 듯한 갖가지 대사들과 웃음이 터져나올만한 타이밍을 정확히 짚어내는 순발력이 무척이나 인상깊었다. 후반부로 갈수록 그 비중이 적어져 아쉽기도 했지만, 초반부 인상이 워낙 강렬했던 탓인지 관객들은 그가 등장하기만 해도 피식 피식 웃음을 터뜨렸다. 짧은 시간 안에 자신의 캐릭터를 확실히 각인시키는 일은 그리 쉬운 일이 아니다.

 

주인공을 맡은 두 배우도 좋았다. 안유진이라는 여배우의 목소리는 발랄하고 씩씩한 캐릭터의 성격과 맞아떨어졌으며, 느끼한 남자와 어수룩한 주인공이라는 두 배역을 소화한 김재범이라는 배우 또한 독특한 음색의 목소리로 눈길을 끌었다.

 

이야기에 있어선 아쉬운 점이 하나 있다. 산뜻하고 경쾌한 분위기를 유지해내 깔끔하게 마무리 할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굳이 '사실 운명적인 인연은 이 두사람이었다!'라고 외치는 마지막 장면은 조금 구차한 신파가 아닐까 하는 생각이 든다. 감동을 줄 수도 있겠지만, "뭐야 그런거였군"하며 맥이 탁 풀릴 수도 있는 위험한 설정이 아닐까 한다.

 

사소한 몇 가지를 제외하고는 무척이나 마음에 들었던 뮤지컬이었다. 좋은 노래와 좋은 배우들, 그리고 좋은 연출. 이야기가 약간 진부하더라도, 기본적인 저 세 요소들만으로도 충분히 좋은 뮤지컬이 나올 수 있다는 사실을 깨닫게 해주는 작품이었다. 따뜻한 밥과 정갈한 반찬 두가지만 있어도 맛있는 밥상은 완성 될 수 있다. 비록 양념이 조금 싱겁더라도 말이다.


태그:#뮤지컬, #김종욱찾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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