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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상능선에서 저 아래로 바라다 보이는 산정호수는 
숲 속의 박힌 보석 같아 보인다
▲ 산정호수 정상능선에서 저 아래로 바라다 보이는 산정호수는 숲 속의 박힌 보석 같아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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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 한그루와 가을꽃과 어울린 억새밭은 화사하기 그지없다
▲ 억새밭 풍경 나무 한그루와 가을꽃과 어울린 억새밭은 화사하기 그지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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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낮의 태양이 아무리 뜨거워도 9월은 엄연히 '가을'이다. 가을이 시작되고 있음을 알려주는 거부할 수 없는 자연의 몸짓들을 보게 되는 때이다. 숲에 들어가 보면 가을의 움직임은 더욱 확실해진다.

궁예가 왕건에게 패하고 크게 울었다는 산, 지난 7일 명성산에서 가을을 만나고 왔다. '명성산'(923m) 하면 아마도 많은 이들이 '산정호수'를 떠올릴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지금은 쉽게 진입할 수 있는 산정호수는 사람의 손을 탄 흔적이 너무 많다.

경기도 포천으로 자주 가 보지 못했기에 상상의 여지가 많은 곳이었고, '산정호수'라는 지명은 그 이름만으로 나를 설레게 하기에 부족함이 없었는데. 모든 자연환경은 인공의 요소가 많아졌을 때 필시 고요의 멋을 잃어버리기 십상이다.

'산속 고요함으로 들어앉은 아름다운 호수'여야 할 산정호수가 저간의 시장바닥 같은 소란스러움만이 가득했으니 서둘러 나는 발길을 돌리고 말았다.

한 가지 위안은 산정호수를 볼 목적보다는 명성산을 오른다는 애초의 목적을 상기하는 일. 명성산을 오르면서 나는 여느 산보다 그 내력에 귀를 기울였다. 나라를 잃고 떠돌던 역사의 패자가 울음을 운 산이었다는 내력에 묘한 끌림 같은 게 있었다.

산을 걷다 보면 어디선가 궁예의 울음 운 흔적이라도 확인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기대감으로 산을 올랐다. 한 나라를 이끌던 왕이었던 만큼 궁예가 운 터는 산 아래쪽이 아니라 필시 까마득히 높은 산 정상 어디쯤이 아니었을까.

궁예의 전설이 서려서인가, 명성산의 산새가 가히 사내대장부의 기운을 품은 듯하다. 기암괴석과 어울린 계곡이 시원하고 넓게 펼쳐져 있었다. 숲이 좋으니 물도 좋구나 싶어 계곡으로 다가가다 또 한 번 실망을 안게 되었으니 어찌 된 일인지 물빛이 너무 탁했다. 흙탕물인 듯싶은 계곡물은 산 위쪽에 설치된 사격장이 원인이라는 사실은 머잖아 밝혀졌다.

산길에 철조망이 쳐져 있었고 노란 팻말에는 '위험'이라는 표시가 쓰여 있었다. 아직도 가끔은 그곳에서 사격연습을 하는 모양이었다. 우리가 분단된 조국에 살고 있구나, 새삼스럽게 느끼게 된 장소였다.

민족상잔이라는 비극의 역사를 지나왔으니 어쩔 수 없는 측면이라고 쳐도, 저 시원하게 뻗은 계곡의 탁한 물빛은 아무래도 안타깝기 그지없었다.

신선이 날아다녔을라나... 등산로 초입의 비선폭포
▲ 비선폭포 신선이 날아다녔을라나... 등산로 초입의 비선폭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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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성산은 규모가 굵직한 폭포들을 여럿 거느린 남성적인 산이다
▲ 등룡폭포 명성산은 규모가 굵직한 폭포들을 여럿 거느린 남성적인 산이다
ⓒ 김선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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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격장의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계곡 쪽에는 명성산을 대표하는 멋진 폭포가 여럿 포진해 있다. '비선폭포' , '비룡폭포', '등룡폭포' 등 신선과 용들이 날아다녔음 직한 옛날을 떠올려 보게 하는 이름도 묵직한 폭포들이 산길을 가는 이들의 눈을 시원하게 만들어 주기에 부족함이 없었다.

계곡길과 멀어지면서 명성산은 남성적인 느낌보다 여성적인 부드러운 느낌으로 펼쳐졌다. 다양한 수종의 나무들이 빽빽하게 들어서 있고, 나무들과 어울린 너덜지대 곁으로 작은 도랑 같은 계곡물이 흘렀다. 조금 전 보았던 사격장의 영향을 받은 큰 계곡과는 다른 너무도 깨끗한 물을 흘려보내는 작은 물길이었다. 이 차고 맑은 물의 연원은 분명히 바로 위쪽부터 시작되는 억새밭에서 흘러온 것이리.

편안하게 펼쳐진 억덕 가득 억새밭이 펼쳐진 명성산
▲ 안덕재의 억새밭 편안하게 펼쳐진 억덕 가득 억새밭이 펼쳐진 명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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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성한 숲길을 빠져나오자 갑자기 세상이 환해지며 억새밭으로 둘러싸인 안덕재다. 안덕재, 편안한 언덕이라는 뜻일까? 억새가 자라기에 더 없이 이상적인 장소다. 그런 탓인가, 억새밭으로 유명한 다른 산들보다 그 규모는 그리 크지 않으나 억새군락이 유난히 아름답게 자라고 있다. 게다가 화사한 분홍색 꽃을 피운 억새밭이라니. 억새가 활짝 피면 누런 갈빛이 하얗게 보일 정도로 풍성해진다.

9월 초순의 명성산에서 만난 분홍 억새꽃은 아직은 꽃이 아닌 이삭이 패는 현상이다. 어쨌든, 활짝 피었을 때보다 훨씬 화사해 보이는 안덕재에서 만난 억새는 분홍빛 물결이다. 분홍 억새와 어울려 핀 가을꽃들도 더욱 화사하다. 들꽃과 어울린 억새밭을 구름 위를 걷듯 돌아다니다 문득 '궁예약수'와 마주쳤다. 억새밭 사이 사이로 조성해 놓은 산책길을 걷다 '궁예약수'와 마주치던 순간, 잊고 있었던 궁예의 울음이 다시 생각났다.

이곳에서 궁예가 산을 울리듯 커다란 울음을 울었을까, 울고 났으니 갈증이 났으려나. 어쨌든, 그가 이곳에서 물을 마시고 갔다는 안내판의 설명에 나는 개연성을 부여하고 싶었다. 달고 시원하다고 약수터에 대한 안내와는 상관없이 물맛이 정말로 좋았다. 굳이 궁예와 연관을 시켜서가 아니라 억새가 품다가 흘려보낸 물이라서가 아닌가 싶었다.

한 바가지 퍼내고 두 바가지 퍼내고 샘물은 돌확을 가득 채우고 항상 정량을 유지하는 것도 내 눈에 참으로 신기해 보이는 일이었다. 샘물 주변엔 온통 억새밭이고 샘 바로 위에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있는 것도 궁예약수를 이야기가 있는 공간으로 만들기에 충분했다. 안덕재의 억새밭은 전쟁통에 불탄 산에 억새가 들어와 자란 케이스라 그 역시 바라보는 마음이 한없이 가벼울 수많은 없었지만.

계곡도 좋았고, 억새밭도 정겨울 만큼 인상적이었지만 명성산은 참으로 멀었다. 정상을 향한 능선이 안덕재 삼거리에서 다시 시작되는 까닭이었다. 그곳에서부터 다시 올라온 거리보다 1킬로여를 더 걸어야 한다고 했다(총 4km가 훨씬 넘는 구간임). 다만 용기를 가져보는 것은 능선을 따라 완만하게 정상까지 이어진다는 사실이었다.

드문 드문 억새가 군락을 이루고 있고, 나무들이 듬성거리는 정상능선은 지루하리만큼 길게 이어졌다. 산능선이 완만하게 이어지다 철원군 쪽으로 꺾어진 저 멀리 잡힐 듯 명성산의 또 다른 봉우리인 삼각봉과 나란히 솟은 명성산 정상을 앞에 두고 그만 길을 돌아서야 했다.

체력과 인내력이 더욱 필요한 명성산 정상 능선에서 그만 주저앉고 말았지만 안덕재의 억새밭에서 누린 풍요로운 산행의 기억은 간직할 만한 것이었다고 자위한다. 능선길에서 바라다본 산정호수는 또 얼마나 신비롭던가. 산 위에서 바라볼 때 산정호수는 '산속에 숨은 고요한 호수' 본연의 모습을 보여주기에 충분했다.

산정호수가 있고 억새밭이 있어 명성산은 그 명성을 오래 간직하리란 희망으로 다시 산길을 되돌아오는 여기저기 바위구절초가 하얗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억새밭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연인들이 걸어간다
▲ 연인들의 길 억새밭 사이로 난 산책로를 따라 연인들이 걸어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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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그:#산정호수, #억새밭, #명성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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