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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98년부터 '제주 4·3사건 진상 규명 특별위원회' 부위원장으로 활동했던 추미애 전 의원(당시 국민회의)은 제주 4·3을 '끝나지 않은 진실'이라고 말한 바 있다. 사건의 진상을 조사하면서 피부로 느꼈던 이의 발언이라는 점을 감안한다면, 제주 4·3의 진실에 접근하기가 결코 쉽지 않았었음을 알게 해 준다.

 

왜 그랬을까?

 

지난 24일 건국유족회 제주유족회, 자유시민연대, 대한민국수호연합 등 5개 보수단체가 정부가 만든 '제주4·3사건 진상조사보고서'를 폐기하고 4·3평화공원 공사를 그만두라고 대통령직 인수위원회에 진정서를 냈다고 한다.

 

그 이유야 어찌 됐든 제주4·3은 사건 발생 60년 전이나 지금이나 당사자들이 쉬이 입에 올리고 싶지 않은 아픈 기억임이 틀림없는데, 그 진실을 덮으려는 세력들에 의해 썩은 내가 풀풀 나는 것을 보며 대한민국 현대사에서 가장 참혹했던 봄날에 붙여진 이름들 중의 하나인 제주 4·3을 말하지 않을 수 없다.

 

토벌대나 무장대보다 서북청년단에 의한 피해가 더 극심

 

내가 나고 자란 마을은 유네스코 지정 세계자연유산인 성산일출봉을 마주 보고 있는 성산읍 오조리라는 마을이다. 제주 중산간을 중심으로 발생했던 4·3이라는 처절했던 현대사에서 빗겨나 있었을 것 같은 해변 마을이었던 오조리와 인근 시흥리, 고성리, 신양리와 수산리, 고잡리(수산2리)는 토벌대나 무장대에 의한 피해보다는 서북청년단에 의한 피해가 극심했던 지역이다.

 

어린 시절 온 동네가 제삿날이면, 사랑방에 옹기종기 모인 사이 사이에서 웅성웅성 터져 나오던 얘기가 바로 4·3이었다. 그리고 자연스레 온 동네가 한날한시에 제사를 드리게 된 연유가 들려 나오곤 했다.

 

어른들은 4·3을 '사건'이라고도 했고, '사태'라고도 했는데, 공통점이 있다면 드러내놓고 말하지를 않는다는 것이었다. 어른들은 늘 숨을 꼴딱이면서 그 처참했던 역사의 한 귀퉁이를 듣던 어린 우리들에게 “어디 가서 이런 얘기 하면 큰일 난다”고 다짐하시며 이야기보따리를 풀어놓았다.

 

그리고 행여 밖에서 낯선 인기척이 날라치면 말을 끊고 딴청을 피우셨고, 그런 모습을 보시던 할머니는 '흐음'하며 못마땅한 듯 헛기침을 하시곤 하던 기억이 지금도 선하다.

 

그때마다 들어서 익은 단어 중에 '대살, 서북청년단, 던지기약(다이너마이트라고 해야 할지 수류탄이라고 해야 할지 모르지만, 폭발성이 있는 폭탄)'이란 단어들이 있다.

 

'던지기약' 이용해 고기 잡은 것이 비극의 시작

 

제주도 남제주군 성산읍 오조리에서 1948년 12월 29일에 있었던 그 사건의 사연은 이렇다.

 

증언에 의하면 당시 어른들 중에는 '던지기약'으로, 밀물 때 해변에 갇힌 고기들을 잡는 경우가 종종 있었는데, 그럴 때면 허연 배를 드러낸 고기들을 지게로 들어 나를 만큼 많이 잡았다고 한다. 폭탄은 일제가 패망하면서 두고 간 것들도 있었고, 사제 수류탄도 있었는데, 그 당시까지만 해도 던지기약으로 고기를 잡는 일은 그리 낯선 일이 아니었다고 한다.

 

게다가 4·3이 발생한 후에 지역 민병대격인 민보단에서는 보초를 설 때 던지기약을 사용하고 있었다고 한다. 그런데 마을에 서북청년단(어른들은 늘 그들을 '서북 것들 혹은 서청'이라고 지칭했다)이 들어온 지 얼마 안 됐을 때, 던지기약을 이용해서 고기를 잡은 것이 비극의 시작이었다.

 

그 일을 빌미로 온 동네가 빨갱이와 내통한다면서 서북청년단은 마을 사람들을 잡아갔고, 1949년 1월 2일에 잡아갔던 이들을 대나무로 잔혹하게 참살하였다. 고씨, 송씨, 강씨, 오씨, 김씨, 홍씨 집안의 스무 명이 일출봉 아래 '우뭇개'에서 학살된 후 가마니에 둘둘 말린 채 지게에 뉘여 돌아오거나, 바닷가에 둥둥 떠 있다가 마을 사람들에 의해 하나 둘 건져졌을 땐, 형체를 알 수 없을 지경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열흘 뒤인 13일에는 일출봉에 둘려 좁아져서 물살이 센 '터진목' 아래에서는 고성리 사람들 28명이 역시 서청에 의해 학살되었다.

 

밝혀지지 않고 끝날까 두려움 드는 '끝나지 않은 진실'

 

아이러니컬하게도 그 참혹했던 학살터였던 우뭇개와 터진목은 우리가 어릴 적부터 수영을 하기도 하고, 낚시도 할 뿐만 아니라, 톳, 미역 채취 시기가 가까울 때면 양식장 감시를 위해 수시로 나대던 곳이었다. 그렇다고 해서 양식장 감시는 일이 아니었고, 친구들과 어울려 감시길에 청동오리도 잡고 숭어도 잡으며 신나게 놀 수 있는 또 다른 기회일 뿐이었다. 한마디로 일출봉은 우리에게 놀이터였지, 어른들처럼 피맺힌 원한이 쌓인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어른들이 거센 해풍과 자잘한 돌들로 인해 비옥함과는 거리가 먼 밭에서 쇠비름(붉은 색을 띠며 강한 생명력을 지닌 잡초)을 뽑고 현무암으로 쌓아 올린 담벼락에 칠 때마다 "청산 오름(성산일출봉) 불나라, 청산 오름 불나라" 하시는 모습이 성산일출봉에서 죽은 원혼을 달래고 싶은 심정을 달래고자 했던 것이라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었다.

 

그 잔혹한 학살터였던 성산일출봉이 지금은 유명한 관광지가 되었다. 아마 누군가가 소리 질러 말하지 않는다면, 우뭇개와 터진목 아래에서의 잔혹한 학살은 잊혀지고, 관광지로만 남을 것이다. 그런데도 그런 사실들을 덮어두라고, 진실을 호도하고자 하는 이들이 때를 만났다고 움직이고 있다고 한다.

 

'끝나지 않은 진실', 채 밝혀지지도 않은 진실이 끝나지 않을까 하는 두려움이 도는 이유가 여기 있다.

 

잠긴 함성

부제: 그 날, 그리고 지금도...

- 고기복

 

핏대세운 광풍

일출봉 우뭇개1)를 때리던 그 날,

독수리 날개 접어

일출 바라던 정겨운 눈 낚아챘다.

 

감지 못한 저 눈으로

生의 한 조각, 거친 손마디도

일출 앞에 감사하였건만…

 

독수리 발톱아래,

대살2)에 일출과 작별한

휑한 눈망울이 솟구친 그 날,

 

멜 몰리듯3)

널부러진 시체더미 가슴에 품고

파도는 목이 잠겼다.

 

그리고 지금도,

터진목4) 아래

멜 몰리듯

널부러진 좌판 기웃거리며

희희덕거리는 군상들의 낙락거림에

파도는 여전히 목이 열리지 않는다.

 

1), 4) 제주 4·3 당시 서북청년단에 의해 집단학살이 자행됐던 성산 일출봉 인근 지명들.

2) 대나무로 만든 죽창으로 살해된 것으로, 4·3 당시 제주양민들에 대한 집단학살은 대부분 대살이었다.

3) '멸치 널어 말리듯' 무수한 학살이 자행된 모습을 보면서 제주민들은 '멸치 널렸다'며 쉬쉬해야만 했다.


태그:#4.3.사건, #서북청년단, #오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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차별과 편견 없는 세상, 상식과 논리적인 대화가 가능한 세상, 함께 더불어 잘 사는 세상을 꿈꿉니다. (사) '모두를 위한 이주인권문화센터'(부설 용인이주노동자쉼터) 이사장, 이주인권 저널리스트로 활동하고 있습니다. 저서 『내 생애 단 한 번, 가슴 뛰는 삶을 살아도 좋다』, 공저 『다르지만 평등한 이주민 인권 길라잡이, 다문화인권교육 기본교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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