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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쪽으로 300미터 가량 가면 백범기념관이다.
▲ 백범기념관 가는길 효창공원쪽으로 300미터 가량 가면 백범기념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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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한 자식일수록 거친 음식을 먹이고 일찌감치 여행을 보내라는 말이 있다. 역사의식이 희박한 현대, 본보기가 될 만한 누군가의 이미지를 심어주고 싶다면 효창공원에 자리한 백범기념관을 찾아가 보는 것은 어떨까?

하얀 색 석조건물이 백범의 통일조국에의 일심을 보여주는 듯 하다
▲ 백범기념관 전경 하얀 색 석조건물이 백범의 통일조국에의 일심을 보여주는 듯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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효창공원에 자리한 백범기념관은 백범 김구 선생의 삶과 사상을 널리 알리고 백범 생애를 통해 근현대사를 꿰뚫어 볼 수 있도록 한 장소이다. 전문가의 자세한 해설과 영상자료를 통해 잘 알려지지 않은 1916년 이전 백범의 행적은 물론 1949년 6월 26일 서거 전까지 근 현대사의 흐름을 한눈에 꿰뚫어 볼 수 있다.

전시실에는 아이들이 좋아하는 영상만화물로 백범의 어린 시절이 소개된다. 백범은 가난한 평민의 집안에서 태어났으며 어릴 때는 엿을 사먹으려 멀쩡한 놋수저를 부러트려 엿과 바꿔 먹기도 하고, 떡을 사먹고 싶어 엽전을 훔치기도 하는 여느 아이들과 다를 바 없는 평범한 장난꾸러기 소년이었다.

양반들만 쓰는 갓을 썼다는 이유로 길거리에서 쌀한가마니 값이 넘는 갓을 벗겨 구겨버리는 모습에서 신분의 차이를 확연하게 알게 된 백범은 과거시험을 통해 신분의 상승을 꾀하고자 열심히 공부했으나 낙방했고 이미 일본제국주의 손아귀에 들어있던 조선왕조는 실질적 힘을 잃었음을 간파하고 시험을 포기한다. 아버지는 과거를 포기하고 관상학을 공부해서 밥벌이를 하라고 책을 사다준다. 관상학을 열심히 공부한 백범은 제일 먼저 자신의 관상을 보는데 자신은 평생 가난하고 힘들게 살 팔자임을 알고 낙담한다. 그러나 그는 곧 “얼굴보다는 몸을 움직여 사는 것이 더 낫고, 몸을 다스리는 것보다는 마음을 다스리며 사는 것이 더 낫다”는 생각을 하며 평생 자신의 마음가짐을 되돌아보며 살았다.

개인의 영달을 꿈꾸었던 백범이 동학에 관심을 가지고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를 만나게 되면서 국가와 사회로 의식을 확장하게 된다.

평생 스승 고능선의  가르침을 실천한 백범은 실천가이자 휴머니스트다.
▲ 백범은 평화를 사랑하는 휴머니스트였다. 평생 스승 고능선의 가르침을 실천한 백범은 실천가이자 휴머니스트다.
ⓒ 이명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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벡범 김구는 자신의 일생에 영향을 끼친 스승으로 안중근 의사의 아버지와 고능선을 꼽는다. 백범이 평생 스승으로 삼았던 고능선은 백범에게 "사람의 처세는 마땅히 의리에 근본을 두어야 한다. 그리고 일을 할 때에는 판단, 실행, 계속의 세 단계로 사업을 성취하여야 한다. 항상 무슨 일이나 밝혀 보고 잘 판단하여 놓고도 실행의 첫출발점이 되는 과단성이 없으면 다 쓸데없다… 가지 잡고 나무를 오르는 것은 기이한 일이 아니나, 벼랑에 매달려 잡을 손을 놓는 것이 가히 장부로다…"라고 가르치며 판단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백범이 머리싸움이 아닌 발로 뛰는 실천의 삶을 중요하게 여긴 것은 평생 스승의 가르침을 마음 깊이 새긴 데 있을 것이다.

백범 김구 선생은 ‘치하포 사건’으로 7년간 감옥살이를 하게 되는데 감옥살이를 하면서 가장 힘든 것 세 가지를, 온갖 잔인한 방법으로 고문을 받는 것, 굶기는 것, 그리고 다른 이들과 다르게 우대를 하며 회유책을 쓰는 것이라 했다. 

그 세 가지 중에서도 가장 참기 어려운 것은 인간의 교만함과 이기심 그리고 우월감을 자극해 변절하게 만드는 회유책이고 실제로 함께 저항운동과 독립운동을 하다가 변절한 수많은 동지들을 보면서 백범은 '비록 白丁, 凡夫처럼 낮은 자라 할지라도 一心으로 변절함 없이 애국심을 지키며 산다는 마음가짐으로 자신을 다스리려 호를 白丁의 白과 凡夫의 凡을 따서 白凡'이라고 지었다 한다.

사소한 욕망과 물질에 굴복하여 수없이 많은 오점을 남기는 현대 정치인들을 보면서 白凡 선생의 한결같은 심지가 더욱 존경스럽지 않을 수 없다.

'自身을 이기는 者가 가장 强한 者'라고 한다. 백범은 ‘배우기는 어려우나 행동하는 것은 쉽다( 지난행이: 知難行易)’라는 행동지침을 지닌 실천가로 평생 실천적 삶을 살았다. ‘자신을 다스리는 자가 가장 강한 자’라는 말이 있다. 늘 자신을 돌아보며 마음에 몸을 굴복시키고 살았던 백범의 삶은 쉽게 유혹에 굴복하는 현대인들에게 말없는 가르침으로 다가온다. 

‘나는 적성(赤誠:참된 정성)으로써 조국의 독립과 자유를 회복하기 위해 한인애국단의 일원이 되어 적국의 수괴(首魁:악당의 최고 우두머리)를 죽이기로 맹세하나이다.'

백범이 조직한 비밀테러 조직인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에 가입하면서 쓴 선서문과 일왕 히로히토를 암살을 위해 떠나기 전에 찍은 활짝 웃는 이봉창 의사의 모습은 커다란 여운을 남긴다. 백범 선생이 침통한 얼굴을 하고 있자 자신은 31년 동안 해보고 싶은 것을 다 해 보았고 의로운 일을 위해 떠나니 웃음을 보여달라고 했다고 하니 이봉창 의사의 호탕한 기개를 엿볼 수 있다.

어쨌거나 1932년 이봉창, 윤봉길 의거 배후 인물로 지목된 백범 김구 선생은 현상수배되어 피신하는 신세가 됐다. 일제가 내건 현상금이 처음 20만원에서 60만원으로 뛰어 요즘 돈으로 치면 200억에 가까운 금액이 된다. 독립의 기개를 살린 두 의사의 의거가 일본에 비친 무게와 일제가 받은 충격이 얼마나 컸는지 미루어 짐작할 수 있다. 

백범 김구는 29살에 결혼했는데 몸이 약한 부인은 사고의 후유증으로 49살에 세상을 뜬다. 부인이 자신이 낳은 둘째 신(信)이 어려 시어머니가 양육하시기 힘드실 테니 고아원에 보내라고 유언을 했다고 하니. 자식을 희생하면서 나라를 위해 애쓰는 백범의 삶에 걸림돌이 되지 않기를 바라면서도 한편으로 어미로서 가슴 아팠을 심정을 헤아려본다.

상하이에서 독립운동을 하던 중 아내를 잃은 백범이 쓴 비문에 특이한 점이 눈에 띈다 .

‘ㄹㄴㄴㄴ해 ㄷ달 ㅊㅈ날 남 / 대한민국 ㅂ해 ㄱ달 ㄱ날 죽음 / 최준례 묻엄 / 남편 김구 세움’

ㄱㄴㄷㄹ 순서대로 1234를 나타낸다니 4222년 3월 19일에 태어나고 대한민국 6년 1월 1일 사망하였음을 알리는 저 특별한 비문의 의미를 설명해 준다면  아이들은 수수께끼를 푼 듯한 만족감을 얻게 될 것이다.

바가지에  허드렛일을 마치고 얻은 찬밥이 들려있다.
▲ 백범 선생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 동상 바가지에 허드렛일을 마치고 얻은 찬밥이 들려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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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범 김구 선생은 어머니 곽낙원(郭樂園) 여사의 동상을 세우고 싶어했다. 대부분 사람들이 화려하고 영화로운 모습으로 치장된 동상을 세우고 싶어 하는데 반해, 백범은 특이하게도 1896년 치하포 의거로 인천 감옥에 갇힌 아들을 위해 부잣집에서 허드렛일을 하셨던 어머니 모습을 그대로 담기 원했다. 하루 종일 힘든 일을 해서 얻은 찬밥을 바가지에 담아 가지고 백범이 갇혀있는 감옥으로 가고 있는 모습,  백범은 그 시절 어머니 모습을 자신을 채찍질하는 도구로 삼고자 했던 것이다. 백범은 그 동상이 어머니 곽낙원 여사가 허드렛일을 하던 부잣집과 감옥을 오가던 길목에 세워지기 원했으나 동상이 완성되기 2달 전 서거하게 된다. 지금의 동상은 백범 서거 후에 완성된 것이라고 한다.

해방이 되고도 한갓 평민 민간인 신분으로 입국해 좌우를 떠나 오직 통일 조국을 꿈꾸던 백범은 추운 겨울에 추위와 굶주림으로 얼어 죽은 시민들을 보고 장제스가 선물한  유일한 겨울코트를 내놓기도 한  마음 따뜻한 휴머니스트이기도 하다.

남의 침략을 받아 본 아픔을 아는 백범은 높은 문화와 교육이 곧 힘이라고 여겼다.
▲ 백범은 높은 문화가 힘이라고 보았다. 남의 침략을 받아 본 아픔을 아는 백범은 높은 문화와 교육이 곧 힘이라고 여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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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가 원하는 우리 민족의 사업은 결코 세계를 무력으로 정복하거나 경제적으로 지배하려는 것이 아니다. 오직 사랑의 문화, 평화의 문화로 우리 스스로 잘 살고 인류 전체가 의좋게 즐겁게 살도록 하는 일을 하자는 것이다."  - <나의 소원> 중에서

백범은 문화와 교육의 중요성을 인식하여 가난한 아이들의 교육과 장학 사업에 늘 관심을 가지고 앞장서 몸소 실천했다. 그런 백범이 서거하자 백범학원 아이들은 자신들의 마음을 아래와 같이 표현했다.

백범 서거 후 백범학원 아이들이 쓴 추도의 글이다.
▲ 백범 학원 아동들의 추도글 백범 서거 후 백범학원 아이들이 쓴 추도의 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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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라버지 이렇듯 변을 당하시와 / 급작ㅎ이 가옵시매 / 원통하기 더욱 끝이 없나이다 / 하라버지 그렇나 저의 어린 것들은 / 가슴 속 깊이깊이 맹세하옵니다 / 그 성스러운 뜻을 이여 받들고저 / 하라버지 임의 뜨옵신 그 혼령이나마 / 하늘에 기리 안식하소서 / 어리오나 저의 백여 백범이 또 있사오니'(대한민국 三十一년 六월 二十六일)

독일 나치의 손에 600만명이 학살당한 경험이 있는 유태인들은 자녀들의 역사교육에 투철한 민족으로 유명하다. 그들은 항상 “용서는 하되 잊지는 말자”라는 마음으로 홀로코스트 현장을 그대로 재현하여 역사교육의 현장으로 활용하고 있다. 불과 20년 전 광주 사건마저 까맣게 잊고 살거나 아예 그 사실을 알지 못하는 자녀를 탓할 것이 아니라 역사 의식에 투철하지 못했던 부모 자신의 모습을 먼저 되돌아봐야 하지 않을까?

먼 곳이 아니라 가까운 곳에 자리한 기념관을 활용하여 자연스럽게 역사의 흐름을 깨닫게 하는 것이야 말로 살아있는 교육이 될 것이다.

전시관 1층에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 기념촬영 장소 전시관 1층에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장소가 마련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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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2층을 돌아보고  전시관을 나오면 일층에 기념촬영을 할 수 있는 곳도 마련되어 있다

덧붙이는 글 | '백범기념관'은 6호선 효창공원역 1번 출구로 나와 효창공원 방향으로 10분 정도 걸으면 된다. 6시까지 관람 가능하며 퇴관시각 1시간 전에 입장을 마감한다. 관람료는 없다.

2월 16일부터는 가족 관람객을 위한 "주말전시 해설프로그램“을 운영하고 있다. 주말 프로그램은 매주 토. 일 2시부터 4시까지 진행하는데. 내용은 ‘백범기념관 전시관람+활동지 작성+백범 선생과 사진찍기’ 며 사전에 25명을 전화예약(02-799-3433 구지연) 받는다. 현장접수는 결원이 생겨야 가능하다고 하니 사전 전화 예약을 하고 가는 것이 좋겠다.

백범 김구 선생에 대한 전기나 < 백범 일지> <백범어록> 등을 통해 백범에 대해 사전 지식을 쌓고 간다면 훨씬 흥미로운 답사가 될 것이다.



태그:#백범기념관, #백범, #고능선, #한인애국단, #곽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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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혼자 잘살면 무슨 재민교’ 비정규직 없고 차별없는 세상을 꿈꾸는 장애인 노동자입니다. <인생학교> 를 통해 전환기 인생에 희망을. 꽃피우고 싶습니다. 옮긴 책<오프의 마법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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