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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명길 소환령을 받은 인조가 비국당상회의를 주재했던 곳이다.
▲ 양화당. 최명길 소환령을 받은 인조가 비국당상회의를 주재했던 곳이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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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과 임경업 체포령을 접수한 조정은 초상집 같았다. 북행은 죽음의 길이다. 압록강을 건너면 돌아온다는 기약이 없다. 정신적인 지주 김상헌은 이미 잡혀가 옥살이를 하고 있고, 권력실세 최명길을 압송하라니 땅이 꺼지는 것만 같았다 누구를 더 부를지 모른다. 북녘에서 오는 전령은 저승사자나 다름없다. 관료들은 바짝 엎드렸다.

시름에 잠겨 있던 인조가 비국 당상 회의를 소집했다.

"이번 청국의 분노는 참인가?"
"깊은 뜻이 있는 것 같은데 아직 그 진의를 알 수 없습니다."

신경진이 머리를 조아렸다.

"이지룡을 비롯한 군관들은 무엇 때문에 데려간단 말인가."
"용장이 우리나라의 일을 전담하면서 항상 황제에게 조선의 일은 의심할 것이 없다고 말하였는데 이제 와서 일이 뜻밖에 벌어졌으니 그 또한 면목이 없을 것입니다. 조신이 많이 잡혀간 것은 이 때문일 것입니다."

"완성군과 임경업을 보내라 하는데 이 일을 어찌하면 좋겠는가?"
"떠들썩한 말은 있으나 증거가 될 만한 단서가 없으니 숨기는 것이 좋겠습니다."

청나라가 물증을 확보하고 있다는 사실을 모르고 있는 신경진이 모르쇠로 일관하자고 주장했다. 잠자코 있던 최명길이 입을 열었다.

사실을 은폐하려다 더 큰 화를 당할 수 있다

"저들이 이미 명나라 배가 왕래한 정황을 알고 이렇게 하는 것 같은데 지금 사실대로 말하지 않으면 그들의 의심을 더하게 할 뿐입니다. 또 세상일은 낙관만 할 수 없는 것이니 거짓으로 덮으려다 더 이상 숨길 수 없는 지경에 이르면 화가 전하에게 돌아가서 예측할 수 없는 일이 생길 수 있습니다. 사실대로 말하여 신과 임경업 두 사람의 죽음에 그치게 하는 것이 낫겠습니다."

최명길의 목소리가 양화당을 울렸다. 떨리는 목소리였다. 배석했던 대소신료들은 숨을 죽였다. 잠시 침묵이 흘렀다.

"모두가 과인의 부덕이다."

말끝을 잇지 못한 인조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국가를 위해 봉사했던 충직한 신하를 죽음의 땅으로 보낸다 하니 가슴이 찢어졌다. 그렇다고 아니 보낼 수 없다. 청나라의 명을 거역할 힘이 없다.

고양에 머무르고 있는 임경업은 현지에서 곧바로 출발하라 명한 인조는 최명길에게 5백금을 여비에 보태 쓰게 하고 표피 갖옷을 하사했다. 청나라에서는 죄인을 묶어 보내라 했지만 마지막 가는 신하에게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최명길이 임금에게 4배를 올렸다. 하직인사다. 어쩌면 마지막 인사일런지 모른다. 최명길은 담담했지만 임금이 눈물을 훔쳤다. 임금에게 하직 인사를 한 최명길이 청나라에서 호출한 이조판서 이현영, 예조판서 이식, 호군 이경증, 대사헌 서경우, 대사간 이후원과 함께 한성을 떠났다.

최명길이 의주에 도착했다. 참판 박황, 사문사 정치화·윤순지 등 여러 사람들이 눈시울을 붉히며 맞이했다.

"임경업은 직책이 평안병사로서 배를 마련하여 중을 보낸 일이 모두 그의 손에서 나왔으니 살아날 리는 만무합니다. 임경업에게 책임을 밀어버린다면 화를 완화시킬 수 있을 것입니다. 정승은 임경업과 경중이 다르며 이는 경업을 저버리는 것이 아닙니다."

임경업을 희생양 삼아 위기를 탈출하라고 박황이 건의했다.

책임전가는 군자의 도리가 아니다

"천하에 명분과 의리를 세우고자 하였는데 지금 죽고 사는 지경에 이르러 어떻게 남에게만 밀고 자신은 모면할 수 있겠는가?"

"대감의 말을 들으니 죽었던 충신이 살아온 것 같습니다. 충신열사는 마땅히 이와 같아야 하지 않겠습니까."

박황이 최명길의 소매를 잡고 흐느꼈다. 의주에서 하룻밤을 묵은 최명길은 일행과 함께 압록강을 건넜다. 바로 그때 평산부사가 보낸 긴급 파발이 조정에 당도했다. 금교 참(站)을 통과한 임경업이 바람과 함께 사라졌다는 것이다. 깜짝 놀란 인조가 대소신료와 비국당상을 불러들였다.

"경업은 어디로 갔겠는가?"
"바다를 건너간 것으로 생각하였으나 이제 살펴보니 미처 배를 타지 못했을 것입니다."

금군을 풀어 수색했던 신경진이 보고 했다.

"사람 마음이란 참으로 헤아리기 어렵습니다. 경업은 늘 국사에 죽겠다고 말하였는데 도주할 계획을 세울 줄은 미처 몰랐습니다."

우의정 심기원이 맞장구를 쳤다. 심기원은 수어사, 호위대장, 병조판서에 이어 우의정에 올랐다. 고속 승진이다. 이로부터 2년 후, 심기원은 회은군 이덕인을 임금으로 추대하려는 모반 사건에 연루되어 처형되었으니 모를 것은 심기원의 마음이다.

말이 실제보다 지나친 자는 반드시 일을 망치고 만다

"경업은 일찍이 경의 수어사 중군으로 있었는데 과연 그 사람됨을 몰랐는가?"

"그가 떠나려고 하면서 그의 친구에게 하는 말이 ‘나라를 위해 한번 죽으려고 한 것이 소원이었는데 이제 헛되이 죽게 되었다.’고 하며 눈물을 흘리고 떠났다고 하였습니다. 그래서 신은 자기의 몸을 돌보지 않고 국가를 위해 죽을 자는 반드시 이 사람일 것이라고 생각하였는데 이처럼 어려운 처지에 이렇게 할 줄은 몰랐습니다."

"말이 실제보다 지나친 자는 반드시 일을 망치고 만다는 것은 경업을 두고 한 말이다. 처음에는 큰소리를 쳐놓고 끝내 도주하였으니 이 어찌 사람의 도리이겠는가."

"황공하옵니다."

“모든 일을 이미 감당하려고 하였으면 시종 스스로 감당하는 것이 좋을 것인데 영상이 도망간 경업에게 모든 일을 미룰까 매우 염려스럽다.”

"중을 보낸 것은 사실 경업이 한 일이지만 사건이 매우 중대하기 때문에 최명길이 스스로 감당하려고 한 것입니다."

신경진이 최명길의 의중을 전했다.

"영상이 떠날 때 용장에게 대답할 말을 서로 의논하지 않았는가? 그리고 강을 건넌 뒤에 대신에게 글을 보내오지 않았는가?"
"완성군이 중도에서 신들에게 글을 부쳐왔는데 처음의 뜻을 변치 않은 듯 하였습니다."
"매우 다행이다."

의주와 마주보는 청나라 쪽 포구다.
▲ 애자하. 의주와 마주보는 청나라 쪽 포구다.
ⓒ 이정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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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명길이 압록강을 건너 청나라 영역에 들어갔다. 애자하에서 기다리고 있던 군사들이 그를 포박하고 칼을 씌웠다. 책문을 통과하여 봉황성에 도착했다. 도착 즉시 독방에 가두고 음식과 물을 넣어주지 않았다. 기를 꺾어놓기 위한 수순이다.

용골대가 죄인을 끌어내라 명했다. 심문장에는 용골대와 가린, 박시가 앉아 있었다. 끌려나온 최명길이 용골대를 바라보았다. 낯익은 구면이다. 산성에서 강화협상 차 청군진영에 드나들며 무수히 만났던 인물이다. 하지만 용골대는 안명을 몰수했다.

"투항한 명나라 장수가 너희들이 사람을 보내 서로 내통한 사실을 말하였고 또 그 문서도 있으니 더 이상 숨기지 말라."
"숨길 것도 없고 숨기고 싶은 생각도 없소."
"무슨 문서를 보냈는가?"
"이름을 쓰지 않은 서첩(書帖) 한 통을 주었고 떠나는 중이 시 한 수를 부탁하기에 율시 한 편을 지어 주었소."
"중을 보내는 일은 누가 주장하였는가?"
"임경업과 나, 두 사람이 함께 했소."
"국왕도 아는가?"

양국의 국가이익을 위해 세작을 활용했다

"내가 병이 든 이후 3년 동안 심양 길을 밟지 못하다가 오늘에야 노야(老爺)를 뵙게 되니 매우 반갑고 영광스럽다. 정축년이후로 변방의 백성들이 명나라 주사(舟師)가 곧 올 것이라고 했으나 나는 개의치 않았다. 귀국에 군사를 파견한 뒤로는 남조(南朝)가 곧 우리의 적국이 되어 버렸는데 명나라 수군이 온들 무슨 소용이겠는가?

그래서 세작을 보내 그 화를 늦추어 볼까 하였으나 국왕이 권모술수를 좋아하지 않으시기 때문에 나 혼자서 임경업과 의논하여 중 한 사람을 보냈던 것이니 이는 곧 나라의 안전을 도모한 계책이다. 황제가 금지한 것은 교통하여 왕래하는 것을 말하였을 터, 적국과 서로 대치하면서 어찌 첩자를 보내는 것까지 폐할 수 있는가?"

기막힌 논리전개다. 청나라와 조선 양국의 국가이익을 위하여 간첩을 활용했기로서니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다. 용골대의 입이 다물어질 수밖에 없었다. 최명길은 당대의 논객이다. 만주벌판을 휘젓고 달리며 사냥하던 사람들과는 격이 달랐다.

20세에 사마시와 진사시를 한 번에 급제하여 숭문원에 화려하게 출사한 관료다. 당시 선비들이 그랬듯이 사서삼경은 기본이고 손자병법과 대학연의를 통달하고 양명학에 조예가 깊었다. 양명학은 이(理))와 기(氣)를 각각 독립체로 인식한 성리학과 달리 ‘앎과 행함은 분리할 수 없다.’는 지행합일설(知行合一說)을 근간으로 하는 학문이다. 이러한 최명길과 대적하려니 뭔가 짧음을 느꼈다.

"중이 떠날 때 무슨 말을 해서 보냈는가?"
"첩자에 관한 말을 물을 것이 뭐가 있는가?"

누가 누구를 심문하는지 모르겠다. 첩자를 이용할 때 감언이설이 총동원된다는 것쯤은 야전에서 잔뼈가 굵은 그도 잘 알고 있다. 쓸모없는 이야기를 들어 무엇하려냐 는 것이다. 용골대가 뒤통수를 긁적이며 미소를 지었다. 한방 먹었다는 표정이다. 최명길을 상대하기가 버겁다고 판단한 용골대가 최명길을 하옥하라 명하고 세자를 찾아갔다.


태그:#소현세자, #최명길, #임경업, #욜골대, #의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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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실(事實)과 사실(史實)의 행간에서 진실(眞實)을 캐는 광원. 그동안 <이방원전> <수양대군> <신들의 정원 조선왕릉> <소현세자> <조선 건국지> <뜻밖의 조선역사> <간신의 민낯> <진령군> <하루> 대하역사소설<압록강>을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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